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52)
258화. 그리고 나뭇잎
서천무존 정룡과 독왕 당평세.
두 절대자를 중심으로 구름의 용과 무형의 독이 대기를 감쌌고 서로를 밀어내었다.
파직, 파지직.
충돌음은 요란하지 않았다. 허나.
숲속에는 마치 터지기 직전의 자연재해와 같은 고요함이 감돌았다.
그렇게.
영겁과 같은 일각이 흘렀다.
구름이 주춤하며 일보 물러섰다.
“뭐… 오늘 일은 미안하게 됐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듯하니 이만 물러갈까 하네만. 어떻게, 허락을 좀 해주겠나?”
그리고 다시, 정룡이 말했다.
“…….”
그것은.
말하자면 당평세로 하여금 ‘선택’을 요구하는 말이었다.
물러서거나 혹은.
생사결을 펼치거나.
서로를 적대하는 두 절대고수 간의 선택지는 결국 둘 중 하나로 귀결될 뿐이다.
그리고 지금, 당평세의 입장에서는 ‘아주 조금 유리한 상황’에서 정도맹의 머리 하나를 쳐낼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훅, 후두둑.
허나 다음 순간, 당평세가 팔을 내저었다. 공중에 떠올랐던 만천환의 암기들이 일거에 땅으로 떨어졌다.
“…썩 꺼지시오, 무존.”
당평세가 손사래를 쳤다.
“클클클, 거 눈물 나게 고맙네!”
정룡이 웃음을 흘렸다.
허나 그 이마에는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이내 정룡이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저벅.
“…잠깐.”
이벽이 한 걸음 나아갔다.
후욱.
그리고 그 순간.
사락사락.
이벽의 전면으로 보이지 않는 나뭇잎들이 뻗어나갔다. 구름과 맹독의 기운을 밀어내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 자네?”
휙, 당평세의 고개가 꺾여졌다.
노인의 눈가에 경악이 스쳤다.
“송구하지만, 이대로는 못 보내드리겠소, 노인장. 나와는 아직 셈이 남아있지 않소?”
허나 이벽은 당평세를 향하지 않았다. 정룡을 바라보며 해야 할 말을 꺼낼 뿐이었다.
“하나 약조해주셔야겠소.”
저벅.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정도맹 차원에서 아미… 혹은 그 세력권에 이 이상 함부로 발을 들이밀지 않기로 말이오.”
“…….”
그리고.
이벽이 한 발 나아감과 함께 주변을 두르고 있는 나뭇잎의 영역 또한 함께 전진했다.
이내 구름과 맹독으로 양분되어 있던 공간은 나뭇잎의 개입으로 세 개의 영역으로 재편되며 또다시 공기를 바꿔놓았다.
“…그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아미라니? 아미산의 그 아미파를 말하는 건가?”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정룡이 답했다.
물론, 자세한 영문을 알지 못하는 그에게는 퍽 진심으로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허나.
“근래에 아미파가 청성제일검 공능자를 비롯해 청성과 그 속가 세력의 침략을 받았소. 물론, 배후에는 정도맹의 뜻이 있었겠지.”
이벽이 말을 이었다.
“고로 그자를 인질로 앞세워 정도맹 측과 이야기를 터볼 생각이었소만… 노인장이 다짜고짜 달려든 탓에 조금 전 그를 놓치고 말았지.”
“…….”
“그러니 나로선 노인장께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없소. 어차피… 이제부터 무당으로 가실 게 아니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사락사락, 이벽의 나뭇잎이 흔들렸다. 두 명의 천하십대고수 사이에 끼어서도 이벽의 영역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니 가는 김에 검존께 말씀 좀 전해주시오. 뭐,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지 않소?”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이벽의 ‘발언권’을 증명하는 셈이었으므로, 당평세조차 섣불리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클클클!”
그리고 정룡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말려 올라갔다.
“싫다면?”
불현듯 서천무존의 웃음이 멈추었다. 이내 가라앉은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아미를 건드리지 말아달라’라… 뭐, 내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이네만. 내가 왜 자네의 그런 억지를 들어줘야 하지?”
“…….”
“자네가 대체 뭘 할 수 있길래?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내게 덤비기라도 할 텐가?”
물론.
조금 전의 일전을 통해 이벽은 ‘도저히’까진 아니더라도 현재 자신의 경지로는 정룡을 이기기 어려우며.
하물며 그가 마음먹고 달아나고자 한다면 뒤쫓는 것 역시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같은 경지라고 한들.
경지에 머물러있던 세월에는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는 결국 ‘영역’을 다루는 능숙함의 차이를 빚어내었다. 허나.
“싫으면 마시오.”
이벽은 팔짱을 꼈다.
“말마따나 지금의 나로선 당신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니 말이오. 허나 독왕께서 나타나신 지금, 나를 어쩌지 못하는 건 그쪽 또한 마찬가지지.”
“…….”
“또한 노인장께선… 조금 전 나더러 ‘결국은 같은 편이 될 거라’고 말하지 않았소?”
“……!”
정룡의 미간이 흔들렸다.
“뭐, 앞으로의 일에 대해 아직은 결정한 바가 없소만. 최소한 나는 이웃이 약해진 틈을 타 곳간을 털어먹는 도둑놈들의 편이 될 생각은 없소.”
“…….”
그것은.
이를테면 ‘자기 자신의 미래를 담보로 한 위협’이었다.
천하십대고수란.
그 자체로 세력이자 발언권이다. 그렇기에 신개와 천존을 잃은 구 무림맹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허나.
당금의 이벽은 그에 버금가는 존재가 되었으며, 심지어는 매 순간의 경험을 통해 ‘더욱 완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서로가 알고 있었다.
“당신들이 어떤 계산을 가지고 있건… 앞일을 생각한다면 최소한 나를 적으로 만들지는 않는 편이 좋지 않겠소?”
다시 이벽이 말했다.
그것은 물론, 천하십대고수를 상대로 입에 담기에는 퍽 광오한 말이었다.
“…클클클! 클클클클!”
이내 정룡이 웃음을 터뜨렸다. 쇳소리와 같은 탁한 음성으로 한참을 걸걸대며 웃었다.
“애송이가… 조금 띄워줬다고 제 놈의 몸값을 스스로 하늘까지 매겨버린단 말이지?”
“감히 그렇소.”
이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만에 젖을 생각은 없으나, 스스로 이뤄낸 경지를 깎아내릴 이유 또한 없었다.
천하십대고수는.
여전히 이벽보다는 조금 위에 있는 존재들인 듯했다. 허나 그 차이는 그저 한 뼘 정도에 불과하며.
자신 역시 허공에 발을 띄웠고, 마침내 하늘을 오르기 시작했다. 고로 더는 아득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래서 뭐… 어떡하시겠소?”
“…뭐, 알겠네! 그냥 한 번 튕겨봤네. 이 상황에서 내가 달리 뭘 어떡한단 말인가? 클클클.”
정룡이 어깨를 으쓱했다.
“더욱이 내 생각에는 껍데기만 남은 구 무림맹보다야… 자네에 비하면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닌 것 같으니 말일세.”
훅.
정룡의 몸이 가볍게 떠올랐다.
“그럼 이만 정말로 가도 되겠나? 응? 계속해서 노려보니 노부가 무서워서 슬슬 오줌이 나오려고 하지 않나? 클클클!”
“…….”
이벽은 정룡의 눈을 바라보았다.
물론, 눈빛을 본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상대의 진의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최소한.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살펴 가시오.”
이벽이 말했다.
“클클클! 다음에 봤을 때에는 부디 내가 아니라 저쪽을 그렇게 노려봐줬으면 좋겠구먼!”
정룡이 독왕을 턱짓했다.
“…….”
그 순간, 독왕의 손이 까닥였다.
암기 한 자루가 소리도 없이 정룡에게로 날아들었으나 그 몸을 두른 구름을 뚫지는 못했다.
훅.
다음 순간 구름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때 이미 그 자리에는 정룡의 모습이 없었으며, 용의 꼬리는 창공 저편으로 사라진 뒤였다.
* * *
정룡이 자리를 떴다.
그렇게 세 사람이 대치 중이던 공터에는 마침내 이벽과 독왕 당평세만이 남았다.
물론, 당려옥과 정연화 역시 이벽의 등 뒤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감히 두 사람에게 다가설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자네.”
독왕이 말했다.
사락사락.
이벽의 주변을 감싼 무형의 나뭇잎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가에 깊은 주름이 서렸다.
그것은.
오십여 년 전, 자신의 눈앞에서 마교 우호법 풍마의 목을 어깨 위에서 떨어뜨려 놓았던 바로 그 힘이었다.
비록, 그 당시의 당평세로서는 선우명의 힘을 명확히 알아보지는 못했으나 이벽의 나뭇잎을 확인한 지금 이 순간.
사락, 사라락.
정확히 같은 힘임을 이해했다.
일말의 의구심조차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힘은 자신이 일평생을 갈고닦아 이뤄낸 무형지독의 경지로도 쉬이 승부를 점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축하하네. 정말로 날아올라 버렸군. 헌데… 자네라면 해낼 거라 생각은 했네만 그 나이에 벌써 내 옆에 서려 드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허헛, 당평세가 웃었다.
약간의 허탈함이 밴 웃음이었다.
“…당 노야의 덕분이오.”
이벽은 다시 한번 포권했다.
“늦었지만 감사 인사 드리겠소.”
오 년 전, 이벽은 당평세에 의해 권왕으로부터 목숨을 구해졌고, 창공비검의 깨달음을 얻는 것에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맹철극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
허나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퍽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서로 마냥 감사하고 반가워할 입장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송구하지만, 당 노야.”
다시 이벽이 말했다.
“노야께도… 조금 전 무존께서 해주었던 것과 같은 약조를 해주셨으면 하오만.”
“…뭐라?”
“당가의 대표로서 아미를 치지 않겠노라 약조를 해주시오. 그렇다면 당 소저를 돌려드리리다.”
꿈틀.
당평세의 하얀 눈썹이 흔들렸다.
“…자네.”
후욱.
그리고 그 순간.
무형지독의 영역이 흔들렸다. 파스스, 영역 간에 맞닿은 이벽의 나뭇잎이 위태로운 소리를 내었다.
“지금… 내 혈육의 목숨을 가지고 감히 나와 거래를 하자는 겐가?”
“자, 잠깐만요, 할아버지!”
그때였다.
이벽의 등 뒤에 물러선 채 상황을 바라보던 당려옥이 그제서야 헐레벌떡 끼어들었다.
“저, 그게… 제가 지금 인질로 붙잡힌 건 맞긴 한데요! 소협이 안 나타났으면 아미에서 팔 잘려서 외팔이 될 뻔했거든요……?”
“…뭐? 그게 무슨 말이더냐?”
“얘기하자면 좀 긴데요. 간추리자면 재수 없게 청성제일검한테 걸리는 바람에…….”
“…허헛!”
당평세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독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쓸데없는 걱정은 말거라. 애초에 지금의 저 녀석은… 내가 해치고자 한다고 그리 쉽게 해칠 수 있는 녀석도 아니고 말이다.”
“…오호홋! 딱히 그런 의미에서 하는 말은 아니구요~”
“욘석아. 외려 자칫하면 내가 당할 수도 있는 판국인데… 이 할애비 걱정은 안 하냐?”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
이벽은 잠시 할 말을 놓쳤다.
상황은 분명 심각해야 했으나, 어쩐지 분위기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당평세가 다시 이벽을 향했다.
“그보다 자네. 각오는 되어있나?”
퍽 걱정스런 어투였다.
“기억하고 있겠지? 자네는… 본래 우리 의혈맹에 있어서는 ‘이미 죽은 목숨’과 다름없네.”
“…….”
물론 잊지는 않았다.
권왕으로부터 목숨을 구해졌던 그때, 당평세는 이벽에게 ‘정파무림으로는 두 번 다시 발을 들이지 말라’는 경고를 해주었다.
“왜 돌아왔나?”
“…할 일이 생겨서 말이오.”
“그게 당금 정파무림의 정세나 혹은 우리 의혈맹의 행보와는 어떤 관계가 있나?”
“아직은 잘 모르겠소. 다만 어찌 되었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냥 외면하기도 좀 그래서 말이오.”
“…….”
다시 침묵이 흘렀다.
“자네는… 신개와 천존을 잃고 구심점이 사라진 구 무림맹의 ‘새로운 머리’가 될 생각인가?”
“……!”
일순,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딱히 그런 건 아니오만.”
“그런 게 아니라면… 당장 아미나 소림에 닥쳐올 일들을 우격다짐으로 막아놓는다고 해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나?”
“…….”
그것 또한 정곡이었다.
동시에 이벽 스스로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은 아니었다.
‘어정쩡한 개입.’
이벽은 그저 눈앞에 닥친 위기로부터 아미를 한 번 구해줬을 뿐, 결국은 이미 무너져버린 세력 간의 균형 위에서는 딱히 의미가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말일세.”
다시 당평세가 말했다.
“세 줄기로 갈라졌던 물길이… 다시 하나로 합쳐질 될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르지. 흐름이 그렇게 되어버린 이상, 거스르기는 어려운 걸세.”
“……!”
“그러니… 무림으로 돌아왔다면 어느 곳을 밟고 설 건지, 자네의 입장을 확실히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