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51)
257화. 구름과 맹독
탁.
정룡의 추격을 떨쳐낼 수 없음을 깨달은 이벽은 이내 비교적 탁 트인 어느 공터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어깨에 짊어진 두 사람을 내려놓았다.
“욱, 우읍!”
지면에 내려놓자마자 안색이 파리해진 정연화가 땅을 짚으며 헛구역질을 해댔다.
“저… 괜찮아요, 소저?”
“시끄러워요! 더러운 침입자 주제에 내 몸에 손대지— 우읍!”
“…….”
정연화와 당려옥을 일견하며 이벽은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탓.
그리고 다음 순간, 당연하다는 듯 맞은편에 정룡이 내려앉았다. 그만큼의 거리를 날아오고도 노인의 행색은 태연하기만 했다.
“클클클! 도망치는 건 그만뒀나? 쫓는 것도 한참 재미가 들리던 찰나인데 말야. 클클클!”
어쨌거나.
이벽은 판단했다.
도시를 벗어났으며, 고로 이 이상 공중전에 얽매일 이유도, 주변에 미치는 여파를 크게 걱정할 이유도 없다.
따라서.
이 이상 심력이 소모되기 전에… 여력을 모아 승부를 내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철컥, 이벽은 검을 잡았다.
“클클, 꼭 그래야겠나? 내 아까도 말했네만 자네를 상처입히는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내게도 손해인데 말일세!”
“…본인이나 걱정하시오.”
“이거 어쩔 수 없구만. 클클!”
이내.
이벽과 정룡 사이에 재차 긴장이 감돌았다. 구름이 일어나고, 나뭇잎이 흩날리며 구름을 흐트러뜨렸다.
“…저기, 잠깐만요.”
허나 그때였다.
“그만하세요, 소협.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아요. 제가 그냥 잡혀가면 되는 일이잖아요?”
불현듯 당려옥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벽이 채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 그녀가 웃는 낯으로 정룡을 향했다.
“그렇죠? 정룡 도인.”
“…클클.”
정룡이 낮게 웃었다.
“노부를 알아보는가?”
“그럼요. 그 정도의 신위를 지니신 분이 천하에 몇 분이나 있겠어요? 고작해야 ‘열 명’ 정도겠죠.”
“거 말 되는구만 그래. 클클클!”
“헌데… 저를 죽이실 건가요?”
“그럴 리가! 천하의 독왕을 낚아 올릴 둘도 없는 미끼인데 설마 그러겠나? 당분간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게 해줄 터이니 걱정은 말게나!”
“…그렇다네요.”
훗, 가벼운 웃음과 함께 당려옥이 이벽을 돌아보았다.
“…….”
이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직,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놔버릴 단계는 아니다. 뭐라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불현듯 당려옥이 한쪽 눈을 깜빡였다.
“……?”
“뭐, 어차피… 저로선 어느 쪽에 붙어있으나 ‘인질’ 신세인 것은 별 다를 바 없는데… 그렇잖아요?”
다시, 당려옥이 짐짓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허나 이벽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설령 무언가 심산이 있다고 해도.
대체 천하의 천하십대고수를 상대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허나 그때였다.
문득, 이벽은 당려옥이 신호를 주지 않았더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미묘한 무언가를 느꼈다.
‘…향.’
그것은.
꽃향기를 닮은 달큰한 향이었다.
물론, 미미한 냄새에 불과했으며 본래 숲속에서 나는 향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수준이었다.
허나.
맡아본 기억이 있는 냄새였다.
스스스.
그 순간, 어딘가에서 수풀이 잘게 떨었다. 이벽은 문득 섬찟함을 느꼈다. 어쩌면.
“…알겠소.”
이내 이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컥.
“잘 결심했네. 클클!”
서천무존 정룡이 검을 거두었다.
“뭐, 너무 두려워하진 말게! 독왕과는 별개로 소저에게 ‘죄’가 없다는 게 확실하다면야 죽이지는 않을 테니 말일세!”
“…….”
당려옥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이벽을 바라보다가 조금 시선을 돌려 정연화에게로 향했다.
“저기, 아까는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금광선봉(金光禪鳳) 정연화 소저.”
“……!”
“아미의 일은 미안해요. 정파무림이 개판이 된 지금에 와서야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한때 같은 오룡삼봉으로 엮이기도 한 사이인데 이런 식으로 만나서 아쉽게 됐네요.”
훗, 당려옥이 작게 웃었다.
큭, 정연화가 신음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복잡한 기분이 스치는 모양이었다.
“…….”
이벽은 나서지 않았다.
당려옥의 언행은 천연덕스러웠다. 허나 그녀에게는 달리 ‘꿍꿍이’가 있으며.
그녀가 풍기는 향을 통해.
지금 이곳 어딘가에 그녀를 위한 ‘조력자’가 당도했음을 이벽은 어렴풋이 눈치채었다.
고로 이벽으로선 행여나 정룡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무런 티를 내지 않는 것이 가능한 최선의 도움이었다.
저벅.
이내 당려옥이 돌아섰다.
정룡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비틀.
“우욱!”
문득 발을 헛디디며 구역질을 했다. 넘어지려던 몸이 가까스로 균형을 되찾았다.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정연화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이벽의 어깨에 업혀 한참을 짐짝처럼 실려 온 처지였다.
고로 정룡은 의심하지 않았다.
애초에 의심을 품기에는, 당려옥이 감히 자신을 상대로 무언가 건방진 시도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생각은 타당했다.
툭, 데구르르.
허나 다음 순간.
당려옥의 치맛자락 아래에서 무언가 둔탁한 것이 굴러떨어졌다.
타앙.
그리고 당려옥이 그 물건을 냉큼 걷어찼다. 이내 주먹만 한 쇠구슬이 정룡을 향해 쏘아졌다.
‘…만천환.’
이벽은 기억을 떠올렸다.
그것은 당가의 비전암기로, 내부에 아흔아홉 개의 독침을 품고 있는 귀물이었으며 이벽 또한 과거 당려옥과의 싸움에서 겪어본 바가 있었다.
허나 과거의 이벽은.
팔절구궁필법의 만월 초식을 통해 예의 암기들을 모두 제압했고 비룡대 일행들을 지키는 것에 성공했었다.
“클클클, 웬 장난감인가 대체?”
하물며.
천하십대고수에게 그러한 암기 따위가 티끌만큼의 위협이라도 될 리는 없었다.
파사사삭.
다음 순간, 만천환이 부서지며 미세한 침들이 사방팔방으로 터져 나왔다.
훅.
허나 정룡이 가볍게 손짓을 하자 그 즉시 구름이 형성되며 그 주변을 둘러쌌다.
그리고.
아흔아홉 개의 암기 중 단 한 개도 구름에 막혀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분명 그래야만 했다. 허나.
“……?!”
푸욱.
다음 순간, 정룡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리고 자신의 왼쪽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세침 하나가 틀어박혀 있었다.
그것은.
만천환에서 쏘아진 암기가 아니었으며, 하물며 당려옥이 던진 것 또한 아니었다.
다만 정룡이 만천환을 향해 구름을 뻗어 제압하는 순간, 숲속 어딘가에서 소리도 없이 날아든 것이다.
그리고.
후욱.
세침 속에서 맹렬한 독기가 치솟았다. 부르르, 독기에 젖어 든 정룡의 어깨가 경련했다.
저벅.
이내 나무 사이로 한 명의 인영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머리와 눈썹, 수염이 새하얗게 세었으나 허리는 꼿꼿했다.
뒷짐을 진 채 일행과 정룡의 사이로 다가서는 느긋한 걸음걸이는 마치 신선 같은 풍모였다. 허나.
스스스.
노인의 걸음걸음에 땅 위에 돋아난 풀들이 누렇게 시들었다.
노인의 존재는.
역시 이벽의 예상대로였다.
“서천무존. 오랜만이구려.”
독왕 당평세가 말했다.
“…클클클클! 이게 누구야? 독왕 아니신가? 가까이 왔으면 기척도 좀 내고 그래야지, 사람이 짓궂어!”
어깨를 부여잡은 정룡이 웃었다.
“어디, 만리타향으로 날아와서 다짜고짜 남의 손녀딸이나 괴롭히는 누구만 하겠소?”
“…클클! 손녀딸을 미끼로 써먹고는 잘도 그런 소릴 하는구만! 좌우간 이거 한 방 먹었군 그래!”
“…….”
당평세의 시선이 정룡을 떠났다.
당려옥을 일견한 뒤, 이벽을 향했다. 노인의 눈이 잠시 흔들렸으나, 이내 입가에 퍽 온화한 웃음이 지어졌다.
“자네도… 오랜만이군 그래.”
“…당 노야.”
꾸벅, 이벽은 포권했다.
* * *
틱.
정룡이 손가락으로 왼쪽 어깨에 박힌 침을 튕겨냈다. 그리고 어깨를 한 바퀴 움직여보았다.
우드득.
“…….”
정룡의 미간이 흔들렸다. 움직임에는 여전히 다소의 부자연스러움이 남아있었다.
침을 빼낸다고 한들.
스며든 독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물론, 일반적인 독에 불과했다면 절대고수의 기혈을 뚫고서 신체에 그만큼의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을 터였다.
그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그 독 또한 절대고수의 무학이 응축된 정수이자 등천의 영역에 해당하는 힘이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독왕이야. 말도 못 할 만큼 지독한 건 여전하구만. 클클클!”
정룡이 웃었다.
등천의 경지에 이른 절대고수는 주변에 산재한 기운을 자신의 무학으로써 다스린다.
그리고.
독왕의 경우에는 ‘독’이었다.
이벽은 문득 호흡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독왕을 중심으로, 주변의 대기가 스스로 독성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냄새도, 색채도, 형태도 없다.
허나 그 안에는 감히 절대고수의 목숨조차 위협할 수 있는 극한의 독기가 서려 있었다.
‘…무형지독(無形之毒).’
그것은 허공답보와 마찬가지로 무림사에서 하나의 상징처럼 전해지는 전설적인 독공의 경지였다.
또한 그 기운은.
오로지 정룡만을 향해 있었다.
고로 정룡의 경우에는 그저 ‘호흡이 답답한 정도’가 아닐 터였다. 허나 그럼에도 정룡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음 순간.
투두둑.
만천환을 감쌌던 구름이 흩어지며 세침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정룡을 보호하듯 구름이 다시 그의 주변을 감쌌다.
“…클클, 이제야 숨이 좀 쉬어지는구만!”
뿌드득, 뿌득.
정룡이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근데… 왜들 그렇게 쳐다보나? 이거 꼭 내가 악적이 된 기분이구먼 그래.”
“…이와 같은 경우에는 꼭 틀린 말도 아니지 않소? 아이들을 상대로 이게 무슨 치졸한 짓이오?”
독왕이 말했다. 목소리는 온화했으나 숨길 수 없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클클클, 아이라. 자네 등 뒤에 있는 저 대붕을 과연 ‘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군.”
우우웅.
그때, 정룡을 감싼 구름 안에서 다시 용의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고 독왕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었다.
스스슥.
허나 독왕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그 순간, 땅에 떨어졌던 만천환의 침들이 땅에서 허공으로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흔아홉 개의 침들이.
무형지독을 품은 채 일제히 정룡을 겨누었다. 구름과 맹독, 두 개의 영역 사이로 첨예한 긴장감이 흘렀다.
“…….”
이벽은 침묵했다.
독왕의 등장은 갑작스러웠고, 덕분에 한숨을 덜 수는 있었으나 입장은 채 정리되지 않았다.
독왕 당평세는 당려옥의 조력자일 뿐, 그녀를 인질로서 붙잡고 있는 자신의 조력자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작금의 상황에 대해 끼어들어야 할지의 여부를 섣불리 결정할 수 없었다.
‘우선은… 지켜보는 게 낫겠군.’
그리고.
구름과 독의 경계 속에서 공기는 말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벽은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소저, 물러서시오.”
“……!”
이벽은 당려옥의 어깨를 붙들었다. 흠칫, 당려옥이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네, 소협.”
간접적으로나마 두 절대자의 충돌을 코앞에서 감내한 당려옥의 안색은 어느덧 파리해져 있었다.
이벽은 당려옥을 자신의 등 뒤로 물렸다.
그리고 기운을 일으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한편, 정연화와 당려옥에게 향하는 대기의 영향을 차단했다.
“그래. 어쩌면… 독왕 자네는 선을 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
문득 정룡이 말했다.
“허나 독왕, 노부가 곤륜을 떠나 이 중원 땅에 발을 들였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는 않겠지?”
“…….”
“또한 자네는 모를 리가 없네. 지금, 의혈맹의 내부에서 무슨 개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일세.”
흘끗, 정룡의 시선이 이벽을 스쳤다. 그것은 당평세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이벽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조금 전, 접전 속에서.
정룡은 ‘마교’를 입에 담았다.
“…대관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통 알 수가 없군.”
허나 독왕이 답했다.
“그만두시오, 무존. 세 치 혀로 장난을 치기에는 서로 지나온 세월이나 짊어진 무게가 그리 가볍지만은 않지 않소?”
“클클클! 미안하네만 난 무게 따윈 일평생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서 말일세!”
“그렇담 나도 한 말씀 드리지. 무존, 체통 정도는 지켜주시오. 그대가 아는 것 또한 전부는 아닐 테니 말이오.”
“클클클!”
정룡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공기를 짓눌렀다.
파직, 파지직.
기나긴 세월을 지나.
심안을 얻고 주변을 둘러싼 공간과 하나가 된 두 절대자의 무리가 서로를 부정하듯 균열음을 토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