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8)
28화. 살(殺)
히히힝!
마차 바깥으로 나선 이벽의 눈에 고 노야가 동요하는 말들을 다스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차가 나아가던 방향으로 거대한 통나무가 쓰러진 채 길을 가로막고 있다.
슈슈슉.
그때 상황을 더 생각할 틈도 없이 마차를 향해 몇 개의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이벽은 검을 잡았다.
찰나의 순간 마부석에서 뛰어내리는 고 노야와 시선이 스쳤고, 두 사람은 마차의 양쪽을 각자 지키고 섰다.
챙, 챙챙!
화살들을 모두 튕겨냈다. 말도, 마차에도 단 한 발조차 맞지 않았다.
“…….”
이벽은 검을 회수한 뒤 주변을 둘러싼 숲속을 바라보았다. 사이사이로 인기척이 느껴진다.
부스럭.
“으어어, 어어어.”
“크하, 크하아악……!”
이내 인영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마다 창칼을 든 채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다.
“흥, 잘도 기어 나오는군.”
고 노야가 말했다.
이벽은 인영들을 살펴보았다.
각양각색의 허름한 복장에 느껴지는 기세는 턱없이 미약하다. 산적, 그것도 오합지졸 그 자체.
하지만… 이벽은 위화감을 느꼈다. 어딘가가 이상하다. 하나같이 넋이 나간 얼굴들이다.
무어라 말을 하거나 금전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충혈된 눈빛으로 살심을 드러낼 뿐이다.
“길을 방해하지 않았다면 굳이 찾을 생각은 없었다만. 다가오면 죽이겠다.”
그때, 고 노야의 목소리에서 불길함을 느낀 이벽이 얼른 자리를 박찼다.
퍼억.
정면의 일인을 밀쳤다.
상대는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퍼억, 퍽, 퍽!
그리고 이벽은 산적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검집째로 사방을 향해 청강검식을 펼쳤다.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무기가 닿으면 무기가 부서지고 몸이 닿으면 그대로 나가떨어진다.
“크으, 으어어어.”
타앗!
단숨에 정면의 산적들을 모조리 쓰러뜨린 뒤 이벽은 마차의 천장을 밟고 반대쪽으로 타 넘었다.
고 노야의 앞을 가로막았다.
“뭘 하는 거냐?”
“무공조차 제대로 익히지 않은 이들이오. 불필요하게 생명을 해칠 필요는 없소.”
“…….”
스릉.
주름진 눈으로 이벽의 등을 바라보던 고 노야는 이내 도를 집어넣었다.
“내가 끼어드는 걸 원치 않는다면 네가 알아서 해봐라.”
스윽.
그리고 고 노야가 마부석으로 돌아서는 사이 이벽은 또다시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퍼억, 퍽!
검집을 휘두르는 족족 몸뚱이들이 거칠게 흔들렸다. 불과 몇 호흡만에 서 있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휙, 타악.
이벽은 마차 위로 올라섰다.
양측의 적들을 내려다보았다.
“크어어어! 죽인다!”
“으아, 크아아아악!”
쓰러진 적들이 하나둘 괴성을 내지르며 다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이벽은 검을 검집에서 뽑지조차 않았다.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다면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았을 터이다.
몇몇이 이벽을 향해 활을 겨눈다. 이벽 혼자서 양쪽을 동시에 막아내기는 쉽지 않다.
후욱.
이벽은 기운을 내뿜었다.
“경고하겠소. 지금 물러간다면 그대로 보내주겠소. 그렇지 않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오.”
“으, 아으으……!”
그제야 움직임이 멎었다.
짐승 같은 신음을 흘리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말을 알아들었다기보다는 본능적인 행동에 가까워 보였다.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이들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최선책은 이대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일 테다.
이벽은 정면을 가로막은 통나무를 보았다. 저것을 치워서 길을 뚫어야 한다.
이벽이 검을 쓰려던 그때였다.
푸왁.
뒤쪽에서 섬찟한 소리가 스쳤다.
이벽이 뒤를 돌아 그곳에 나타난 거구의 대머리 사내를 확인했다.
사내의 한 손에는 거대한 도끼가 들려있었다. 뚝, 뚝, 날을 타고 피가 흐른다.
“…….”
그의 발아래로 두 명의 산적이 쓰러져 있다. 아니, 목을 잃어버린 육신은 이미 인간이라 할 수 없다.
머리 두 개가 땅을 굴렀다. 몸뚱아리는 움찔움찔 경련하며 피를 쏟아내었다.
“한심하군. 한심해.”
툭, 머리 하나를 걷어찼다.
대머리 사내는 다른 한 손에 든 술병을 들이켰다. 흐릿하게 풀린 눈으로 산적들을 둘러보았다.
“설마 애송이에 늙은이 하나 못 잡아서 겁 먹고 등을 보이다니. 참 쓸모없는 녀석들이구만.”
“끄으으으으…….”
“으, 으아, 아아아.”
사내는 이들의 우두머리인 듯했다. 그러나 그 눈빛은 부하가 아닌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에 가깝다.
끄윽, 사내가 트림을 했다.
시선이 마차 쪽을 향했다.
“좋아 좋아, 흐흐, 이 지경인데도 꽁꽁 숨어있는 걸 보니 안에는 계집이 있나 보군. 가급적 어린 년이면 좋겠는데.”
사내가 다시 부하들을 향했다.
“가져와.”
벌컥벌컥, 그리고 사내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통, 빈 술통이 땅에 내팽개쳐졌다.
“으, 으어어어어!”
“으아아아아!”
그것이 신호였다.
산적들이 다시 마차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비척거리는 몸으로 땅을 박찬다.
그것은 마치 공포와 더 큰 공포 사이에서 저울질을 끝낸 짐승 떼의 모습과 같았다.
“큭.”
이벽의 시선이 흔들렸다.
고 노야는 움직이지 않는다. 언미희는 마차 안에서 지소약을 보호하고 있고, 그래야 한다.
타앗!
양측에서 동시에 밀려드는 적들.
마차에서 뛰어내린 이벽이 오른편의 적들에게 쇄도했다. 시간이 많지 않다.
후우욱!
검집에 내력을 담아 휘둘렀다.
일격에 산적들의 하체를 휩쓴다.
빠각, 빠각!
“으아악!”
“끄오오오!!”
산적들이 고꾸라졌다. 심신이 정상이건 아니건, 부러진 다리는 몸을 지탱할 수 없다.
타앗!
그리고 이벽의 몸이 다시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마차 위를 지나 허공을 한 바퀴 회전했다.
탓, 마차의 반대편에 착지했다.
아슬아슬하게 마차에 닿기 직전인 적들을 향해 다시 검집을 휘둘렀다.
빠각, 빠각!
마찬가지로 하체를 무너뜨린다. 상대의 안위까지 신경을 써 줄 여력은 없다.
후우웅!
“애송이, 성가시군.”
그때 묵직한 바람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피 묻은 도끼가 이벽을 향해 휘둘러졌다.
그 안에는 명백한 내력의 기척이 감돌고 있다. 이벽이 마침내 검을 뽑으려던 찰나였다.
덥석.
산적 하나가 이벽과 우두머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의가 아니다. 우두머리가 손으로 붙잡아 끌어당긴 것이다.
고기방패.
이벽이 멈칫했다. 그리고.
촤아악!
이벽의 눈앞에서 산적의 허리가 쪼개어졌다.
사내의 도끼가 휘둘러지던 기세 그대로 부하를 갈라버린 것.
피와 살점, 내장들이 이벽에게로 와르르 쏟아졌고 그 사이로 기세를 잃지 않은 도끼날이 파고들었다.
채앵!
이벽은 검을 뽑지 못했다.
더운 피를 덮어쓴 순간 마음이 흔들렸고 정신을 차렸을 때 도끼는 이미 코앞까지 당도해있었다.
이벽은 검집을 들어 가까스로 막아냈다. 내력이 끊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챙! 챙챙!
기세를 몰아 도끼가 마구잡이로 휘둘러졌다. 이벽에게 검을 뽑을 틈을 주지 않는다.
진득한 피비린내 속에서 이벽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벽은 연신 뒷걸음질 쳤다.
마음과 함께 내력이 흔들렸다.
이벽은 정신을 가다듬으려 했다.
“크크, 살인이 두렵더냐? 검은 그럴듯하다만 그래봤자 애송이는 애송이로군.”
우두머리는 이미 이벽의 마음을 읽은 듯했다. 또 다른 부하 한 명이 그의 손에 붙들렸다.
이벽의 공격 경로가 가로막혔다.
채앵!
“크윽.”
이벽은 다시 밀려났다.
제대로 된 대비를 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막아선 어깨 위로 무리가 축적된다.
촤아악.
이벽이 빈틈을 보이자 또다시 우두머리는 부하의 몸을 찢어발기며 도끼를 휘둘렀다. 이벽의 온몸에 피와 내장이 튀었다.
채앵! 챙!
도끼를 가까스로 막아내었다.
이후 비슷한 양상이 반복되었다.
이벽이 검을 뽑아 공세를 펼치려고 할 때마다 우두머리는 부하 하나를 집어 방패로 사용했다.
그렇게 빈틈을 만들어낸 뒤 우두머리의 도끼는 부하의 몸을 짓이기며 이벽에게로 파고들었다.
몇 번이고 같은 수에 계속해서 당했다. 그러나 이벽은 여전히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한 명 한 명, 살아있는 목숨이 장작처럼 소모되어간다. 이벽에 의해 다리가 부러진 산적들은 도망치지도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사람들의 사지와 머리가 난자되어 흩뿌려졌다.
허억, 이벽은 숨이 가빠졌다.
이벽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마부석의 고 노야와 눈이 부딪혔다. 그러나 시선은 냉엄했다.
푸욱.
눈먼 검이 이벽을 찔렀다.
한눈을 판 사이 쓰러진 산적 하나가 검을 뻗어 기어코 이벽의 옆구리에 상처를 낸 것이다.
슈아악!
“크크, 잘했다, 쓰레기.”
그리고 다시 도끼가 날아왔다.
막아야 한다. 그러나 상처로 인해 반응이 아주 조금 늦어버렸다. 목숨을 가르는 찰나였다.
순간 몸이 굳었다.
평생을 갈고닦은 검을 검집에서 뽑아보지도 못한 채, 무자비한 도끼가 이벽의 몸을 쪼개놓으려 한다.
—갔다 와 벽아. 몸조심하고.
—알겠지, 이벽? 첫 번째도 보신, 두 번째도 보신. 죽어라고 몸 사려라.
죽음을 떠올린 순간, 몇 개의 얼굴들이 스쳤다. 죽을 수 없다. 죽지 않기로 했다.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니다.
우우웅!
뽑아 들지 못한 이벽의 검집 위로 푸르스름한 빛이 어렸다. 이벽이 검을 휘둘렀고 잔상이 선을 만들었다.
스윽.
“어? 뭐야?”
우두머리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그의 도끼와 얼굴, 상체 위에 빛의 실선이 아로새겨진 이후였다.
쩌억!
서서히 틈이 벌어졌다.
* * *
촤아아!
이벽은 물동이를 몸에 끼얹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온몸을 씻어내렸다. 피와 살점이 흘러내리며 계곡물을 타고 떠내려간다.
“…….”
이벽은 자신을 중심으로 붉게 퍼져나가는 수면을 바라보았다.
상처라고 해봐야 허벅지의 자잘한 검상이 전부였다. 즉, 이 모든 피는 타인의 피였다.
사람을 벤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무림이다.
무슨 말을 덧붙인들 검은 결국 사람을 베는 흉기이며 그 앞에서 목숨의 무게는 종잇장 같다.
촤아아!
이벽은 또 한 번 물을 끼얹었다.
너무 많은 목숨이 눈앞에서 죽어버렸지만,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다.
생사가 오고 가는 싸움터에서 적의 목숨까지 챙겨야 할 의무는 없다.
다만 몇 번이고 몸에 물을 끼얹어본들 피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 것 같다.
그뿐이다.
부스럭.
그때 수풀 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선을 돌리자 언미희가 침중한 기색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공자.”
“무슨 일이오, 소저?”
“다름이 아니… 흐아악!”
언미희가 다가오다 말고 질겁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수풀 속으로 황급히 주저앉았다.
“…….”
그제야 이벽은 스스로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임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꼴이 말이 아니군.’
이벽은 쓰게 웃었다.
이벽은 물가로 올라와서 천으로 몸을 닦은 후, 새로 꺼낸 여벌의 무복을 입었다.
본래 입고 있던 무복은 못 쓰게 되었다.
“죄, 죄송합니다, 공자!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사, 사내의 벗은 몸은 처음인지라— 아니,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진짜로요!”
“개의치 않소.”
손발을 허우적대는 언미희.
그러나 하는 말과는 달리 언미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감히 이벽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한동안 애매한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수풀을 가르며 다시 마차가 머무는 장소를 향했다.
“…저, 괜찮으십니까?”
문득 언미희가 말을 꺼냈다.
“물론. 상처랄 것도 없지.”
“…….”
언미희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건 미안해할 일이 아니오. 나는 호위무사고 소저와 루주님은 호위대상이니 마차 안에 머무르는 게 당연하지.”
“…처음으로 살인을 했을 때, 저는 며칠 동안 몸살을 앓았습니다. 상대가 죽어 마땅한 악인이었는데도요.”
언미희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이벽은 그녀가 자신을 위로하려는 것임을 깨달았다.
“괜찮소, 나는.”
“…공자는 강하시군요.”
“설령 괜찮지 않다고 해도 딱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지 않소?”
이벽은 자신의 목숨을 우선하기로 결심했다.
살생의 무게를 짊어져야 한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다.
세상에는 아무리 고민한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도 있다.
다만, 같은 상황을 다시 겪는다면 검을 뽑아보지도 못하고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추태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다.
이벽은 답이 없는 고민에 잠겨 들기보다 성장을 택했다. 이윽고 저만치에 마차가 보였다.
시신의 흔적들은 모두 치워졌다.
고 노야의 솜씨였다. 열 구가 넘는 시신의 뒤처리를 마친 노인은 태연하게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
이벽은 전투 중에 눈이 마주쳤던 순간을 떠올렸다. 고 노야는 끝끝내 이벽을 돕지 않았다.
—내가 끼어드는 걸 원치 않는다면 네가 알아서 해봐라.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고 노야의 앞을 막아섰고, 그 결과 이벽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다.
물론 결과는 결과에 불과하다.
원인을 찾자면 헤아릴 수도 없다.
하지만 그 순간 고 노야의 그 냉엄한 눈빛은 말보다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