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14)
322화. 의혈맹주의 서신, 정도맹주의 답장 (2)
혈마를 비롯한 적들과의 혈투가 치러진 지 어느덧 사흘이 지났다. 허나 독왕 당평세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그리고 의혈맹주의 서신에 적힌 ‘친선 비무회’는 고작해야 한 달 후의 일이었으므로, 산동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남은 기일은 결코 여유롭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전투가 끝난 직후 돌연 일행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정검문주 양호명은 이벽의 ‘동맹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는 정도맹주의 의사를 전해왔다.
이에 공손수가 ‘정도맹이 가지고 있는 황보혁의 목을 벨 계책’이 무엇인가를 되묻자, 양호명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건… 나도 모르네.”
“…….”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나같은 속가 무인이 그런 것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 기밀조차 아니지 않은가?”
“…하긴 그러네요.”
“허나 걱정은 말게. 나는 그저 길 안내자이자 심부름꾼일 뿐이니. 그러지 않아도 비룡대주 자네를 섬서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 맹주께서 내게 맡기신 임무일세.”
말인즉슨.
황보세가로 향하기에 앞서, 따로이 얼굴을 맞대고 직접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이 정도맹주의 생각인 듯했다.
“뭐, 그것도 그럴 듯하네요. 설마 공공의 적을 앞둔 이 마당에 함정을 파놓고 우릴 기다리진 않을 테니까요.”
“핫, 그야 이를 말인가?”
“자… 그렇다는데요. 그럼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라버니? 그리고 대주님?”
“…어떻고 자시고 할 것도 없군. 더는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만한 여유는 없으니.”
“그런 것 같네, 하핫.”
일행은 제안을 수락했다.
물론, 정도맹주가 원한 것은 이벽 한 명뿐이었으나 혁대웅을 비롯한 세 사람은 ‘당연히’ 함께 할 생각인 듯했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시간은 더욱 촉박해졌다.
고로 이벽은 쓰러지기 직전의 당평세가 남긴 말들에 대해 ‘되물어볼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시급히 당가를 떠나야만 하게 되었다.
덥썩, 붕붕.
암영각의 서촌장 천소진이 이벽의 두 손을 붙들고서 위아래로 마구 흔들어 재꼈다.
“와! 보고 싶었어! 비룡―… 아니지, 낙검신룡! 아무튼 당가의 뒷수습에 대해선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이 천소진만 믿어! 암!”
“…….”
“근데… 예전 일은 이제 다 잊어버린 거지? 응? 내가 널 도와주려고 천길을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에휴, 삼촌. 그만 좀 해요.”
공손수가 마지못해 끼어들었다.
“어차피 다 지난 일이고… 이제 와서 서촌에 화풀이나 하고 있을 만큼 상황이 한가하지 않잖아요?”
서촌장 천소진은.
과거, 전(前) 북촌장 백룡강과 함께 비룡대가 머무르던 남촌을 습격한 과거가 있으며.
또한 한때나마 패왕가가 아닌 흑천방을 지지하려는 목소리를 냈던 전적이 있었다.
“아하하, 그렇지? 암. 역시 우리 영특한 조카! 차차기 암영각주님! 좌우지간 우리 암영각은 모두 한 핏줄이니까… 사소한 잘못은 서로 감싸주고 이해해주고… 그런 거지?”
“…잘 부탁드리겠소.”
이벽은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천소진 옆에 선 사내는 마찬가지로 암영각 소속의 동촌장인 목일령이었다.
오래전, 목일령은 전(前) 북촌장 백룡강에게서 이벽을 구해준 적이 있었고, 또한 증혈환이란 비전의 단약을 내어줌으로써 이벽의 혈기를 증폭시켜주기도 했다.
“소협은… 내가 그렇게나 우려하던 혈기의 폭주 따윈 더는 문젯거리조차 아닌가 보군 그래.”
“…….”
“그래도… 그 하늘의 무위를 이루는 과정에서 이 목가의 비전이 한 터럭이라도 섞였다고 생각하니 퍽 뿌듯하오.”
“…오 년 전에는 대협께 큰 신세를 졌소. 또한 이렇게 도와주러 와주어 고맙소.”
이벽이 목례했다.
목일령이 어깨를 으쓱했다.
“크핫, 상대가 천하의 마교인데 누가 누굴 도와주고 말고가 어디 있소? 당연히 온 힘을 다해 함께 싸우는 거지.”
사흘이 지났으나, 전투의 여파는 여전히 수습이 채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피아를 떠나 부상을 무인들은 적지 않았으며, 걔 중에는 사경을 헤매는 이들 또한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가능성이 크지는 않으나, 어쩌면 어수선한 틈을 타 ‘다시 한번’ 당가가 적습에 휩싸일 수도 있다.
고로 비룡대와 함께 찾아온 암영각과 해남검파의 무인들은 당가에 남아 수습의 마무리를 돕기로 했다.
“잘 알았지? 케헤헤! 준비 단단히 하고 늦장 부리지 말고 제때제때 오셔들! 그럼… 한 달 후 황보세가에서 보자고!”
한켠에서는 파진성이 해남검파의 무인들을 다독이고 있었다.
퍽 놀랍게도 명령체계에 있어 여타 중견고수들보다도 파진성 쪽이 우위에 있는 듯했다.
“…소협.”
다시 이벽은 시선을 돌렸다.
당려옥이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큰 은혜를 입었느니 이제는 그런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우습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그냥 아무 말도 안 할게요. 호홋!”
당려옥이 머쓱하게 웃었다.
머뭇거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냥… 몸조심하세요.”
“…….”
당려옥과의 첫 만남은 ‘적’이었다.
허나 이내 이벽은 모가장의 지하에서 양민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독단을 씹어 삼켰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는… 말하자면 가능한 목숨을 살리고자 애를 써왔던 자신의 노력이 결코 무의미한 자기만족이 아니었다는 증거였다.
문득 안쓰러움을 넘어.
묘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찾아오겠소.”
“…네?”
“노야께서 내게 당가의 안위를 맡겼으니, 어찌 되었건 아직까지는 내게 소저와 소저의 식솔에 대해 책임이 있소.”
“…아.”
“핫, 소협의 말씀은 고맙소만.”
그때, 당려옥의 등 뒤에서 초췌한 안색의 사내가 나타나 말을 받았다. 당가주 당명오였다.
“본가는… 은원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소. 소협에게는 구명지은을 입었고 또한 황보가에게는 피의 원한을 얻었으니…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갚으러 가야겠지.”
“……!”
“황보세가에서 뵙겠소.”
당명오가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이벽은 답할 말을 찾으려 했다.
“커험, 험!”
허나 그때, 등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마차에 기대어 선 양호명이었다.
“낙검신룡, 슬슬 가야 하네.”
“…잘 알겠소.”
이벽은 다시 당가의 부녀를 향했다.
“싸움에 나서고 나서지 않고는 어디까지나 가주의 판단이니… 내게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겠지. 다만 목숨은 귀한 것이니 숙고하시길 바라겠소.”
“핫, 말씀은 감사히 받겠소.”
“…….”
이벽은 고개를 숙였다. 다시금 당려옥을 일견한 뒤, 이내 마차에 올라탔다.
“그럼 몸조심들 해요~ 진짜 전쟁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알죠, 여러분?”
암영각의 무인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공손수를 끝으로 비룡대의 전원이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마부석에 양호명이 올라탔다.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당가의 문을 나섰다.
혈마와의 싸움으로 인해 생겨난 폐허와 같은 흔적을 빙 돌아 이내 북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 * *
다그닥, 다그닥.
마차 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혁대웅은 곧 운기에 들어갔다.
물론, 혈마와의 일전에서 상처입은 심신을 회복해야 하는 것은 이벽 또한 마찬가지였다.
‘…천마 황보혁.’
이내 이벽 또한 눈을 감고 내기를 다스리는 한편, 생각에 잠겨들었다.
마침내 권왕 황보혁은.
스스로 천마를 자처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자초지종을 떠나 황보세가가 정녕 마교의 후예라면, 그 우두머리인 황보혁이 천마를 자칭하는 것에 대해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만.
그것이 정녕 ‘진정한 의미의 천마’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이벽은 소림을 떠나오기 전, 혜공이 말해주었던 마교와 혈교의 통합에 얽힌 ‘억측’을 되새겼다.
백 년 전.
강해지고자 하는 천마의 육신에.
영생을 추구하는 혈마의 정신이 깃들었다면… 그날 이후로 천마와 혈마는 사실상 ‘동일인물’이 된 것이다.
즉, 혜공의 이야기에 의하면.
당평세, 그리고 혁대웅과 함께 힘을 합쳐 맞서고도 목숨을 끊는 데 실패했던 예의 혈마야말로… 오십 년 전 무림을 피로 물들인 ‘바로 그 천마’여야만 한다.
‘두 명의 혈마에 이어… 이번엔 두 명의 천마인가.’
지끈.
돌아가는 상황은 여전히 영문을 알기 어려웠다. 다만 혈마를 떠올리자 가벼운 두통이 일었다.
이내 이벽은 일전을 되새겼다.
당평세의 심독이 혈마의 머리를 파고든 순간, 이벽에게는 놈의 목을 벨 수 있는 찰나의 기회가 주어졌었다.
허나… 놓치고 말았다.
그 또한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설명할 수 없는 ‘찜찜함’이 뇌리를 스쳤던 것을 기억했다.
“…….”
이벽의 미간이 흔들렸다.
어쩌면 최후의 싸움이 될지도 모를 일전을 앞두고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또한.
돌이켜보면… 이벽이 무림으로 나온 이래 ‘천마’란 호칭을 누군가의 입으로 듣게 된 것은 혜공이 처음이 아니었다.
선우세가의 가주, 선우각은.
그의 부친인 검치 선우명이 말년에 스스로 죽음을 가장한 채 천마의 흔적을 따라 서쪽으로 향했노라 말했다.
그리고.
그런 검치의 진전을 이은 스승 이진천이 홀연히 무림에 나타났고, 자신을 거둔 뒤 청강유엽공의 다음 단계인 낙검진천신공을 전수해주었다.
그렇게.
황보혁에게서 시작된 생각은 천마와 검치라는 연결고리를 지나 스승 이진천에게로 이르렀다.
‘…아니, 잠깐.’
그리고 그때였다.
돌연, 이벽은 독왕의 심독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던 ‘화영지정’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린 기녀 월향의 기억 속에서, 젊은 날의 이진천은… ‘도가문파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
그것은.
이벽으로선 전혀 알지 못했던 스승의 숨겨진 과거였다.
허나 물론, 기억의 주인인 하오문주 월향은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화정촌을 떠나 다시금 천향루를 찾아온 이벽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전혀 해주지 않았다.
‘어째서?’
물론, 스승과 월향의 과거에 대해서는 개인지사이므로 굳이 캐물으려 하지는 않았다. 허나.
“…….”
무언가… 월향의 언행에 이상한 지점이 있었음을 이벽은 그제서야 눈치챘다.
다시 고민에 잠겼다.
허나 한참이 지나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기분 묘하네요.”
그리고 그즈음 공손수가 말했다.
“갑자기 뭔 소리냐, 쥐방울?”
“그렇잖아요? 창밖은 이렇게나 평화롭고… 꼭 소풍하러 가는 기분인데. 실은 우리, 사실상 마교와 전쟁하러 가는 처지잖아요?”
“…케헤.”
“생각해보면 열받네요. 왜, 예전에는 우리더러 더러운 사파가 정파무림에 발을 들여놨다고 길길이 쫓아오더니… 까보니까 미친 오히려 지들이 마교였잖아?”
“그래서 무섭다 이거냐? 케헤헤!”
“…뭐래, 그런 말은 안 했는데요.”
“케헤헤. 걱정 마라, 쥐방울. 넌 절대로 안 죽는다. 왜냐하면… 이 해남의 별이 그렇게 안 둘 거거든.”
“…하아.”
공손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지켜달라고 한 적 없으니 제발 자기 목숨이나 잘 간수하세요. 쫌.”
“…….”
피식.
이벽은 헛웃음을 흘렸다.
불현듯 공손수를 몸으로 감싸다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면서도 기어코 제 발로 걷겠노라 오기를 부리던 그 옛날의 파진성이 떠올랐다.
“…앗, 죄송해요, 오라버니. 듣고 계셨어요? 운기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 바다 원숭이 때문에―”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이벽은 결론이 나지 않는 월향에 대한 생각을 우선 제쳐두었다. 이내 눈을 뜬 뒤 공손수를 마주했다.
“…공손수.”
“…? 네, 오라버니.”
당평세는.
쓰러지기 직전 이벽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몇 마디의 이야기와 함께 ‘누구든 함부로 믿지 말라’는 충고를 남겼다.
허나.
적어도 이 마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벽이 가장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당금의 무림은… 실은 한 번도 마교를 상대로 이긴 적이 없다고 한다.”
“네? 그게 갑자기 무슨―”
“당 노야… 독왕께서 힘이 다해 의식을 잃기 전 내게 그런 말을 하시더군.”
“…….”
다그닥, 다그닥.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공손수의 표정이 흔들렸다.
“…뭐, 지금의 무림 꼴을 보면 이게 정말로 내가 나고 자란 전후 무림이 맞는가 싶기는 해요. 오 년 전 흑천방의 일도 그렇고요.”
이내 공손수가 답했다.
마교건 혈교건, 선대 무림에 의해 뿌리가 뽑혀 종적을 감췄어야 할 이들이 버젓이 살아남아 여기저기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최소한.
오십 년 전의 전쟁에는 무언가… 표면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꽤 다른 ‘비사’가 숨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또한 노야는… 황보세가가 어떤 식으로든 마교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하더군.”
다시 이벽이 말했다.
말마따나 이벽은 의문스러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평세가, 권왕의 모습에서 마교의 우호법 풍마의 흔적을 읽어내지 못했을 리 없다.
허나 그럼에도.
당가는 구 무림맹을 떠나 의혈맹의 일원이 되는 쪽을 택했다. 물론, 당평세의 뜻이었을 터였다.
“나름대로 고심해봤지만… 도무지 노야가 남긴 말들의 저의를 잘 모르겠더군. 네 생각에는 이게 무슨 뜻인 것 같나?”
“…글쎄요.”
다그닥, 다그닥.
공손수가 팔짱을 꼈다.
“섣불리 속단할 수는 없지만요. 독왕께서 정말로 그런 말을 했다면… 무서운 생각이 드는데요?”
“…설명해주겠나?”
“예컨대 무림은 마교를 쓰러뜨린 적이 없고, 독왕은 의혈맹이 마교의 소굴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선택지가 없었다…고 한다면.”
공손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건 마치… 무림 전체가 이미 오래전 ‘마교에 패배’한 것과 마찬가지라서… 그냥 모든 걸 포기해버린 말투잖아요?”
“……!”
“…케헤.”
다가닥, 다가닥.
다시 말발굽 소리가 커졌다. 서산으로 해가 저물고 차창 밖으로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오라버니. 어찌 되었건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이 달라질 것도 없구요. 어떻게든 정도맹과 얘기를 잘 끝내서 의혈맹을 무너뜨리면 그만이잖아요?”
공손수가 말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요. 당가나 독왕을 그다지 신용은 못 하겠네요.”
“…그렇군.”
“특히… 알면서도 의혈맹에 가담했다면 더더욱 그렇잖아요? 물론 오라버니가 당가와 친분이 있다는 것은 저도 대강 알지만요.”
그것은 지극히 합당한 의견이었다. 고로 이벽은 독왕을 변론할 만한 말을 찾지 못했다.
다그닥, 다그닥.
시시각각 어둠이 무르익었다.
마차는 횃불에 의존한 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은 숲길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