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23)
331화. 일엽유검 (1)
스륵.
이벽은 눈을 떴다.
상체를 일으킨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 저편에서 먼동이 트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내 기억이 또렷해졌다.
진법의 경계선에 해당하는 모옥의 울타리를 넘나들며 유의 묘리를 고찰하고 검을 휘두른 것도 마침내 사흘째가 되었다.
“…….”
그리고 다행히도.
이벽은 계획대로 나름의 성취를 얻었다. 지난밤 완성한 기예의 감각이 손끝에 생생히 남아있는 듯했다.
물론, 송영영이 보았다면 여전히 ‘조잡하기 짝이 없는 불순물’이라 말할 터였다. 허나.
이벽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울타리 바깥으로는 여전히 안개가 자욱했으며, 사흘 내내 단 한 번도 거둬진 적이 없었다.
최소한.
도가 무공 외 모든 내력의 운용을 억제하는 일대의 진법은… 이벽의 성취가 ‘그릇되지 않았음’을 인정해주었다.
우우웅.
그때 이벽은 진동을 느꼈다.
이내 모옥의 마당 한복판에 정좌한 채 운기에 몰두하고 있는 혁대웅을 발견했다.
우우우웅.
그 등 뒤로는.
패왕의 물레바퀴가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나 동시에 이벽은 그 안에서 희미하게나마 친숙한 향을 맡았다.
‘…청강유엽공.’
이벽은 내심 감탄했다.
예상은 했으되 그 이상이었다.
등천의 영역에 이른 절대자는.
세월 속에서 자신이 얻은 고유 영역에 대한 활용법과 이해도를 넓혀가며, 계속해서 끝없는 하늘을 향하게 된다.
그리고 혁대웅에게 있어.
청강유엽공의 구결은 단순히 자신의 힘에 도가의 껍데기를 입혀놓는 수준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패왕의 물레바퀴를 다루는 데에 있어 무언가 ‘새로운 관점’을 얻는 계기가 된 듯했다.
“벽아. 잘 잤어?”
그때 혁대웅이 말했다.
“방해가 되었나?”
“아냐, 슬슬 일어나려고 했어.”
혁대웅이 눈을 떴다. 그리고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이벽을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충분한 성취가 있었던 것 같군. 축하한다고 해야 하나?”
“아하하, 다 네 덕분이지 뭐. 솔직히 며칠 정도는 더 느긋하게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말야.”
하아, 혁대웅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 이상한 영감님 상대로 네가 너무 두들겨 맞는다 싶으면 한 번 정도는 몸 바쳐서 대신 맞아줄게.”
“…거 든든하군.”
훗, 사형제는 마주 웃었다.
저벅.
“좋은 아침이에요~”
“케헤헤, 잠들은 잘 잤냐, 이 대주들아? 마침내 이 지긋지긋한 산을 내려가는 날이 밝았다!”
그때, 대문 바깥의 안개 너머로 두 개의 인영이 다가서며 익숙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내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 마당으로 들어선 공손수와 파진성을 향했다.
“두 사람, 준비는 됐나?”
“뭐, 할 수 있는 만큼은 했어요~ 그래봤자 이 안에선 평소에 비해 절반의 힘도 못 낼 거 같지만요.”
“그럭저럭 너희들 싸움에 숟가락 정도는 얹을 수 있을 것 같다. 케헤헤!”
두 사람 또한 사흘간의 노력을 증명하듯, 차림새는 엉망이었으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이벽의 추궁과혈에 의해.
각자의 심신에 맞추어진 청강유엽공은, 두 사람으로 하여금 안개 속에서도 최소한의 내력을 유지시켜 주는 힘이 되었다.
꼬르륵.
“우선 밥이나 먹죠?”
“…그러지.”
이내 공손수와 파진성은 문가에 차려져 있는 밥상을 마당으로 들여놓았다.
달그락.
네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지난 사흘간, 아침저녁으로 울타리의 문 앞에는 당연하다는 듯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일행은 식사 준비와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각자의 수행에 몰두할 수 있었다.
허나 밥을 가져다주는 이는 퍽 신출귀몰 했고, 소리도 없이 나타나 문 앞에 밥상을 내려놓은 뒤 안개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아마도… 화산의 제자겠죠?”
공손수가 말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잘 먹었다고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부끄럼이 많나봐요~”
“케헤헤, 그야 우리한테 붙들리면 인질이 될 수도 있으니 그런 거 아니겠냐?”
“…….”
이벽의 머릿속으로.
몇 가지 억측들이 지나갔다.
허나 그것은 말 그대로 억측에 불과했으며, 만에 하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이내 일행은 화제를 바꾸었다.
봉우리를 내려가기 위해선 물론 검선을 넘어서야 하며, 어쩌면 최악의 경우 그 외에도 누군가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고로 각자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허나 어쨌건, 이제는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다.
달그락.
이내 식사를 마쳤다.
“그럼 일어나도록 하지.”
그리고 일행은 모옥을 나섰다.
울타리를 나서자 안개와 함께 호흡을 방해하는 듯한 압력이 일행을 짓눌렀다.
허나 물론.
이제는 익숙해진 압력이었다.
타아앗.
일행은 경신공을 펼쳤다. 내력을 끌어올렸음에도 네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힘겨운 기색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타앙.
이내, 사흘 전 전투를 치렀던 예의 공터가 안개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뒷짐을 진 노인이 서 있었다.
“벌써 가려고 그러나? 흘흘! 모처럼 객들이 찾아와 집까지 내어주었거늘, 이거 섭섭하구먼.”
“…….”
물론, 노인은 매화검선 소청이었다. 이벽은 일행들보다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꾸벅, 목례했다.
“반갑소, 노인장. 며칠 신세를 졌소. 물론 딱히 원한 건 아니었소만… 결과적으로 무의미하진 않았던 것 같소.”
사흘 전, 노인은.
이벽으로 하여금 이 봉우리를 떠나고 싶다면 ‘그럴만한 힘’을 새로 만들어보라 하였다.
말마따나 어쩌면 황보세가에서 벌어질 싸움에 앞서 스스로를 정돈할 좋은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허나 물론.
벗어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흘흘, 그렇구만.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를 얻긴 얻은 게로군. 그래, 자신은 있나?”
“솔직히 잘 모르겠소. 결국 부딪혀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하기야 그렇지. 우문이었구먼!”
노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다시 이벽이 한 발 나아갔다.
“헌데… 젊은이 자네, 혼자서 할 셈인가? 벗들과 함께 덤벼도 상관은 없네만.”
“에이, 천하의 검선 선배님을 상대로 저희 사파 따위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공연히 방해가 되느니 저희는 그냥 구경만 할게요~”
공손수가 답했다.
“흘흘! 지난 사흘간 자네들이 나름대로 도를 익히려 한 것은 다 알고 있네만.”
그리고 노인이 뒷짐을 풀었다. 그 오른손에는 당연하다는 듯 나뭇가지 하나가 들려있었다.
“뭐, 기특하다면 기특한 일이니… 굳이 먼저 손을 쓰지는 않겠네. 알아서들 하게나.”
“네에, 선배님~”
철컥.
이벽 또한 검을 잡았다.
“그럼 가겠소, 노인장.”
“오래 끌 것 없지. 들어오게나.”
타앙.
이벽은 땅을 박찼다.
동시에 노인의 나뭇가지 위로 자줏빛 기운이 서리는 것을 보았다. 마치 손안에서 봄을 불러오듯, 꽃이 움트기 시작했다.
화산의 매화는 아름답다.
허나 그 날카로움은 뭇 도가의 검공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며, 현란함에 눈을 빼앗겼다간 즉시 목숨을 잃게 된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화영변검(花影變劍).
고로 이벽은.
마찬가지로 꽃을 피웠다.
후욱.
“…또 그 검공인가? 뭐, 상관은 없네만.”
이내 사흘 전과 같이 꽃과 꽃이 상잔하며 코를 찌르는 검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물론, 꽃 그림자로 꽃을 이길 수 없음은 이벽 또한 알고 있었다. 다만 현란함의 기세를 꺾기 위해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내.
상잔 끝에 예상대로 화영변검의 꽃잎은 모두 사그라들었으며, 노인의 살아남은 꽃들이 이벽을 향해 쏘아졌다.
후욱.
그리고 그 순간.
이벽의 검이 원을 그었다.
* * *
무당의 태극검.
청강유엽검식, 유검.
지난 사흘간 이벽은 두 번에 걸친 송영영과의 비무를 수없이 복기했고, 두 무공의 차이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명확한 결론을 얻어내었다.
송영영의 태극검은 말 그대로 태극을 그리지만, 자신의 유검은 그저 ‘원’을 그릴 뿐이다.
그리고 태극과 원의 차이는.
‘더 작은 것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였다.
태극은 음양으로 나누어지며.
음양은 공존하되 결코 멈춰서는 일없이 서로를 밀어내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성질을 통해.
태극은 ‘스스로 움직이는’ 최소한의 동력을 얻게 되며, 그 동력은 다시 무수한 태극의 맞물림 속에서 적의 힘마저 내 뜻대로 다루는 공능을 만들어낸다.
허나 이벽의 원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고로.
제아무리 원 안에 원을 겹쳐 태극을 모방하려고 해도, 그 원을 굴리고자 하는 힘이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기에.
유검은 태극을 이길 수 없고, 접전이 반복될 때마다 오로지 이벽에게만 일방적인 손해가 누적되었던 것이다.
“…….”
허나 물론.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지니지 못한 태극의 묘리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
다만 ‘이미 지니고 있는 것’으로 어떻게든 그 빈 자리를 메꾸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후욱.
이벽의 검이 원을 그었다.
사라락.
그 궤적을 따라 나뭇잎이 막을 형성했고, 검선의 꽃잎들이 이내 원 안으로 파고들었다.
“……!”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원이 요동치며 ‘타원의 형태’로 기이하게 휘어졌고, 검선의 눈이 흔들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다음 순간, 타원이 기울어졌다.
일대의 땅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후욱.
검선의 신형이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이벽으로부터 일 장 이상의 거리를 벌렸다.
비틀.
허나 그러고도 충격을 채 다스리지 못한 검선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뚜욱, 투둑.
또한 검선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다시 부러졌다.
후두둑.
이내 더는 나뭇가지라 부를 수도 없는 작은 토막들이 되어 땅으로 떨어졌다.
“…흘흘흘, 흘흘!”
이내 노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검선의 꽃잎을 삼킨 이벽의 원이 매화를 삼킨 것도 모자라 그 힘을 그대로 되받아친 것이다.
허나 그것은.
시작은 분명 태극의 형태를 꼭 닮았으되 그 끝은 결코 노인이 알고 있는 태극의 묘리가 아니었다.
원이 휘어져서.
타원의 형태가 된다.
“그게… 뭔가 대체? 흘흘흘!”
“…보신 그대로요.”
태극의 묘리가 없는 이상.
이벽의 유검은 껍데기에 불과하며, 아무리 모방하려 한들 결코 완벽한 조화로움에 다다를 수 없다.
고로 이벽은.
일부러 조화를 ‘무너뜨렸다’.
태극을 모방한 원들의 맞물림 속에 ‘불필요한’ 나뭇잎 한 장을 끼워 넣었고.
그 불필요함은.
나뭇잎 한 장의 무게만큼 원의 균형을 무너뜨림으로써, 휘어짐을 일으켰고 잠깐이나마 굴러가도록 하는 동력을 만들었다.
“일엽유검이라 이름 붙였소.”
“…흘흘!”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일엽유검(一葉柔劍).
이벽은 기예의 이름을 되뇌었다.
무당은 물론 어느 도가문파에도 적을 두지 않은 이벽이 지닌 것은 물론, ‘한 장의 나뭇잎’ 뿐이었다.
“흘흘흘, 참으로 혼자 보기 아깝구먼! 검존이 자네의 그 검을 봤다면 아마도 배를 잡고 땅을 굴렀을 것이네.”
“조악한 것은 알고 있소.”
철컥, 이벽이 검을 겨누었다.
“허나 이 대단한 진법도 나를 막아서지 않는 걸 보니… 나름대로 ‘정도’의 한 갈래라고 인정해주는 모양이오.”
“흘흘흘! 크흘흘, 커헉, 커험!”
노인이 다시 웃음을 흘렸다.
이내 마른기침을 토해내었다.
“커험, 커허험! 좌우간에 잘 보았네! 굳이 말할 것도 없네만, 끼워 맞추기 하나는 실로 천하제일의 재능이로구먼.”
탓, 후욱.
그리고 그 순간.
노인이 다시금 땅을 박찼다. 한달음 뒤로 물러서며 뒤켠에 자라난 나무의 가지를 밟고 올라섰다.
비틀.
한순간 몸의 균형이 흔들렸으나 기둥에 손을 댄 채 가까스로 노인은 자세를 지탱했다.
“허나 미숙하다네. 흘흘흘!”
화아아악.
다음 순간, 노인이 올라탄 나무 전체에 자줏빛 기운이 맴돌았고, 그 모든 가지에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나무 한 그루가.
그대로 노인의 ‘검’이 된 것이다.
“자, 이러면 어쩔 텐가? 응?”
“…….”
이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흘흘, 그러게 승기를 잡았다 싶으면 곧바로 숨도 못 쉬게 몰아붙였어야지, 말을 건다고 그걸 받아주고 있으면 어떡하나? 흘흘흘!”
후욱.
그리고 숨 돌릴 새조차 없이, 산들거리는 바람과 함께 꽃 무더기가 흩날려오기 시작했다.
허나 다행히도.
‘계획’은 아직 어그러지지 않았다. 이벽은 등 뒤에서 일행들의 시선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