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28)
336화. 패왕유엽 (1)
사라락.
이벽은 눈을 감고 침잠했다.
등천의 흐름에 심신을 내맡겼다.
이내 가부좌를 틀고 앉은 몸 주변으로 언제나와 같이 무수한 나뭇잎의 존재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모두.
손발이자 검과 같았다. 허나.
‘…조금 다르다.’
현재, 이벽이 몰두하고 있는 화두는 화정봉을 떠나기 전, 검선이 보여주었던 매화의 기예였다.
검선은 나뭇가지를 쥐었고.
이내 그 위로 매화가 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검선과 나뭇가지, 매화 사이의 경계는 거짓말처럼 희미해졌다.
뿐만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검선은 심지어 살아있는 나무 한 그루에 통째로 꽃을 피우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지금의 이벽이 나뭇잎을 다루듯 단순히 등천의 영역이 자신의 주변을 ‘맴돌게 하는 것’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하나가 된다.’
영역을 다루는 것을 넘어.
온전히 한 몸으로 거듭난다.
또한 검선은 그러한 경지를 이루는 방법 역시 말로 풀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다시, 이벽은 검선이 남긴 충고를 돌이켜보았다.
―‘나뭇잎’과 ‘꽃’은 꼭 같지는 않네만… 본질적으로는 그리 다르지도 않지. 자네들 생각은 어떠한가? 흘흘.
나뭇잎과 꽃.
두 자연물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그것은 물론 ‘나무’에서 비롯되어 가지 위로 자라난다는 것이었다.
고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나무가 되어야만 한다.
사라락.
이후, 그와 같은 결론을 내린 이벽은 침묵 속에서 거듭 심상을 깎아내었다.
기실 마차를 타고 중원을 가로지르는 내내 이벽은 스스로를 한 그루의 ‘나무’로 인식하기 위해 노력했고.
사흘 가량의 참선 끝에.
어느 정도의 성취를 얻어내었다.
스윽, 사라락.
이내 주변을 맴돌던 나뭇잎들이 하나둘 이벽의 살갗 위로 달라붙기 시작했다.
우우웅.
온전한 나무가 된 순간.
이벽은 마치 온몸의 피부와 나뭇잎이 하나로 엮이며 ‘핏줄이 이어지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마침내 등천의 영역이.
신체의 일부로 거듭난 것이다.
“…….”
허나 거기까지였다.
나무가 된다고 한들 ‘그다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벽은 알 수 없었다.
지금의 이벽에게 필요한 것은.
물아일체의 경지나 신체의 확장 따위가 아니라 당장의 싸움에 대비한 일검의 초식이었다.
허나 그 어떤 상승의 기예라 할지라도 청강유엽공의 묘리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초식으로 깎아낼 수 없다.
물론, 제아무리 마음을 졸여본들 깨달음이란 억지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 알고 있었다. 허나.
마차는 나날이 산동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늘 그래왔듯 상황은 이벽에게 많은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라락.
다음 순간, 나뭇잎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집중이 흐트러지며 나무의 심상이 무너진 것이다.
“…후우.”
이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독왕 당평세의 심독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었던 ‘최후의 실마리’를 떠올렸다.
과거의 환영 속에서.
스승 이진천은 혈마를 향해 최후의 일검을 펼쳤고, 동시에 이벽은 그 검을 계승할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직, 쾌, 강, 곡, 변, 유.
청강유엽공을 이루는 여섯 개의 텅 빈 묘리에 각자의 알맹이를 채워넣은 뒤, 다시금 창공비검의 묘리를 통해 일검으로 묶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청강유엽검식의 진정한 완성이자 낙검진천신공의 단 하나뿐인 초식, ‘낙검’의 성취를 뜻한다.
그리고 천하의 혈마조차 단 일검으로 절명 직전까지 몰아붙인 그 검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감히 천하의 어느 누구를 상대한다 해도… 결코 패배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론 스승은.
예의 일검을 펼친 뒤, 스스로의 ‘검은 기운’을 통제하지 못해 마침내 목숨이 다하게 되었다.
허나 이벽은 생각했다.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웠으나.
스승을 쓰러뜨린 예의 검은 기운과 낙검의 초식은 엄연히 ‘별개의 힘’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만 낙검의 초식을 펼침으로써.
지나친 힘을 소모한 스승은 예의 검은 기운을 ‘통제할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
검은 기운의 정체는 무엇이며.
줄곧 그러한 기운을 품고 있던 스승의 정체는 또한 무엇인지, 물론 이벽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없는 것이 많기에.
이벽은 더더욱 힘이 필요했다.
또한 현재까지 여섯 개의 무리 중 총 네 종류의 성취를 얻었으므로, 남은 것은 두 종류에 불과하다.
허나 물론 그렇다고 한들.
성취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기실 지금까지의 과정이 믿기지 않을 만큼 운이 좋았을 뿐, 어쩌면 낙검의 완성에는 까마득한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후우.”
이벽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사락사락.
“……!”
허나 그때였다.
이벽은 돌연 맞은편에서 나뭇잎의 존재감을 느꼈다. 허나 그것은 ‘자신의 나뭇잎’이 아니었다.
번뜩.
그제서야 이벽은 눈을 떴다.
그리고 맞은편 불가 너머로 자신과 같이 가부좌를 튼 채 명상에 잠긴 혁대웅을 발견했다.
“…하아.”
은은한 미소 안쪽에서.
편안한 호흡이 뱉어졌다.
사라락, 사락.
이벽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일찍이 이벽은 화정봉의 진법을 극복할 방안을 찾아 혁대웅과 일행들에게 청강유엽공을 전수했다.
그리고 그 이후.
고작해야 며칠이 지났을 뿐이다.
허나 혁대웅은 마침내 ‘자신의 방식대로’ 청강유엽공의 성취를 하늘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번뜩.
그리고 그 순간.
약속이라도 한듯 혁대웅의 눈이 뜨여졌다. 사형제의 시선이 서로를 마주했다.
“…….”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혁대웅이 배시시 웃었다.
“벽아, 좀 어때?”
이내 혁대웅이 물었다.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물론, 그것이 ‘성취’에 대한 질문임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난 며칠간, 검선이 보여준 매화의 화두에 몰두했던 것은 이벽 혼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허나 이벽은.
스스로 나무가 됨으로써 나뭇잎과 하나가 되는 법을 터득했으되, 끝끝내 그것을 자신의 검과 엮어내지는 못했다.
“그래.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조금 빠른 것 같네. 살다 보니 내가 우리 건방진 사제보다 앞서가는 일도 다 있구나?”
“……!”
훗, 혁대웅이 웃었다.
다음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아, 그러면 나 좀 도와줄래?”
“…무슨 말인가?”
“그게 말야. 뭔가를 깨달은 것 같긴 한데… 좀 막연해서 아직 손에 잡히질 않네. 이럴 때에는 몸으로 부딪쳐보는 것만큼 빠른 게 없잖아?”
혁대웅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얻은 성취 말인데, 나뿐만 아니라 네게도 꽤 도움이 될지도 몰라.”
* * *
“…야밤에 어딜 가나?”
이벽과 혁대웅이 일어나자 나무에 기대고 앉아있던 양호명이 기척을 느끼고 말을 꺼냈다.
“그냥요. 몸 좀 풀려구요.”
혁대웅이 답했다.
“…원, 과격하기 짝이 없군.”
양호명이 혀를 내둘렀다. 비단 이벽과 혁대웅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기실 두 사람이 명상에 치중하는 동안, 멈추지 않고 비무를 거듭해왔던 것은 오히려 공손수와 파진성이었다.
허나 어쩌면 최후의 일전이 될지도 모를 싸움을 며칠 앞두고서 휴식은커녕 틈만 나면 몸을 놀리는 그 모습은 양호명의 눈에는 외려 아둔한 짓으로 비쳤다.
“그게 사파의 방식인지 뭔지는 모르겠네만… 뭐, 내가 참견할 문제는 아니겠지. 그만한 경지에 이른 고수들이니… 알아서들 보중하시게.”
“아하하… 그럼요. 자는 사람도 없으니 대협께서도 이참에 한숨 쉬세요.”
혁대웅이 머쓱하게 웃었다.
이내 이벽과 혁대웅은 자리를 벗어났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머지않아 공터를 발견했다. 허나.
어둠이 깔린 공터 위에는.
이미 선객이 자리하고 있었다.
좌수에 검을 움켜쥔 채, 파진성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서 주변의 기척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 진중한 모습에서는.
적의 위치나 진형을 도외시한 채 무턱대고 기세를 높이던 과거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스스스.
달빛 아래 그림자가 흔들렸다.
타아아앙.
다음 순간.
비수 한 자루가 소리 없이 파진성을 향해 날아들었다. 허나 그때 파진성은 이미 자리를 박차고 뛰어오른 후였다.
퍼어어억.
비수는 땅에 박혀 들었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윽!”
날아오른 파진성의 검이 파도처럼 번뜩였다. 어느새 등 뒤로 다가선 또 한 자루의 비수를 쳐내었다.
비수를 쥔 인영은.
물론, 공손수였다.
후우욱. 탁.
속절없이 밀려난 공손수가 땅 위로 착지했다. 충격이 적지 않은 듯, 한순간 균형이 흔들렸다.
“케헤, 암습도 여러 번 당하면 엄마손처럼 친숙해진다고. 슬슬 새로운 접근방식을 생각해볼 때 되지 않았냐?”
“…쳇, 바다원숭이 주제에.”
공손수가 혀를 찼다.
“…….”
이벽은 또한 감탄했다.
화정봉에서의 일전을 돌이켜보면, 빈틈을 노렸다곤 해도 공손수는 무려 청성제일검 공능자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
그 쾌속함, 그리고 은밀함은.
이미 절정의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파진성은 그런 공손수의 암습마저도 능히 간파해낸 것이다.
이벽은 물론 두 사람의 지난 오 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허나 결코 가벼운 시간이 아니었으리란 것은 알 수 있었다.
“…앗, 오라버니, 대주님?”
“헤헷, 뭐야. 보고 있었냐?”
그제사 인기척을 느낀 두 사람의 시선이 이벽과 혁대웅을 향했다. 이벽은 잠시 고민했다.
“…혹시.”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무공을 펼칠 때 갑자기 스스로를 제외한 주변이 느려진다거나… 하는 느낌을 받은 적 없나?”
“네? 무슨 말이에요?”
“…아니, 신경 쓰지 마라.”
이벽은 즉시 말을 거두었다. 때가 되지 않았다면, 섣부른 참견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아, 그게. 실은 우리도 비무를 좀 할까 하는데요…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된다면 딴 데 가서―”
혁대웅이 서둘러 말을 꺼냈다.
타앙, 타앙.
허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파진성과 공손수가 나란히 땅을 박차며 공터의 외곽으로 물러났다.
“와! 비룡대주 내전이다!”
“케헤헤, 가슴이 웅장해진다.”
“…….”
피식, 혁대웅이 가볍게 웃었다.
이내 자리를 깔고 앉은 두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벽과 혁대웅은 공터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마주했다.
우우웅.
창을 움켜쥔 혁대웅의 등 뒤로.
이윽고 패왕의 물레바퀴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전과 함께 서서히 힘을 응축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알겠다. 내가 먼저 들어가지.”
철컥.
이벽 또한 검을 꺼내 들었다.
사라락.
이내 나뭇잎들이 주변을 메웠다.
“잠깐, 벽아.”
그때 혁대웅이 말했다.
“혹시… 가능하면 다가오지 말고 먼 거리에서 공격 가능하니? 가령 이기어검 같은 거…….”
“왜지?”
“왜는, 깨달음을 붙들기 위해 부딪히는 건데… 괜히 널 다치게 하면 안 되잖아?”
“…….”
혁대웅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벽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허나 이벽은 물론, 자신의 사형에게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적파직검(赤派直劍).
쩌적, 쩌저적.
이벽은 적파직검을 일으켰다.
이내 이벽의 주변으로 나뭇잎들이 겹쳐지며 몇 자루의 붉은 검들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래, 딱 그런 거.”
훗, 혁대웅이 가볍게 웃었다.
훅.
이벽이 검을 뻗었다.
쐐애애액.
그와 동시에, 섬뜩함을 품은 붉은 검들이 일제히 혁대웅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들었다.
허나.
“전륜패왕창, 극척.”
다음 순간, 혁대웅의 창이 뻗어졌다. 응축된 전륜의 힘이 혁대웅의 육신을 타고 창끝으로 쏘아졌다.
우우웅.
창끝이 흐릿하게 빛났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
타앙.
이벽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혁대웅의 창끝이 자신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지 않음을 알았음에도, 무심코 피하고 만 것이다.
파스스스스.
그리고 전륜패왕창의 일격이 뻗고 지나간 자리 위로 땅이 움푹 패여들었고 나무들이 산산조각으로 으깨어졌다.
이벽의 적파직검 또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특유의 파편조차 남기지 못한 채 가루가 되어 모조리 흩어져버린 것이다.
“…….”
이벽은 침음했다.
앞서 남궁세가주 남궁천승의 날개나 독왕의 암기를 상대로도 우위를 점하던 적파직검이었으나.
패왕의 일격 앞에서는.
나약한 갈대에 불과했다.
“…아, 이게 아닌데.”
허나 그만한 공능을 토해내고서도 정작 혁대웅은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벽아, 미안한데 좀… 다채롭게 공격할 수 있어? 그냥 정면으로 파고드는 건 너무 쉽잖아?”
“…다채롭게라.”
“진심으로, 나를 해칠 기세로 공격해봐. 솔직히 너, 내 약점에 대해선 잘 알고 있잖아?”
“…….”
이벽은 잠시 침묵했다.
물론, 내력이 없던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혁대웅과 비무를 나눈 횟수는 셀 수도 없었으므로, 약점이라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혁대웅, 깨달음을 붙들기 위해 싸우는 건데 공연히 널 다치게 하면 안 되지 않나?”
“…어쭈?”
훗, 이벽이 웃었다.
이내 혁대웅 또한 마주 웃었다.
“걱정 마, 사제의 귀여운 공격쯤 몇 대 몸으로 맞아도 침 바르면 다 나으니까.”
“…그렇단 말이군.”
쩌저저적.
다시 적파직검이 일어났다.
“그럼 다시 가겠다.”
“그래, 이 앙증맞은 사제 녀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