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3)
33화. 사패련주
현장에 나타난 사패련의 무사들에 의해 이벽과 언미희는 연행되었다.
두 사람은 저항하지 않았다.
련 내의 행정기관에 해당하는 묵룡당(墨龍當)으로 이송된 뒤 곧장 심문이 이뤄졌다.
사무적인 태도로 자초지종을 묻는 묵룡당의 서기에게 언미희는 침착하게 정황을 설명했다.
반면 이벽은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연다 한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언미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기는 이렇다 할 답을 주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났다.
이후 두 사람을 방 안에 가둬둔 채 처분에 관련한 절차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늦은 밤, 사건의 당사자에 해당하는 인원들이 긴급하게 소집되어 묵룡당의 회의실에 모였다.
“앉으시오, 소협들.”
이벽과 언미희가 안내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일련의 인원들이 모여 있었다.
중앙에 놓인 긴 탁자.
그러나 맨 끝의 상석은 비어있었다.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 것은 그 바로 우측 자리에 앉은 중년인이었다.
벽력일검(霹靂一劍) 맹종수.
별호와는 달리 청수한 인상을 지닌 그는, 흑천방 출신의 고수이자 사패련 묵룡당의 당주로서 련내의 행정업무 및 수행 절차 등을 총괄하는 이였다.
사패련주가 공식석상에서 자리를 감춘 현재, 사실상 련내의 대소사 전부를 담당하고 있기도 했다.
탁자의 좌측에는 두 명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칠독문의 모산과 흑건파의 악두평으로, 이벽에게 당한 제자들을 이끌고 있는 입장이었다.
우측에는 아는 얼굴이 있었다.
하오문의 대표자 지소약은 이벽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눈웃음을 보였다.
안심을 시켜주려는 듯했다.
이벽과 언미희는 자리에 앉았다.
타앙!!
“네 이노옴!!!”
그때 장내가 진동했다.
흑건파의 악두평이 주먹으로 상을 내려친 것. 일그러진 얼굴 안쪽으로 치켜뜬 눈이 이벽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네 죄를 알렷다! 감히 본문의 제자들을 그 꼴로 만들어놓고도 네놈이 무사할 성싶으냐?!!”
“악 대협, 고정하시지요. 죄인에 대한 처분은 잘잘못을 가린 뒤에 벌해도 늦지 않습니다.”
맹종수가 담담히 말을 받았다.
“흥, 잘잘못은 무슨! 본문 제자들의 꼴을 보고도 어찌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소?!”
…‘죄인’이라.
이벽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때 지소약이 입을 열었다.
“글쎄요. 서순을 따지자면 제 제자에게 먼저 칼을 들이댄 것은 그쪽이었다고 합니다만.”
“멍청한 소리! 그 말을 어떻게 믿소?! 보나 마나 연놈들끼리 입을 맞춰놓고 스스로 상처를 그었겠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희 공자께서 그쪽 제자들을 해하는 모습을 본 사람 역시 없지요.”
“뭐라?!”
“그저 정황이 그렇다는 거지요. 무사들이 당도했을 때 현장에 있던 것은 상처 입고 쓰러진 그쪽 제자들과 제 제자, 그리고 멀쩡히 서 계신 저희 공자뿐. 결정적인 순간을 본 이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요?”
“이, 이이!!”
“애초에 사건은 저희 하오문의 처소 근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만, 그쪽 제자들은 왜 그 자리에 있었던 걸까요? 근본적으로 선후 관계를 명확히—”
타앙!!
“이 천한 계집이 뚫린 입이라고!”
악두평이 다시 한번 상을 두드렸다. 안색이 울그락불그락해지며 포악한 기세를 뿜는다.
일순 지소약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무공이 일천한 그녀는 악두평의 기세를 견디기 쉽지 않다.
그러나 최대한 담담한 안색으로 지소약은 말을 이었다.
“대협, 말씀이 심하시군요. 지금의 언사는 본문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악두평이 멈칫했다.
당금 강호의 어느 누구도 하오문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다.
정사를 통틀어 최대의 규모와 그만큼의 정보력을 지닌 조직.
비록 흑건파가 광서지역의 한 축을 담당하는 강자이자 사패련의 중견 문파일지언정 하오문과 비할 규모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하! 그럼 우리 흑건파가 고작 시장바닥의 잡쓰레기들을 신경이나 쓸 것 같은가?! 네까짓 잡년들이 머릿수나 믿고 함부로 지껄이는 꼴을 보니 속이 뒤틀리는군!”
“…….”
지소약은 빠르게 생각을 이었다.
생각이 짧고 부족해 보이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까지 나온다는 건 무언가 믿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
“맹 당주.”
그때 잠자코 있던 또 한 명의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칠독문의 대표 모산이었다.
“하나 신경 쓰이는 게 있소만, 하오문은 엄밀히 말해 우리 사패련과는 동맹관계일 뿐, 근본적으로는 외부세력이 아니오?”
“따지자면 그렇지요.”
“그러니까, 내 생각이 맞다면 작금의 상황은 외부세력이 련내의 제자들을 습격한 것인데, 내부의 적당한 처벌로 넘어갈 문제는 아니지 않나?”
퍽 날카로운 의견이었다.
하오문은 본래 기녀나 표사 등 무림인이 아님에도 무림에 한발을 걸친 이들이 모여 형성된 조직으로, 무림방파로서의 정체성이 약하다.
그렇기에 더더욱 무력에 휘둘리지 않는 것을 주요한 가치로 삼으며, 사패련과도 정식 가맹이 아닌 동맹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칠독문의 모산이 그러한 입장의 특수성을 비집고 들어왔다.
“틀린 말씀은 아니군요.”
맹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지소약이 서서히 미간을 굳혔다.
“…이상하군요.”
맹종수가 웃는 낯으로 답했다.
“무엇이 말입니까?”
“아직 사건의 전후 관계가 제대로 파악되지도 않았는데, 이곳에서는 마치 이미 저희 공자가 죄인임을 전제로 처분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아서요.”
“아하하, 저로서는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피해를 입은 이들과 입지 않은 이가 있지 않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지요.”
지소약의 시선이 맹종수를 향했다.
허나 맹종수는 여전히 웃고만 있을 뿐이다.
“당주께서는 저희 하오문에 대해 공정한 판결을 내려주실 생각이 없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모든 판결은 공정하고 철저한 조사 속에 한 치의 의혹도 없이 이뤄질 것입니다.”
“…하아.”
지소약은 이해했다.
‘처음부터 한통속이었군.’
맹종수는 사패련 묵룡당의 당주이기 이전에 흑천방 출신으로, 같은 광서권 세력인 칠독문과 흑건파를 두둔하고 있다.
노골적으로 우호세력을 비호하고 적대 세력 혹은 기타 제 3세력을 몰아내려 한다.
사패련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별로 좋은 방식은 아닌 것 같군요.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공사 정도는 구분해줬으면 좋겠지만…….”
“아하하, 무슨 말씀이신지?”
시선이 부딪혔다.
맹종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청아한 미소 위로 서늘한 그림자가 조금씩 자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적인 입장에 대해 말하자면, 저희야말로 하오문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군요.”
목소리는 짐짓 스산해졌다.
“금번에 우리 ‘새로운’ 사패련에서 뜻을 함께하고자 정중히 모시려 했거늘, 그 뜻에 대한 화답이 고작 일개 지부장이라니요.”
“…….”
“거기에 더해 이런 불미스런 일까지 겪고 나니, 저희로서도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게 아닐까, 그리 생각하는 건 불가피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군요.”
“외람됩니다만, 하오문은 아직도 미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같군요. 그래서야 어찌 사파를 대표하는 정보조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맹종수는 말을 멈추었다.
잠깐이나마 회의실 내에 정적이 흘렀다. 꾸벅, 맹종수가 지소약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지금 사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적인 얘기를 하고 말았군요. 무례를 용서하시길.”
하오문은 일찍이 사패련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그때 직인을 찍었던 이는 사패련주이며 동시에 패왕가주이기도 했다.
즉, 하오문과 사패련의 동맹은 어떤 의미에서 패왕가와의 동맹이기도 했다.
흑천방은 그 부분이 맘에 들지 않는 듯했다.
“앞으로의 본 련과 하오문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여기서는 ‘좋은 선례’가 필요하겠지요.”
이미 결정은 내려진 듯했다.
본보기로 삼겠다는 뜻이겠지.
지소약은 시선을 돌려 이벽과 언미희를 돌아보았다. 차갑게 질린 언미희와 말이 없는 이벽.
보호해야 하는 아이들이다.
탁, 타닥.
그때, 지소약은 ‘신호’를 감지했다. 일견 잡음에 불과하여 신경 써서 듣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하오문 고유의 신호체계.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군요.”
비로소 지소약은 안도했다.
“하지만 당주께서도 간과하신 게 하나 있답니다. 아무래도 저희 일행에 대해 조사를 제대로 하진 않으신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 자리에 있는 이벽 공자와 제 제자인 미희, 그리고 저. 본문에서 파견된 일행은 저희 셋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지요.”
드르륵.
그리고 회의실이 문이 열렸다.
작은 체구의 중년인이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얼핏 범인과 같으나 날카로운 인상에서는 범접하기 어려운 기세가 느껴진다.
고 노야였다.
“누구시오?! 감히 함부로—”
맹종수가 대뜸 호통을 치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입이 멈추었다.
고 노야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등 뒤로 또 한 명의 인영이 연달아 들어서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쿵!
인영의 머리가 문틈에 부딪혔다.
“에이, 젠장맞을. 이놈의 빌어먹을 문은 여전히 더럽게 낮구만. 끙차.”
문 안으로 들어올 수 없을 만큼 덩치가 큰 거구의 인영이 허리를 숙이고서 힘겹게 안으로 들어섰다.
맹종수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그것은 모산도, 악두평도 마찬가지였다.
“려, 려, 련주님! 어, 어째서?!!”
“왜, 뭘 그렇게 놀라나? 내가 와선 안 될 곳에 왔나? 거기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닌감?”
사내의 손끝이 비어있는 상석을 향했다. 아주 오랫동안 공석으로 비어있던 자리.
그러나 사내는 태연한 걸음으로 장내를 한 바퀴 돌아 그곳에 착석했다.
물론 누구도 그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휴, 이놈의 의자도 꽉 끼는군. 그 새 내가 살이 좀 쪘나 보이.”
“…….”
사내, 사패련주가 짐짓 인상을 찌푸리며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누구 하나 반응하지는 못했다.
“…련주님, 이런 자리에서 뵙는 건 실로 오랜만이군요. 어쩐 일로 예까지 걸음 하셨습니까?”
잠시 후, 맹종수가 입을 열었다.
침착함을 가장하고 있으나 동요의 기색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그야 나도 나올 생각은 없었는데 말야. 원, 요 며칠 사이 하도 시끄러운데다 아는 늙은이가 날 찾아오더구만. 오랜만에 마실을 나왔더니 허리가 다 아파.”
툭툭, 사내가 허리를 두들겼다.
그러나 태산처럼 거대하고 탄탄한 체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금조차 갈 것 같지 않다.
사패련주의 시선이 장내를 훑었다. 이벽과 사패련주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했다.
쿠웅.
그 순간, 이벽은 충격을 느꼈다.
살심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던 이벽은 분명 초면임에도 낯익다 못해 친숙한 사패련주의 얼굴에서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래서.”
사패련주가 웃었다.
“저 아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저, 저희 제자들을… 피습…….”
“그래서 누가 죽었소?”
“주, 죽지는 않았지만…….”
기세가 등등하던 악두평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잊어버릴 수는 없다.
그 압도적인 무력을.
“에이 이보게들, 명색이 힘을 숭상하는 사파라는 친구들이 말야. 다섯이서 하나한테 당해놓고 빽빽거리는 게 부끄럽지도 않나?”
쯧, 사패련주가 혀를 찼다.
“됐으니까 여기까지 하세. 원, 애들끼리 싸운 거 가지고 외부니 내부니 하는 얘기는 왜 나오는지.”
“…련주님, 외람되지만.”
맹종수가 다시 말을 꺼냈다.
“하오문은 동맹이라 하나 엄연히 외부세력이 아닙니까? 저는 본 련의 율법에 책임을 진 이로서—”
“이보게 맹 당주.”
툭, 사패련주의 집채같은 손이 맹종수의 어깨에 얹어졌다. 맹종수의 어깨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참 당당해졌어. 보기 좋아.”
“…….”
“내가 몇 년간 텃밭에 틀어박혀 고구마나 캐고 있으니 이제 완연한 촌로로 보이나 보지?”
맹종수의 이마에 땀이 흘렀다.
비로소 지금 자신이 누구에게 반론을 던진 것인지 깨달았다.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다.
잊어버리고 싶었다.
사패련주이자 패왕가주.
그리고… 사파에 적을 둔 수많은 고수 중에서도 유일하게 천하십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자.
철탑패왕(鐵塔覇王) 혁군악.
“그래, 율법이라 율법. 중요하지. 킁. 저기, 하오문의 아이야? 너도 상처를 입었다고 했지?”
“네, 넷……?!”
문득 사패련주의 시선이 언미희를 향했다. 언미희가 화들짝 놀라며 반응했다.
“거, 마침 암영각의 공손욱 그 친구가 지금 련내에 와있지 않나?”
“…….”
“독이라면 말야. 그쪽에다 물어보면 되지. 저 아이의 상처를 살펴보고 마비독이 칠독문의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겠나?”
사패련주의 시선이 칠독문의 모산에게 향했다. 모산이 안색이 창백해졌다. 입을 열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는다.
씨익, 사패련주가 웃었다.
“자, 그럼 그런 것으로 하고.”
“…련주님. 저 아이가 설령 칠독문의 독에 당했다고 해도 그런 건 싸움 중에 얼마든지—”
“이봐, 묵룡당주.”
후웅.
장내의 공기가 내려앉았다.
약 삼 년 전, 패왕가는 돌연 외부활동을 접었고 사패련주 역시 사실상 칩거에 들어갔다.
세간에는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사패련주가 암습에 당했느니, 패왕가의 후계구도에 문제가 생겼느니 하는 이야기들.
이유가 있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는 확실했다.
사패련주 본인의 무력은 건재하다. 공간 자체를 내리누르는 듯한 그 기세에서 맹종수는 깊은 절망을 느꼈다.
사파는 결국 힘의 집합체.
더 이상의 반론은 무의미하다.
“내 직인을 멋대로 찍어다 어린애들을 불러 모으건, 사패련을 찜쪄먹건 내 신경 쓰지는 않음세. 어차피 자네에게 맡긴 물건이고, 련이야 굴러만 가면 그만이니까.”
“…….”
“하지만 세상에는 건드려선 안 될 게 있는 법이야. 물론 자네는 저 아이가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겠지만. 그래서 내 노구를 이끌고 이리 선을 그어주고 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