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4)
34화. 도살지도 (1)
“노야, 한 수만 물러줄 수 없소?”
“그런 건 없다. 네놈은 죽은 자가 무덤에서 되살아나는 걸 본 적이 있나?”
“에이! 됐네, 됐어. 거 나이도 먹을대로 먹은 양반이 그놈의 살기탱천한 성미는 녹슬지도 않는구만! 됐소! 여기까지 하고 술이나 마십시다.”
와르르.
사패련주 혁군악이 바둑판을 한 손으로 거칠게 치워버렸다. 마주 앉은 고 노야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
이벽은 잠자코 지켜보았다.
이벽과 칠독문, 흑건파와 관련한 긴급회의는 사패련주의 등장과 함께 사실상 끝나버렸고 하오문의 일행은 모두 처소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자신을 따라오라는 고 노야의 말에 따라 이벽은 처소를 나섰다.
도착한 곳은 작은 텃밭이었다.
사패련의 본당 건물들 사이로 교묘하게 감춰진 작은 공간. 한켠에는 아담한 모옥과 정자가 보였다.
그곳에 사패련주가 있었다.
련의 주인이 기거하는 거처치고는 지나치게 초라했으나 본인에게 있어 문제는 아닌 듯했다.
이윽고 사패련주와 고 노야는 정자 아래에서 바둑을 두며 시답잖은 얘기들을 나누었다.
이벽은 한켠에 앉아 잠자코 몸을 낮추고 있었다. 본인이 이곳에 왜 불려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타닷.
그때, 인영 하나가 정자 안으로 들어섰다.
범상치 않은 기세의 무인이었으나 손에는 병기가 아닌 밥상이 들려 있었다.
슥, 사패련주가 손짓하자 무인은 정자의 한가운데에 상을 내려놓고는 훅, 소리 없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패련주가 밥상을 끌어당겼다. 쪼르르, 잔에 술을 채우며 흘리듯 말을 꺼냈다.
“아이야, 이름이 무엇이냐?”
이벽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벽입니다.”
“그래, 술은 좀 하느냐?”
“배우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구만. 그 미치광이 놈의 수제자치고는 퍽 될성부른 녀석이구나. 그럼 이리와 밥이나 들거라. 내 너와 밥 한 끼 같이 하고 싶어서 불러보았다.”
“…….”
이벽은 목례한 뒤, 상으로 다가갔다. 찬은 조촐했다. 낙검문에서 먹던 것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차린 게 변변찮아 미안하구나. 내 요새 기름진 걸 잘못 먹으면 영 속이 부대껴서 말이다.”
“…아, 아닙니다.”
이벽은 수저를 들었다.
식사를 하며 사패련주의 옆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말이 있다.
줄곧 머릿속에서 맴돌던 한 가지 가능성은… 이제는 확신에 가까웠다.
그때, 술 한 잔을 들이켠 사패련주가 이벽의 마음을 짐작하기라도 하듯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내 아들놈은 잘 지내더냐?”
“…….”
“왜? 설마 그 녀석이 내 얘기 안 하디? 그렇다면 아직도 이 애비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가 보구만.”
사패련주이자 패왕가주.
사파지존임과 동시에 현 무림의 정점에 군림하는 열 명의 거인 중 하나.
철탑패왕 혁군악.
그 모습은… 낙검문의 둘째 제자이자 자신의 사형제인 혁대웅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했다.
아니, 사실은 그 반대이겠지.
마침내 가능성은 사실이 되었다. 그래서 이벽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사패련주라는 사실보다도 혁대웅의 부친이라는 사실이 이벽에게는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사형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벽은 고민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말은 달리 없었다. 혁대웅은 낙검문의 제자로서 더할 나위 없이 잘 지내고 있다.
“허어, 사형이라.”
혁군악이 옅은 한숨을 뱉었다.
“지난 삼 년간 내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대했건만, 네 스승이 너를 보낸 걸 보니 어쩌면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
천하십대고수에게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있는 모양이었다. 쪼르르, 혁군악이 다시 술잔을 채웠다.
“하지만 그 아이에겐 오히려 잘 된 것일 수도 있겠지. 그래, 사형제란 말이지. 과히 듣기 나쁘지는 않구나.”
크크, 혁군악이 웃음을 흘렸다.
침묵 속에서 수저가 움직였고 술잔이 채워지고 비워지기를 반복했다.
“뭐, 그건 그렇고.”
그리고 식사가 마무리될 즈음, 혁군악이 다시 말을 꺼냈다.
“아이야, 너는 심마에 빠졌다. 알고 있겠지?”
이벽의 표정이 굳었다.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지난 저녁의 일을 떠올렸다. 이벽과 언미희는 칠독문과 흑건파 제자들의 습격을 받았고, 이벽은 그들을 죽음 직전까지 만들어놓았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린 것이 문제였다.
마지막 순간 언미희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이벽은 그들을 베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또다시 살심에 휘둘리고 말았다.
“뭐,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심마와 깨달음이란 결국 백지 한 장 차이 같은 것이니. 심성이 깊기에 수렁에도 빠지는 것이지.”
이벽의 어깨에 손이 얹어졌다.
“뭣보다 그 미치광이 놈의 무공을 성취한 네가, 그깟 심마 하나 극복하지 못할 리는 없을 것 같구나.”
그것은 창 한 자루로 사파 무림에 군림해온 절대자치고는 퍽 온화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당장 검을 쓰는 데에는 약간의 답답함이 따를 수도 있겠지. 그래, 아이야.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생각이더냐?”
“…….”
앞으로의 일.
그것은 이벽이 줄곧 외면하고자 했으나 더 이상은 미뤄둘 수 없는 질문이었다.
낙검문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모든 여정은 그저 이진천의 심부름이었을 뿐, 이벽에게 있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는 않았다.
온 천하를 뒤져본들 이벽이 속한 곳도, 돌아갈 곳도 오직 화정촌의 낙검문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돌아갈 수 없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이벽은 스스로 그런 생각을 했음에 놀랐다. 허나 이유는 퍽 명백했다.
마음속에 피 얼룩을 묻힌 채로 그곳에 돌아가서는 안 된다. 통제되지 않는 검은 그 자체로 위협이다.
“…….”
업(業)인가.
사람을 베고 살심을 얻었다.
허나 그것은 마치 옷 위로 묻은 피 얼룩과 같아서 닦아내려고 할수록 넓게 번져나가는 것 같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살심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얻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디로 가서 무얼 해야 하지?
어디로 가면 답을 찾을 수 있지?
그 순간, 이벽은 마음이 텅 비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망망대해 같은 무림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이정표가 사라졌다.
“크크,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혁군악은 답을 보채지 않았다.
휙, 그가 빈 술병을 바깥으로 집어 던지자 그 즉시 좀 전의 무사가 새 술병을 들고서 나타났다.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기울기 시작했다.
—사형제란, 사 자 붙은 형제야.
문득, 이벽은 고 노야와 술을 대작하는 혁군악의 옆모습에서 혁대웅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막내야, 뭐가 그리 급했느냐?
불현듯 이진천이 떠올랐다.
과거, 이진천은 이벽에게 수호대의 패와 검을 맡기며, 천향루로 향하면 해야 할 일을 알게 될 것이라 했다.
그리고 이벽은 천향루주 지소약을 만난 뒤 그녀를 호위하여 이곳 사패련까지 당도했다.
그러나. 어쩌면.
이곳 사패련에 당도하는 것은 과정에 불과했을 뿐, ‘심부름’은 아직 끝난 게 아닐지도 모른다.
혁군악은 아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사형제는 아직 무림에 나올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그래서 이벽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만에 하나.
처음부터 셋 중에 누군가 한 명은 도맡아야만 하는 일이 이곳에 있었던 것이라면. 그것이 이진천의 뜻이었다면.
“련주님,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흐, 무엇이냐?”
혁군악이 소매로 입을 훔쳤다.
“만일… 이 자리에 있는 게 제가 아니라 제 사형이었다면, 련주님께선 사형에게 무엇을 맡기실 생각이셨습니까?”
자신이 낙검문에 소속감을 느끼듯, 혁대웅 역시 그곳에 속해 있었다. 그는 이미 낙검문과 화정촌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자신보다도 훨씬.
고로 누군가가 잠시 낙검문을 떠나있어야 한다면, 그게 자신이 되는 것은 타당하다.
“맡기긴 무슨. 그 아이가 이곳까지 제 발로 찾아왔다면 이미 본인의 뜻이 서 있을 텐데, 일을 시킨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
“노쇠한 애비는 그저 지켜보았겠지. 이 무림에서 그 아이가 무엇이 되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크크, 술기운이 오른 혁군악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뭐, 하고자 한다면 몇 가지 케케묵은 조언 정도는 던져줄 수 있다. 그게 보통의 아비들이 하는 일이 아니겠느냐?”
* * *
후욱.
이벽의 검이 춤을 추었다.
청강검식, 그리고 청강유엽검식이 연달아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벽이 살심을 떠올리자 검결은 어김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벽에 부딪히는 건 익숙하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검의 길이란 결국 벽을 넘어 그다음의 벽을 만나는 일의 연속일 뿐이다.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줄곧 그렇게 해왔다. 하지만.
스윽.
이벽의 검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경지를 가로막은 벽 앞에서, 이벽은 처음으로 버티는 게 아닌 다른 시도를 해보았다.
옆길을 에둘러본다.
타앙!
다음 순간, 이벽이 오른발을 뻗었다. 동시에 살기를 머금은 검이 벼락처럼 허공을 찢어발긴다.
청강검식도 청강유엽검식도 아닌.
도살지도(屠殺之刀).
일 초식, 난(亂).
상처를 찢고.
이 초식, 륙(戮).
살점을 깎고.
삼 초식, 참(斬).
뼈를 베어내고.
사 초식, 압(壓).
이내 짓뭉개버린다.
가상의 적들을 무자비하게 도륙낸 이벽의 검이 다시 회수되었다. 짓이겨진 풀들이 우수수 비산했다.
“…….”
바르르, 이벽의 팔이 경련했다.
선천의 힘에 의해 유도되는 청강유엽공의 내공과 도살지도의 초식은 서로 조화되지 않았다.
도가 계통의 내공과 사파의 검결은 어울리지 않다 못해 상극에 가까웠다.
자연히 검술의 위력은 반감되었고, 초식이 지닌 고유의 위력을 제대로 끌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도살지도는 살심을 다스리기에는 그 무엇보다도 적합한 무공이었다.
“…….”
혁군악은 ‘심마’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벽이 스스로 생각했을 때, 두 가지 현상을 통해 겉으로 드러나고 있다.
첫 번째로, 검과 살심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두 번째로, 살심이 마음의 통제력을 잃게 만든다.
검의 통제와 마음의 통제.
두 가지 문제는 서로 다르지만 하나로 뒤엉켜있기도 했다.
아마도 해결에 이르는 길 역시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혁군악은 다음과 같은 조언을 주었다.
“당장 네 심마에 대한 완전한 답을 찾을 수는 없을지언정 휘둘리지는 않을 임시방편은 있다.”
“…어떤 방법입니까?”
“심신에 벽을 세우는 것이지.”
혁군악이 고 노야를 가리켰다.
“저 늙은이가 너에게 검을 한 수 가르치려 했었다지? 그걸 살살 뽑아먹어서 그 안에 네 살심을 봉하거라.”
“…….”
“죽이기 위한 검과 그렇지 않은 검을 네 마음속에서 단단히 나누어 구분 지어놓는 것이다.”
도살지도. 살육의 무공.
그 초식이라면 이미 이벽의 머릿속에 틀어박혀 있었다. 잊어버리려 한들 사라지지 않았다.
이벽은 고 노야에게 다시 한번 가르침을 청했다.
딱히 스승과 제자의 예를 치르지는 않았고, 고 노야도 그런 것을 원치는 않았다.
고 노야는 이벽에게 도살지도를 전수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도살지도와 짝을 이루는 내공심법인 적파심공(赤派心功)의 구결까지 전수해주었다.
물론, 단전을 잃은 데다가 설령 그렇지 않았다 한들 이미 청강유엽공을 익히고 있는 이벽이 그 심법을 익힐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익힐 수 없다 한들 그 이치를 이해할 수는 있다.
도살지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해 이벽은 적파심공의 구결을 받아들였다.
이벽은 절박하게 파고들었다.
재능과 의지가 만나 꽃을 피웠다.
혁군악은 이벽이 마음껏 검을 휘두를 수 있도록 자신의 텃밭을 내어주었다.
그 위에서 이벽은 침식을 잊고 온종일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마른 천이 물을 빨아들이듯, 이벽은 도살지도의 무리를 몸 안에 새겨넣었다.
단 한나절 만에 네 개의 초식이 기초적인 형을 갖추었다. 애초에 죽이기 위한 무공이기에 살기를 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또한 도살지도의 살기가 짙어질수록, 그와는 반대로 청강검식에 끼어든 부자연스러움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혁군악의 말처럼, 죽이는 검과 죽이지 않는 검이 마음속에서 단단히 구분되어 대치를 이룬다.
그것은 마치 자기 자신을 용도에 따라 두 명으로 나눠놓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벽은 성취감을 느꼈다.
그것은 낙검문을 떠난 이래 검의 경지에서 줄곧 정체되었던 이벽이 퍽 오랜만에 맛보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우웅.
선천의 힘이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도살지도의 수련을 시작한 지 한나절이 지난 이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