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5)
35화. 도살지도 (2)
우우웅.
침식조차 잊은 채 도살지도의 수련에 몰두하던 이벽은 문득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이상하다.’
선천의 힘에 의해 이끌어지는 내력의 흐름이 눈에 띄게 더디어졌다.
흡사 바위에 가로막힌 냇물처럼 부자연스러움이 끼었다.
‘왜지?’
퍽 당황스럽다. 낙검진천신공의 깨달음을 얻은 이래 이런 경험을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이벽이 내력을 일으키고자 마음을 먹은 순간, 선천의 힘은 이미 고리를 만들어 힘을 전달해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원치 않는 순환을 이벽의 강제에 의해 억지로 이어가고 있는 것 같다.
“…….”
이벽은 검을 거두었다.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면 이유 또한 있을 터이며, 찾아내고 해결하면 그만이다.
이벽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처음 깨달음을 얻었던 때를 되새겨보았다.
선천의 힘에게 스스로 움직일 자유를 주었을 때, 비로소 그 힘은 이벽에게 내력의 고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렇다면.
이벽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그리 길지는 않았다.
이벽이 마음을 내려놓자 이내 선천의 힘은 기다렸다는 듯이 순환을 멈추었다.
눈 깜짝할 사이 기혈 속에 흐르던 청강유엽공의 내력이 눈 녹듯 종적을 감추었다.
우우웅!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선천의 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생마처럼 혈도를 내달린다.
“큭.”
이벽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선천의 힘이 움직이는 그 길은… 청강유엽공의 경로가 아니었다.
퍼억, 퍽!
선천의 힘은 이벽이 생전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던 혈로를 억지로 잡아 뜯어내고 있다.
격통이 일었다.
그러나 동시에 고통 속에서 이벽은 깨달았다. 그 경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은 이미 알고 있다.
적파심공.
앞서 고 노야에게 전수받았던, 도살지도와 짝을 이루는 내공심법의 구결이 선천의 힘에 의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주륵.
이벽의 입가에 혈선이 그어졌다.
태생이 사파의 무공인 적파심공은 도가계통에 속한 청강유엽공과는 전혀 속성을 달리한다.
이내 정제되지 않는 혼탁한 기운이 이벽의 몸 안에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우웅!
도가의 내공에 익숙해진 이벽의 혈로는 익숙지 않은 기운의 유입을 강하게 거부했다.
퍼엉!
“커헉!”
이벽은 피를 토했다.
혈도에 가로막혀 잠시 주춤하는 듯했던 선천의 힘은 이내 여세를 모아 거부하는 혈도를 가볍게 뚫어버렸다.
울컥울컥, 이벽의 가슴께에서 피가 올라왔다. 가벼운 내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우우웅.
열린 길 위로 내공이 차오른다.
이벽은 다시 가부좌를 회복했다.
몸 안에는 어느새 내력의 고리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벽에게 익숙한 청강유엽공의 고리가 아니었다.
적파심공의 고리.
이벽이 생전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사파의 혼탁한 힘이 고리를 타고서 흐르고 있다.
그것은 비록 이벽이 평생을 갈고 닦았던 청강유엽공의 경로처럼 정제되고 원활하지는 않았으나, 분명한 순환을 이루고 있었다.
“…….”
놀라운 일이었다.
통상적으로 무림에서는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심법을 익히지는 않는다.
물론 소위 명문이라 일컬어지는 세력에서는 하급에서 상승심법으로 단계를 나누어 가르치는 경우는 있다.
이벽 역시 과거 청강유엽공을 익히기에 앞서 선우세가의 기초 토납법을 익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같은 뿌리의 공부를 확장시키는 개념이지, 아예 다른 심법을 동시에 욱여넣는 것과는 경우가 다르다.
근원이 다른 두 가지 심법을 억지로 익혔다간 서로 다른 기운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특히 그것이 정파와 사파의 무공만큼이나 서로 상극에 이르는 기운이라면 폐인이 되지나 않으면 다행인 것.
그러나.
이미 단전이 깨어지고 없는 이벽에게 있어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깨진 그릇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비어있는 깨끗한 그릇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선천의 힘이 본래 익힌 것과는 정반대의 기운을 채워 넣은들 충돌에 의한 부작용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벽은 깨달았다.
도살지도와 적파심공에 대한 이해가 숙련에 이르자, 선천의 힘이 보다 ‘자연스러운’ 경로를 스스로 이끌어 낸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선천의 힘이 이끌어 낼 수 있는 힘은 애초부터 어느 하나의 무공에 국한되지 아니했다는 뜻.
‘…터무니없군.’
심지어 낙검진천신공의 큰 그릇 앞에서는 정과 사의 경계마저도 무의미했다.
어쩌면, 인연이 닿는 한 이벽은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내공과 검공을 체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우웅.
이벽은 희열을 느꼈다.
몸 안을 가득 들어 채운 날카롭고 탁한 내공은 기분 좋은 고양감을 가져다주었다.
이벽의 경지는 그대로다. 이진천이 보여주었던 청강유엽검의 완성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그러나 깨달음의 폭은 넓어졌다.
내상을 보듬으며 이벽은 머릿속으로 도살지도를 그려보았다.
적파심공으로 펼쳐지는 도살지도의 위력은 마침내 본래의 기세를 되찾았다.
흉포하며, 잔혹하고, 무자비하다.
이후로도 한동안 이벽은 깨달음의 여운에 젖어있었다. 선천의 힘은 자신이 벌려놓았던 이벽의 내상을 서서히 아물게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벽은 문득 눈꺼풀 위로 스며드는 햇살을 느꼈다.
눈을 뜨자 아침 해가—
“…….”
아침 해가 아니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새벽을 지나고도 반나절이 더 지나있었다.
* * *
퍼어억!
“커헉!”
권갑에 명치를 찔린 후기지수가 짧은 비명을 토해냈다. 배를 감싼 채 뒷걸음질 치다 이내 무릎을 꿇었다.
털썩, 쿵.
의식을 잃은 듯 축 늘어진다.
손에서 떨어진 검이 땅을 굴렀다.
“하, 하오문의 언미희 소저께서 승리하셨소!”
심판관이 황급히 외쳤다.
그리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이 다가와 쓰러진 후기지수를 들것에 실어 운반했다.
장내는 고요해졌다.
사패련 친선 비무회.
신설 무력대인 비룡대의 창설에 앞서 예비 대원이라 할 수 있는 백여 명의 후기지수들을 대상으로 치러지는 비무회였다.
규칙은 단순했다.
승리한 이는 본인이 원하는 만큼 무대 위에 남아있을 수 있으며, 그 외에는 언제고 무대에 올라 기존의 승자에게 도전할 수 있다.
물론 친선비무이므로 반드시 비무대에 올라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그 활약상에 따라 차후 비룡대 내부의 서열이 정해질 것임은 자명하다.
“쾌천문의 손정입니다!”
“대력검파의 무룡옥이라 하오!”
이내 흑룡방의 우호세력과 해남검파의 우호세력으로 양분된 후기지수들은 앞다투어 비무대에 오르며 자신을 뽐내었다.
최후의 접전은 어차피 흑룡방의 맹우강과 해남검파의 파진성으로 결정되어 있지만, 그전까지는 자신들에게도 돋보일 기회가 있는 것이다.
이내 승패가 한 번씩 오고 가며 양측 진영에서는 환호와 탄식이 번갈아 이어졌다. 그리고.
“하오문의 언미희입니다.”
그녀가 무대 위로 올라선 것은 한창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하던 즈음이었다.
처음에만 해도 양측 모두에서 비웃음과 야유가 일었다.
그러나 한 명 한 명,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 이들이 늘어나며 웃음은 사그라들었다.
현재, 다섯 명의 후기지수들이 연달아 언미희의 권에 의해 들것에 실려 나갔다.
누구도 그녀를 비웃지 못했다.
“후우.”
언미희는 숨을 들이켰다.
남은 내력을 가다듬는다. 필요 이상으로 격하게 움직였지만, 아직은 충분히 여유가 있다.
그녀는 화가 났다.
이틀 전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온몸이 떨리는 듯했다. 적들에 대한 분노였고,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그 자리에서 이벽이 자신을 구해주지 않았다면,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을 겪었을 것이다.
심지어 적들은 그다지 강한 이들조차 아니었다. 고작 암습 따위에 당해 한심한 꼴이 되고 말았다.
으드득, 이가 갈렸다.
문득 언미희는 객석을 올려다보았다. 저만치에 지소약의 웃는 낯이 보였다.
강호는 무정하다.
은인이지만, 주인이기도 하다.
그녀의 집안인 진주언가는 몰락했고, 가주 대리인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식솔들을 책임져야 했다.
집과 터전을 잃었고, 중원을 전전하다 못해 거처와 안전을 대가로 하오문 휘하의 호위무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는 지소약의 명에 따라 평생을 멀리하리라 여겼던 사파의 무력대에 합류해야만 한다.
언미희는 분노를 참지 않았다.
악독한 사파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버텨야 한다면 믿을 건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힘을 감춰야 한다는 생각은 버렸다. 언미희는 무대 위에서 마음껏 자신을 풀어놓았다.
“자, 자! 다음으로 언미희 소저에게 도전하기를 원하는 소협은 없소?!”
심판관이 거듭 외쳤다. 그러나 다음 상대는 좀처럼 비무대로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미희는 다시 객석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이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섭섭했다.
고 노야에 의해 불려 나간 뒤 지난 이틀간 그는 더 이상 하오문의 처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 비무회가 끝나는 대로 그는 지소약과 함께 운남성으로 돌아갈 테니, 어쩌면 이대로 인사도 못 하고 헤어지게 될지도.
‘…의외로 좋은 사람이었지.’
사파인이 아니란 걸 처음부터 알았다면 좀 더 일찍부터 가까워질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런 생각은 지금의 자신에겐 사치다.
웅성웅성.
그때,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언미희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쿵, 쿵.
어중이떠중이의 틈바구니 속에서 장신의 인영 하나가 걸어 나오는 모습을 확인했다.
“…….”
언미희는 당황했다.
흑천방의 대제자, 맹우강.
흑천방 측 진영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이가 예상과는 훨씬 빨리 비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너, 쓸만하군.”
조금, 아니 꽤 부담스럽다.
언미희는 이쯤에서 물러설까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맹우강이 말을 꺼냈다.
“확실히 저 머릿수밖에 없는 쓰레기들보단 나아. 아무래도 하오문에 대한 판단을 재고해야겠어.”
“…….”
오만한 표정에는 본인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는 흔들림 없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느긋한 동작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헌데 그 녀석은 어디 있나?”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련주가 녀석을 감싸 돌았다고 하더군. 뒷방 늙은이가 이제 와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슬리는 건 치워버려야겠지.”
“…….”
이벽을 노리는 건가.
언미희는 맹우강을 올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작은 체구의 언미희와 팔척에 이르는 맹우강이 나란히 서자 신장의 차이는 어른과 어린아이처럼 압도적이다.
“흥, 이 자리에는 없는 모양이군. 도망칠 생각이라면 어차피 상대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란 뜻이겠지. 이봐 계집, 너와는 별로 싸우고 싶지 않으니 물러나라.”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하지?”
“네가 맘에 들었다. 어설프게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군. 옆에 두고 귀여워해 주지.”
언미희는 물러서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도움을 받은 이벽을 생각해서라도 물러설 수는 없다.
언미희는 말없이 기수식을 취했다. 맹우강이 어깨를 으쓱했고, 이내 심판관이 비무 개시를 알렸다.
타앗!
언미희는 땅을 박찼다.
맹우강이 천천히 도를 꺼내 들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언미희는 몸의 무게를 담아 일권의 끝에 집중했다.
언가권(彦家拳), 골타(骨朶).
채앵!
권갑은 도신에 가로막혔다.
일순 맨손으로 바위를 두드린 듯 묵직한 반탄력이 어깨를 타고 올라왔다. 언미희는 이를 악물었다.
그대로 연계되는 초식을 펼치려던 순간이었다.
“흥, 재미있군. 길들여주지.”
파직.
다음 순간, 권갑을 막아낸 도신에 검붉은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언미희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큭.”
주먹이 저릿하다.
그저 무기와 무기가 부딪쳤을 뿐인데 무언가의 충격이 몸 안까지 전해지고 있다.
언미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격이 다르다. 빈틈은 없고 몸의 균형은 바위처럼 단단하다.
무엇보다… 도에 어린 저 기운은 위험하다.
어설프게 잘못 부딪혔다간 그것만으로 끝장이다. 즉, 어정쩡한 공격은 안 하느니만 못하며, 한 방을 노려야 한다.
타닷!
짧은 순간 계산을 마친 언미희가 다시 달려들었다. 타앗, 제자리에서 일 장 가까이 뛰어올랐다.
언가권(彦家拳), 유성추(流星錘).
휘릭, 허공에서 한 바퀴를 돈 언미희의 두 발이 아래로 내려찍어졌다.
채앵!
맹우강의 도에 가로막혔다.
그러나 그것이 언미희의 노림수였다.
허초였기에 제대로 힘을 싣지 않았고, 그 즉시 튕겨 나간 언미희의 몸이 빠르게 추락한다.
텁,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뒤 땅을 한 바퀴 구른 언미희가 재차 파고들었다.
노리는 것은 하체의 빈틈.
두 사람의 신장의 차이는 압도적이다.
또한 앞선 공격 덕분에 맹우강의 도는 머리 위를 향해 있으며 하체의 수비가 늦어진다.
타앗!
아래로 파고든 언미희의 두 팔이 서로 교차하며 채찍처럼 꼬여 들었었다.
이내 강맹한 기운이 어린다.
언가권(彦家拳), 쌍룡철편(雙龍鐵鞭).
투웅!
두 팔이 장을 내뿜었다.
맹우강의 방어는 한발 늦었고, 두 권갑에 실린 힘이 정확히 가슴팍에 꽂혀 들어갔다.
언미희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터벅.
맹우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큭, 신음과 함께 한발 물러섰다.
“…건방진 년이.”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최선의 공격을 최선의 방법으로 가했으나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파직, 파지직.
다음 순간, 맹우강의 도신에 검붉은 기운이 더욱 짙어지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언미희는 그 즉시 몸을 빼려 했다. 그러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우강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후웅.
그리고 도가 휘둘러졌다. 거대한 도의 반경은 압도적이었고 피하기에는 늦었다.
콰앙!
언미희는 권갑을 들어 몸을 막았다. 파지직, 일순 엄청난 충격이 밀려들었다.
울컥, 목 안쪽에서 피가 치솟았다. 기혈이 진탕되는 것을 느끼며 언미희의 몸이 이 장 가까이 튕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