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2)
32화. 언미희 (2)
“아야야…….”
언미희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이래 봬도 어렸을 때부터 돌머리란 소리 엄청 듣고 컸는데… 공자도 의외로 단단하시네요.”
“…….”
이마와 이마가 충돌했다.
내력이 실린 진짜 공격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부딪힌 순간, 이벽의 눈앞에 쨍하고 별이 일었다. 풀썩, 이벽은 그대로 연무대 위에 대자로 널브러졌다.
뇌수가 흔들리는 충격.
이내 현기증이 가라앉자 오히려 머릿속은 멍해졌다. 이벽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서산으로 저물고 있다.
권법가에겐 단단한 머리마저도 무기가 되는 건가. 실전이었다면 방심의 대가로 목이 달아났을 수도.
“…….”
목숨은 새삼 가볍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공자, 조금은 개운해졌나요?”
그때 이벽의 시야 한구석에 언미희의 얼굴이 슬쩍 튀어나왔다. 저무는 해에 비치는 이마가 붉게 물들어 있다.
“한 가지 생각에 너무 몰두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까요. 그럴 땐 땀을 흘리는 게 최고죠.”
“…….”
“공자, 힘들죠?”
“…무슨 말이오?”
“공자는 괜찮다고 했지만…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사람을 베었는데 괜찮을 리 없잖아요.”
이벽은 말문이 막혔다.
그날 이후, 이벽은 지금까지 줄곧 살심에 대해 고민에 빠져있었다. 검의 문제였지만, 동시에 마음의 문제이기도 했다.
“사실은 사람을 죽였는데 아무렇지 않은 이라면 오히려 제가 가까이하고 싶지 않지만요… 공자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안심했어요.”
스윽, 언미희가 손을 뻗었다.
권갑 안에 쌓여있던 그 손은 거칠지만 작았다. 그처럼 강맹한 권법을 펼친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벽은 그 손을 잡았다. 훅, 언미희가 잡아당기자 이벽의 몸이 가볍게 일으켜졌다.
“자 그럼, 마저 할까요?”
“…….”
“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하하, 언미희가 웃었다.
“솔직히 내력도 거의 고갈이 났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드네요. 신이 나서 너무 무리했나 봐요.”
“…나 역시 한 수 배웠소.”
“엄청 재밌었어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한 수 부탁드려요. …언제가 될진 잘 모르겠지만요.”
이틀 후, 비룡대의 창설이 마무리되는 대로 지소약과 고 노야는 다시 천향루로 돌아갈 예정이다.
물론 이벽 역시 함께할 것이다.
그러나 언미희는 이곳 사패련에 남아 비룡대의 일원이 되기로 했다. 이후 중원 각지에서 사패련의 임무에 종사하게 될 것이다.
“…….”
두 사람은 연무장을 벗어났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길을 더듬으며 나란히 하오문의 처소로 향했다.
어젯밤, 지소약은 이벽에게 이제부터는 남은 일을 ‘스스로 판단’하여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 말했다.
그러나 이곳에 자신이 할 일 따윈 없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기로 왕수련과 약속했다.
다만… 이벽은 언미희를 바라보았다. 그리 긴 인연은 아니었다. 그러나 혼란한 틈바구니 속에 그녀를 두고 간다는 것은 신경이 쓰였다.
‘…오지랖이겠지.’
“공자에게 어떤 배경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누군가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그때 언미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걸음을 멈추지도, 이벽을 돌아보지도 않았으나 시선을 느낀 듯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죠. 가능하다면… 무림에서의 나쁜 일 같은 건 어떻게든 잊어버리는 게 제일이라 생각해요.”
* * *
두 사람은 나란히 길을 걸었다.
해는 빠르게 저물고 건물 사이사이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오문의 처소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다경 정도가 흐른 뒤에서야 두 사람은 길을 잃은 채 서로가 서로의 뒤를 따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하하.”
마주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주치는 무사나 하인들에게 물어물어 길을 찾았다. 그렇게 어느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새를 지나던 무렵이었다.
정면에서 마주 걸어오던 일단의 무리와 마주쳤다. 길목이 협소하므로 두 사람은 일단 물러서려 했다.
그때, 상대가 말을 걸어왔다.
“이거 이거, 누군가했더니 하오문의 소협들이 아니신가?”
“…….”
“안 그래도 마침 한 번 찾아뵐까 했는데 잘 되었군. 하마터면 길이 엇갈릴 뻔했소이다.”
이벽과 언미희는 상대를 확인했다. 세 명의 사내들은 동문인 듯, 모두 같은 복장을 입고 있었다.
자세히 보자 아는 얼굴이 있다.
맨 앞에서 말을 꺼낸 이는 앞서 접객당에서 기녀 운운하며 술병을 집어던지고 시비를 걸었던 바로 그 사내였다.
“…….”
물론 담소를 나눌 만한 사이는 아니다. 이벽과 언미희는 말없이 물러서려 했다.
“잠깐, 어딜 가려 하시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두 명의 덩치 큰 사내가 추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앞뒤로 길을 막은 채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용건이 있나?”
“핫, 여전히 말이 짧군, 그래.”
“…….”
“뭐, 너무 그리 경계하지는 마시지. 그저 어제의 무례를 사과하러 왔을 뿐이니까.”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우선 자기소개나 하지. 나는 광서 칠독문(七毒門)의 모개라고 한다. 이쪽은 내 사제와 사형이고, 그쪽 뒤로는 흑건파(黑健派)의 소협들.”
“…사과를 하러 온 분위기는 아닌 것 같군.”
“뭐, 겸사겸사. 하지만 네놈에겐 용건이 없으니 웬만하면 슬슬 빠져주시지?”
슥, 사내의 시선이 움직였다.
“자, 어떻소, 소저? 듣자 하니 앞으로 한솥밥을 먹게 될 처지인데, 미리미리 같이 식사라도 하러 가는 건?”
“…마음만 받도록 하지요.”
언미희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쯧.”
사내, 모개가 혀를 찼다.
“말귀가 어둡군, 그래.”
스윽.
뒤의 사내들이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아무래도 형식상의 권유일 뿐 선택권을 줄 생각은 없는 듯하다.
“소저,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하지는 마시오. 이미 어제 일로 흑천방의 맹우강 소협께서 의가 많이 상하셨으니.”
“…….”
“암영각 따윈 어차피 안중에도 없고, 해남의 냄새 나는 촌놈들도 어차피 비무가 끝나면 우리에게 굴복하게 되어있지. 지금이라도 순순히 우리를 따라나서는 게 좋을 것이오.”
슬슬 거슬리는군.
이벽이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러나 그때 언미희가 한발 먼저 나섰다. 팔을 들어 이벽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저?”
“공자, 괜찮아요.”
언미희가 이벽을 돌아보았다.
미소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네요. 어찌 되었건 이제부터는 같은 무력대의 소속이 될 테니… 가까워지는 연습을 해야겠죠?”
그리고 언미희가 걸음을 뗐다.
사내들에게로 서서히 다가선다.
“…….”
맘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그녀의 선택이라면 자신이 개입할 여지는 없겠지.
이벽은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그때, 모개의 뒤로 서 있던 사내들 중 하나의 손이 품속에서 꺼내지는 것을 보았다.
후욱!
“소저! 조심—!”
이벽이 경고성을 외친 그 순간, 불의의 기습이 삽시간에 언미희에게로 파고들었다.
타앗!
언미희가 그 즉시 반응했다.
땅을 박차고 잽싸게 물러섰다.
그러나 비무로 지쳐있던 그녀의 반응은 반 박자 늦었고, 단도의 끄트머리가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큭!”
언미희가 팔을 감싸 쥐었다.
“이, 이게 무슨—?!”
비틀, 언미희의 신형이 흔들렸다. 이벽은 그 즉시 몸을 날렸다. 언미희의 어깨를 감싼 뒤 쓰러지는 그녀를 받쳐 들고 다시 뒤로 물러섰다.
“소저, 괜찮소?!”
“그, 그냥 살짝 긁힌… 으윽!”
상처 입은 팔이 바르르 떨렸다.
이벽은 고개를 들었다. 칠독파의 사내들을 향했다. 한 명 한 명, 시선을 맞추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킬킬, 걱정은 말라고. 그냥 일시적인 마비산이니까. 하여튼 몸이나 팔아먹는 기녀 나부랭이가 주제도 모르고 비싸게 굴어서 말이야.”
“…….”
“그야 우리 쪽으로 받아줄 때 받아주더라도 맨입으론 안 되지. 건방지게 군 대가로 잠깐 재미 좀 보자고. 이곳엔 쓸만한 여자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잖아?”
“어이, 우리도 잊지 말라고?”
“그야 이를 말이겠소? 걱정마시오 소협들. 자고로 식사는 함께해야 즐거운 게 아니겠소?”
낄낄낄, 앞뒤로 웃음들이 번졌다.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총 다섯의 사내들에게 있어 이벽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그야 ‘지금의’ 이벽에게는 내공도, 기세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
바르르, 이벽의 손이 경련했다.
모두 고깃덩어리로 만들 수 있다.
살심이 치솟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벽은 위험을 인지했다. 마음이 통제되지 않는다.
“…지금 물러나라.”
이벽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나갔다. 그러나 그 한 마디는 왁자한 웃음소리에 묻혀버렸다.
“와하하! 뭐라고?! 진짜 주제도 모르는군! 지금 우리더러 물러나라고 했소?!”
“너 이 새끼, 진짜 하오문 맞냐? 무슨 샌님같이 생겨 가지고. 대갈통 으깨버리고 싶게 생겼는데?”
“워워! 고정들 하시오. 어찌 되었든 죽이면 골치 아파지니까! 적당히 칼집이나 몇 개 내주고 보내줍시다!”
“…….”
문득 제갈소미가 떠올랐다.
그리고 청성파가 떠올랐다.
기억 속에서, 이벽은 청성의 제자 우학에게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그를 대신에 제갈소미가 상처를 입고 모욕을 감내했다.
울컥,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힘이 없는 자는 당하게 마련이다. 그것이 무림이다. 하지만… 힘이 있는데 어째서 참아야 하지?
후욱, 빠악!
이벽은 검을 뽑지 않았다. 그 대신 뽑히지 않은 검이 검집째로 휘둘러졌다.
한 번의 타격음.
다음 순간, 등 뒤로 다가서던 흑건파 사내 중 하나의 안면에서 후두둑 코피가 쏟아졌다.
“엥?”
비틀, 쿵!
사내가 옆으로 쓰러졌다.
벽에 부딪힌 뒤 축 널브러졌다.
“지, 지금 무슨……?”
“…….”
남은 네 명의 사내가 벙찐 얼굴을 했다. 이벽은 언미희를 한쪽 벽에 조심스레 기대어 앉혀두었다.
그것은 사내들이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 사실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이벽의 검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때였다.
빡, 빠악! 빡!
“컥!”
“커윽!”
모개가 쓰러졌다.
그 옆의 사내도 쓰러졌다.
단 한 호흡 만에 칠독문의 두 명이 땅 위를 나뒹굴었다. 어떻게 당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 이익!”
후우웅!
그때서야 등 뒤의 사내가 부랴부랴 대도를 꺼내 들었다. 무게를 실어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슥, 이벽이 검을 들어 올렸다.
타앙!
나무 검집에 감싸인 검과 거대한 대도가 부딪혔다. 그러나 그 순간 튕겨 나간 것은 오히려 대도였다.
“크악!”
흑건파 사내가 도를 놓쳤다.
손아귀가 찢어진 듯 피가 흘렀다.
뻐억!
이벽의 검 끝이 놓치지 않고 사내의 명치를 파고들었다. 커윽, 배를 부여잡은 사내가 비척비척 물러섰다.
쓰러진 채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후욱!
그때, 이벽의 정면에서 단도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제갈소미의 그것에 비하면 한심할 만큼 느리다.
태앵, 가볍게 쳐낸 이벽이 정면을 향했다. 그러나 단도의 주인은 이미 사형제들따윈 안중에도 없이 저만치로 도망치고 있다.
언미희에게 상처를 입힌 사내.
“…….”
이벽은 단도를 주워들었다.
훅, 주인을 향해 집어 던졌다.
푸욱!
“끄악!”
단도는 주인의 등 뒤에 꽂혔다.
사내가 그대로 고꾸라져 땅을 굴렀다. 마비산이 묻어있다고 했으니 도망치지는 못할 것이다.
이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섯 명의 사내가 모두 땅 위로 쓰러진 채 바들거리고 있다. 그러나 의식을 잃지는 않은 듯하다.
다행히도.
이벽은 검을 고쳐 들었다.
뻐억! 뻐억! 뻑! 빠각! 뻐억!
퍽! 뻐억! 우드득, 빠각! 뻐억!
골고루 내려찍었다.
이내 고통에 짓이겨지는 비명과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벽의 검은 날이 없는 검집에 쌓여있으므로 아무리 맞아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죽는다면 운이 없는 것이다.
뻐억! 뻐억! 빠각! 뻐억 뻐억!
뻐억! 뻐억! 뻐억! 빠각! 우드득!
피가 튀고 살점이 짓물러졌다.
쓰러진 이들은 어떻게든 충격을 줄여보려 발버둥 쳤다. 그러나 막으면 막은 팔이 부러지고, 웅크리면 등과 어깨가 터져나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하나둘 의식을 잃은 듯 저항조차 멈추고 말았다. 그러나 이벽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검술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살심에 휘둘리는 가학적인 몸짓에 불과했다. 그것으로도 이벽은 아직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덥석.
“그, 그만…, 제발…….”
그때 누군가의 손이 이벽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원형을 잃어버린 모개의 얼굴이 있었다.
“…….”
빠각!
붙잡은 손목이 부러졌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경련하는 모습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퍽 맘에 든다.
그러나 모자라다.
그 순간, 다시 살심이 속삭였다. 검집에 쌓인 검이 답답해하고 있다. 살과 뼈를 통째로 베어내는 감각이 깨어난다.
어차피 이렇게 되었다.
살려둘 이유가 있을까?
스릉.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검신이 저무는 햇빛을 머금으며 주홍빛으로 빛났다.
터엉!
그때, 이벽의 몸이 밀려났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이벽을 밀쳐낸 것이다. 후욱, 그 즉시 이벽의 검이 망설임 없이 휘둘러졌다.
“……!”
다음 순간, 이벽의 검이 가까스로 허공에서 멈추었다. 한 치만 더 파고들었다면, 언미희의 목이 베였을 것이다.
“안, 안 돼요… 공자.”
“…….”
“피를 보면… 돌이킬 수 없어요.”
언미희가 힘겹게 웃었다.
탱그랑, 이벽의 검이 땅에 떨어졌다. 손이 바르르 떨었다. 이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적들을 바라봤다.
문득 피 냄새가 짙어졌다.
마음속에서 이는 냄새였다.
타다다닷!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 무리의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빠르게 가까워졌고 이내 골목의 앞뒤로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만, 그만! 당장 검을 버리고 싸움을 멈추—… 윽.”
골목을 둘러싼 사패련의 무사들 사이로 일순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