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1)
31화. 언미희 (1)
“응, 그랬구나, 역시.”
지소약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수의 난입 이후 험악한 분위기는 흐지부지되었고, 이벽과 언미희는 은근슬쩍 하오문의 처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후기지수들의 틈바구니 속에 있는 동안 지소약은 각 문파의 대표들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던 듯했다.
언미희가 접객당에서의 일을 간략히 설명하자 지소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 역시라니요……?”
“아무렴. 지체 높은 중견고수들도 서로 편 가르고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났는데 애들은 오죽했겠니?”
“…….”
“그렇다곤 해도 저들끼리 진짜로 칼부림하기는 그러니… 결국은 이번 행사를 통해 차기 사패련의 서열 구도를 정리하겠단 뜻이겠지.”
“그…, 그게 무슨?”
후룩, 지소약이 찻잔을 들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퍽 충격적이었다.
“무력대 결성에 앞서 그 구성원이 될 후기지수들 간의 ‘친선비무회’를 열겠다고 하더구나.”
“…….”
“뭐, 친선이라곤 해도 그 결과에 의해 내부 서열이 결정되겠지. 무슨 말을 한들 결국은 강자가 위에 서는 게 사파의 본질 아니겠니?”
사패련을 대표하는 세력으로는 총 네 군데가 있다.
이들을 정파의 구파일방, 오대세가와 견주어 달리 사대세력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단 하나, 사파제일문을 꼽자면 누구나 이견 없이 꼽는 곳이 바로 이곳 귀주의 패왕가(覇王家)였다.
사패련의 결성 이래 패왕가의 가주는 이대째 사패련의 련주를 겸하고 있으며, 근 오십여 년간 사파무림의 질서를 지켜왔다.
애당초 사패련의 본단이 이곳 귀주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패왕가의 앞마당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사대세력 중 나머지 세 곳은 반 수에서 한 수 정도 처진다는 게 세간의 정론이었다.
그러나.
약 삼 년 전, 패왕가는 불현듯 거의 모든 외부활동을 중단하고 대문을 걸어 잠그기에 이른다.
심지어는 사패련주마저도 련내의 처소에 틀어박힌 채 좀처럼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유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저 이런저런 소문만이 무성했지만, 결국은 그 무엇도 밝혀지지 않은 채 세월이 흘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간 무림에는 이렇다 할 사건이 없어 큰 문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호랑이가 몇 년씩이나 잠을 자고 있으니, 짓눌려 있던 나머지 맹수들이 슬그머니 어깨를 펼 때가 된 거지.”
패왕가가 활동을 접자 마침내 나머지 사대세력들이 서서히 사패련의 주도권에 욕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번의 소집을 주도한 것도 모두 흑천방과 해남검파가 경쟁적으로 나서서 벌인 일인 듯했다.
“그렇다는 건…….”
“패왕가가 주춤한 틈을 타, 우선 차세대의 주도권을 잡고 무리를 형성하여 다음 세대를 도모해보겠다는 거겠지요.”
지소약의 시선이 이벽을 향했다.
“…….”
“암영각은 본래 전면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차치하고서라도, 나머지 두 세력은 딱히 야욕을 감출 생각도 없어 보이더군요.”
그렇군. 이벽은 생각했다.
설명을 듣고 나자 비로소 후기지수들이 좌우로 갈라져 서로에게 적의를 드러내던 이유에 대해 이해가 간다.
물론 이해했다고 한들 딱히 이벽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파무림의 향방이 어떻게 되건, 애초에 그와는 상관없는 남의 집 싸움판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하오문은 어떻습니까?”
이벽은 질문을 던졌다.
사패련이 양분되어 있다면, 그 사이 어딘가에는 하오문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이벽은 현재 하오문 대표의 일원이다.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건 좋지 않다.
“음, 글쎄요? 어떠려나요?”
“…….”
말문이 막힌 이벽이 눈을 끔뻑거리자 지소약이 푸훗, 웃음을 흘렸다.
“유감이지만 저 같은 일개 지부장이 그런 것까지 알 수는 없답니다. 다만, 감히 추측해보자면 제 생각에는 아직 정해진 것은 없지 않을까 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야 제가 여기 있으니까요. 저 같은 이들의 보고를 통해 향후 어느 편에 설지, 혹은 어느 쪽 편에도 서지 않을지 본문의 입장이 결정되겠지요.”
“…….”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요.”
그리고 방 안에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탁, 지소약의 찻잔이 상 위에 내려앉았다.
“저기, 미희야?”
“네, 네?!”
지소약의 시선이 다시 언미희를 향했다. 일순 언미희가 화들짝 어깨를 떨었다.
“네게 거는 기대가 크단다.”
“…그, 그 말씀은……?”
“몽땅 쓰러뜨리라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을게. 하지만 장차 사파무림의 주역이 될 소협들이 한데 모였는데, 우리 하오문이 체면치레는 해야 하지 않겠니?”
“…….”
언미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벽은 사패련에 도착한 직후, 언미희와 나누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결국은 그녀의 안 좋은 예감이 들어맞고 말았다.
지소약은 마치 지금에서야 결정이 이뤄진 것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아마도 출발 전부터 이미 전후 사정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뭐어, 또래의 무인들과 손속도 나눠보고. 무명도 높이고. 나한테 붙어있는 것보다는 훨씬 재밌을 거야. 그렇지?”
“…네에, 알겠습니다.”
언미희는 고개를 떨구었다.
스승과 제자. 혹은 주인과 호위.
두 사람의 관계가 정확히 무엇으로 어떻게 엮여있는지, 이벽으로선 알 수 없다.
다만 본인의 의사가 어떻든 간에 언미희에게 거부권은 없는 듯했다.
그리고 지소약이 다시 이벽을 바라보았다. 오가는 눈빛 사이에서 잠깐의 침묵이 일었다.
“공자께서는…….”
“…말씀하시지요.”
지소약이 난처한 듯 웃었다.
“감히… 제가 공자께 이러니저러니 명령을 내릴 입장은 아니지요. 그러니 공자께서는 스스로 헤아려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 *
“하앗!”
청아한 기합이 울려 퍼졌다.
언미희의 주먹이 뻗어졌다.
터엉, 주먹의 경로를 틀어막은 이벽의 검이 잘게 떨렸다. 묵직한 충격이 손끝을 타고 올라온다.
후욱.
이벽의 몸이 가볍게 밀려났다.
기세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언미희가 다시 땅을 박찼다. 거리를 좁히며 주먹이 재차 파고들었다.
“옆이 비었군.”
후웅, 퍼억!
그러나 다음 순간, 교묘하게 휘어진 이벽의 검면이 언미희의 옆구리를 두드리고 지나갔다.
청강검식의 회검식, 곡의 묘리.
“크읏!”
일순 자세가 무너진 언미희가 작게 신음을 뱉었다.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비척비척 물러났다.
“…하아, 섣불렀네요.”
언미희가 숨을 토해냈다.
잠깐의 소강상태. 그러나 언미희의 기세는 전혀 죽지 않았다. 이벽은 검을 고쳐잡았다.
지소약의 명에 의해 언미희는 사패련의 후기지수들을 대상으로 한 신설 무력대인 ‘비룡대(飛龍代)’에 합류하게 되었다.
사흘 후, 비룡대의 예비대원들을 대상으로 한 친선비무가 열린다고 했다.
비무의 활약상을 통해 내부의 조직 편성이 결정될 모양.
사실상 흑천방과 해남검파의 자존심을 건 충돌이 되겠지만, 기타 세력의 후기지수들에게도 눈에 띌 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물론 그것은 언미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정작 본인은 전혀 내켜하는 것 같지 않으나, 하오문의 대표라는 직함을 건 이상 체면이 걸린 문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고민 속에서 하룻밤이 지났다. 언미희는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이벽에게 대련 연습을 부탁해왔다.
물론 어려울 건 없다.
이벽은 흔쾌히 응했다.
이튿날, 초저녁 무렵 두 사람은 고용인의 안내를 통해 인근 연무장의 단독 사용을 허가받았다. 그리고.
타앗, 채앵!
언미희가 다시 거리를 좁혔다.
검과 권갑이 어우러졌다. 이벽으로서는 그녀의 무공을 제대로 견식하는 것은 처음이다.
퍽 신선했다.
온갖 병기를 다루는 이들이 가득한 강호 무림에서 순수한 권법가를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아니, 권법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특이한 형태의 권갑을 착용하고 있으나 그녀의 무기는 단순히 두 주먹뿐만이 아니었다.
팔꿈치와 무릎, 다리와 발에 이르기까지. 작은 몸 안에 놀라울 만큼 많은 공격수단을 갖추고 있다.
권갑을 제외한 부위가 검과 직접 부딪히는 것만은 피하고 있지만, 아마도 특수한 기공으로 신체의 강도를 끌어올린 듯했다.
후욱!
발끝이 이벽의 턱을 스쳤다.
초식과 초식의 연계는 부드럽고 이음새를 찾기 어렵다.
터엉!
그러나 이벽의 검 역시 견고했다.
초식의 다채로움으로는 천하의 어떤 공부 앞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것이 선우세가의 검이다.
발검과 회검.
직, 쾌, 강. 그리고 곡, 변, 유.
뽑히고 회수되는 검에서 청강검식 특유의 여섯 개의 무리가 흐드러졌다.
그에 뒤질세라 언미희의 몸이 춤을 추었다. 변칙과 변칙이 부딪히며 서로의 빈틈을 찾아 헤맨다.
타앙! 탕, 타앙!
이벽은 내심 놀라움을 느꼈다.
마음껏 청강검식을 펼치고 있음에도 보다 신중해진 언미희의 연계는 쉬이 무너지지 않는다.
언미희는 가전무공을 익혔다고 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공부를 지닌 가문이 그리 흔할 리는 없다.
“헉, 허억……!”
이후 한동안 공세와 수세를 구분하기 어려운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이내 언미희의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반면 이벽은 지치지 않는다.
검을 휘두르는 도중에도 선천의 힘은 이벽의 몸 안을 순환하며 실시간으로 내공을 회복했다.
청강유엽검식을 쓰지 않는 이상, 청강검식만으로는 내력이 소모되고 있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이내 서서히 언미희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초식 사이의 미세한 틈이 드러난다.
“큭!”
타앗!
다음 순간, 이대로는 승산이 없음을 인지한 언미희가 급격히 자세를 낮추었다.
치이익.
회전하며 다리로 땅을 쓸었다.
타앗, 이벽이 가볍게 뛰어올랐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언미희의 몸이 다시 솟구쳐올랐다.
콰아아!
두 팔이 위로 뻗어졌다.
교차하며 회전을 만들어낸다.
두 주먹에 실린 강맹한 기세가 치솟으며 금방이라도 이벽을 꿰뚫어버릴 듯했다.
“…….”
후욱.
이벽은 검을 아래로 향했다.
발검식, 강의 묘리를 담는다.
터엉.
무게를 실은 검과 권갑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이벽은 반탄력을 받아들이며 일보 뒤로 물러났다.
탁, 가볍게 착지했다.
풀썩.
반면 언미희는 무릎을 굽혔다.
“컥. 아야야…….”
마침내 주저앉고 말았다. 작은 어깨가 웅크려졌다.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두 팔이 바르르 떨렸다.
“소저, 괜찮소?”
“앗, 네! 잠, 잠깐만 쉴게요……!”
이벽은 내심 감탄했다.
비록 청강유엽검식을 꺼내지는 않았을지언정, 그렇다고 해서 청강검식을 펼침에 있어 손속의 사정을 두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언미희가 이벽에 대해 놀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자는… 정말 강하시군요.”
“…….”
“아하하, 이길 수 없으리란 건 알고 있었지만. 한 번 정도는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언미희가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
언미희는 약하지 않다.
과거, 선우벽은 세가의 수재로서 추앙받던 인재였다.
그러나 그때의 자신이 지금의 언미희와 싸웠더라면 섣불리 승리를 장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같은 나이임을 생각한다면, 그녀 역시 기재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과연 자신은 어떠한가?
이벽은 정작 지금의 자기 자신이 정말로 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스스로의 힘을 가늠할 수 없다.
낙검진천신공의 깨달음을 통해 선천의 힘을 얻은 뒤, 이벽은 진일보했다.
검을 다루는 것도, 기를 다루는 것도 분명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능숙해졌다.
마침내 절정고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검강을 성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벽은 인상을 찌푸렸다.
요 며칠간 그를 괴롭히던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산적을 벤 뒤, 이벽은 살심이란 화두에 발목을 붙들리고 말았다.
제아무리 비무에서 강하다고 한들 실전에서 그 힘을 온전히 끌어낼 수 없다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살심을 다루고자 하면 도에 바탕을 둔 자신의 검은 자연스러움을 잃었다.
‘…뿐만이 아니다.’
이벽은 접객당에서의 일화를 떠올렸다. 흑천방 측의 후기지수가 공연히 시비를 걸어오자 불쑥, 살심이 치솟았다.
돌이켜보면 이상한 감각이었다.
그리 대단치도 않은 도발이었음에도 이벽은 순간 너무 쉽게 평정을 잃었다.
때마침 공손수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이벽은 그 자리에서 검을 뽑지 않았으리란 자신이 없었다.
잠깐에 불과했지만, 다루고자 하는 것에 오히려 사로잡혔다.
타앗!
“이야앗, 빈틈!!”
그때였다. 돌연 언미희가 땅을 박차며 온몸을 집어던지듯 달려들었다. 막무가내로 주먹이 뻗어졌다.
태앵!
이벽의 검이 반사적으로 휘둘러졌다. 그러나 검과 권갑이 부딪힌 순간, 언미희의 팔이 허무하게 바깥쪽으로 튕겨 나갔다.
애초에 제대로 힘이 실린 일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벽은 오히려 당황했다.
언미희의 몸이 아무런 초식도 펼치지 않은 채 그저 막무가내의 모양으로 이벽에게 날아들었다.
여기서 다시 검을 휘둘렀다간 자칫 크게 다칠 수 있다. 이벽의 검이 주춤했다. 언미희를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 언미희의 얼굴이 훅 가까이 다가왔다.
이내 숨결이 닿을 만큼의 지척에서, 언미희가 속삭였다.
“핫하, 넋을 놓다니 방심하셨군요, 공자! 제가 무릎을 꿇은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지요!”
언미희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다시 앞으로.
“딱 한 대, 받아 갑니다!”
빠악!
이마와 이마가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