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0)
30화. 사패련 (2)
이벽과 언미희는 일부러 시간을 두고 한발 늦게 접객당으로 향했다.
두 사람 모두 연회 같은 것에는 딱히 관심이 없을뿐더러, 타 문파의 제자들과 얽히는 것도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당히 식사를 마친 뒤 눈치껏 빠져나올 요량이었다.
그러나.
웅성웅성.
예상외로 접객당의 식당 내부는 전혀 한산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창 술자리가 무르익고 있는 듯했다.
“맹 소협! 내 소협의 높은 이름을 멀리서 듣기만 했는데 오늘 이렇게 뵙고 나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자자, 파 형! 제 술도 한 잔 받아주시지요! 앞으로는 이 아우가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
출입문과 죽 이어진 중앙 통로.
그 양측으로는 언뜻 보기에도 수십에 이르는 사파의 제자들이 탁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약관 전후의 어린 제자들.
살짝 넋이 나간 이벽과 언미희가 무심코 중앙의 통로를 가로지르자 하나둘 양측의 시선들이 쏠리기 시작한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요.”
언미희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벽도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지금 이곳은 단순히 소란스럽기만 한 게 아니다.
두 사람이 선 통로를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져서 모인 제자들은 명백히 서로 부류가 나누어져 있다.
양측의 제자들 사이에서는 대화나 교류는커녕 적대적인 기류마저 흐른다.
“실례하오만! 지금 들어오신 두 소협께오선 어디서 오신 분들이시오?!”
그때,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양쪽에서 쏠리는 시선들의 의미는 명확하다.
피아식별을 원하는 것이다.
“…하오문의 언미희라고 합니다.”
언미희가 나서서 말을 받았다.
웅성, 그리고 작은 파문이 양측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오문은 사패련을 대표하는 네 개의 세력인 사대세력에는 들지 않는다.
허나 그것은 하오문의 이름이 지니는 무게가 나머지 네 개의 세력보다 못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정파무림의 개방과 쌍벽을 이루는 중원 최고의 정보력.
거기에 더해 현 하오문주의 등극 이후로는 수호대라는 이름의 비밀스런 무력마저 갖추게 되었음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하오문이 사대세력에 들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무림 안팎에 반쯤씩 걸친 집단으로서 무림세력인 사패련에 소속되지 않은 채, ‘동맹’의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하오문이라.”
그때였다.
내력을 담은 목소리가 담담하게 울려 퍼졌다. 좌측 무리의 중심에 앉은 냉막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그렇다면 광동에서부터 올라오신 겐가? 먼 걸음하셨군 그래. 이리 와서 같이 식사라도 드는 게 어떻소?”
언미희는 얼른 상대를 살폈다.
검은 구름이 새겨진 백색 무복은 사패련을 대표하는 사대세력 중 하나인 흑천방(黑天幇)을 상징한다.
“케케케! 저쪽보단 이쪽 밥이 더 맛있을걸? 저런 속 시커먼 놈들이랑 겸상해봤자 어디 무서워서 밥이 넘어가겠나? 앙?”
질 수 없다는 듯, 우측에서 경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미희는 시선을 돌렸다.
정중앙의 청년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무리는 사뭇 까무잡잡한 피부색을 지니고 있었다.
정황을 보건대 마찬가지로 사패련의 사대세력 중 하나인 해남검파(海南劍派)일 것이다.
웅성웅성.
시선들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윽, 언미희가 조금 창백해졌다.
이벽은 상황을 이해했다. 자리에 앉는 순간 같은 부류로 인식될 것이다.
즉, 선택을 요구하는 것.
‘…성가시군.’
이벽은 생각했다.
애초에 자신은 일개 호위일 뿐, 하오문을 대표할 만한 입장도 뭣도 아니다.
하지만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와서 돌아서기도 애매한 것은 매한가지.
그때, 이벽은 정면 저만치의 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탁자 하나를 발견했다.
그곳에 앉은 인영은 일련의 소란 속에서도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다는 듯 홀로 묵묵히 식사를 이어가고 있다.
저벅저벅.
이벽이 걷기 시작했다.
좌우 어느 쪽도 돌아보지 않은 채 정면으로 향했다. 언미희가 얼떨결에 뒤를 따랐다.
이내 예의 탁자 앞에 섰다. 이벽이 다가서자 그곳에 앉아 있던 인영이 고개를 들었다.
“…….”
상대는 여인이었다.
이벽과 엇비슷해 보이는 나이대.
나른한 인상이지만, 이벽이 다가서자 고운 아미를 찌푸린 채 은근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동석해도 되겠소?”
“…왜 하필?”
“자리가 비니까. 보아하니 식사도 거의 끝난 것 같은데?”
“쳇, 그건 그렇네.”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는 듯 여인이 혀를 찼다. 이벽은 즉시 의자를 빼서 앉았다.
무심코 이벽을 쫓아온 언미희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따라 앉았다.
“이벽이라 한다.”
“하오문의 언미희입니다.”
상대가 반말을 사용했으므로 이벽 역시 반말을 던졌다. 여인의 얼굴이 소태를 씹은 듯 찌푸려졌다.
“…암영각의 공손수. 딱히 돈독해질 마음도 없으니 기억은 안 해도 상관없어.”
움찔.
언미희의 어깨가 작게 흔들렸다.
암영각(暗影閣)은 흑천방, 해남검파와 마찬가지로 사패련의 사대세력 중 하나로 손꼽히는 세력 중 하나였다.
웅성웅성.
소란이 커졌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고용인들이 재빠르게 다가와 탁자 위로 이벽과 언미희 몫의 음식을 차렸다.
“하!”
그때 누군가가 코웃음을 쳤다. 최초 동석을 권했던 흑천방의 제자였다.
“하오문의 소협들께서 앉을 자리를 헷갈린 모양이군. 부디 그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기를 바라지.”
“킬킬킬, 뭐, 저쪽만 아니면 상관없기는 해. 어두침침한 녀석들끼리 통하는 게 있나 봐?”
“…….”
이벽은 수저를 들었다.
주변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건 딱히 와닿지는 않는다. 묵묵히 식사를 시작했다.
공손수는 상관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벽 쪽으로 향한 채 찻잔을 홀짝거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내 이벽과 언미희에게 쏠렸던 주변의 관심이 서서히 멀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문득 공손수가 말했다.
시선을 외면한 채 혼잣말처럼 꺼낸 말이지만, 물론 이벽들에게 하는 말일 테다.
“저기, 너희 하오문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붙어먹을 곳을 고르는 거라면 잘못 짚었거든? 난 귀찮은 건 딱 질색—”
“나야말로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밥 먹는데 무슨 꿍꿍이가 필요한가?”
“…뭐?”
공손수의 시선이 이벽을 향했다.
말문이 막힌 듯, 살짝 벌어진 입으로 이벽을 노려보다가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건지 멍청한 척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아니, 아니지. 천하의 하오문이 멍청할 리는 없지.”
탁,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공손수의 눈이 이벽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나른하지만 서늘한 시선이 이벽의 낯을 향한다.
“똑바로 말해. 노리는 게 뭐니? 약해빠져서 뭐라도 숨기고 있는 척 무게 잡는 거 별로 안 멋있거든?”
“식사는 끝났나? 그럼 남은 건 대신 받아 가지.”
덥석, 이벽의 젓가락이 공손수의 앞에 놓인 전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입으로 밀어 넣었다.
“…….”
쿡쿡.
그때, 언미희가 다급하게 옆구리를 찔렀다. 이벽은 고개를 들었다. 공손수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걸 발견했다.
“이런, 마지막으로 아껴두고 있었나? 미안하군. 가서 내가 더 달라고 부탁을 해보도록 하지.”
“…혹시 죽고 싶니?”
“…….”
아닌가.
이벽은 생각했다.
이렇다 할 의도가 없는 행동에 왜 이렇게 날선 반응이 돌아오는가.
하지만 아무래도 이 여자에겐 합석에 대한 더 많은 이유가 필요한 것 같다.
이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흑천방과 해남검파를 위시한 좌우의 두 무리는 보란 듯이 서로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
“좀 한심하게 보이는군.”
흠칫, 공손수의 표정이 흔들렸다.
“여기 있는 모두, 사패련의 소속으로서 자신의 문파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왜 편을 가르고 있는지 의미를 모르겠다.”
“…어처구니가 없네.”
말의 진의를 확인하듯 공손수가 한동안 이벽을 바라보았다. 이벽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짜로 그냥 멍청한 거였구나.”
“…….”
하아. 공손수가 작게 한숨 쉬었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킨 뒤 내려놓았다.
“하지만 뭐, 틀린 말은 아니네. 이놈이고 저놈이고 뇌까지 근육이 들어차서는 힘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야.”
“…….”
“그치만 말야. 이 바닥에서 너같이 실력도 없으면서 곱상한 녀석이 잘난 척 해봤자 엉덩이에 칼이나 안 박히면 다행이란다.”
시선이 언미희를 향했다.
“하오문에서 네 지위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친구 믿고 나불대는 거라면 퍽 한심하네.”
움찔, 슬슬 눈치를 보며 조용히 식사를 이어가고 있던 언미희의 어깨가 다시 흔들렸다.
이벽은 말뜻을 생각했다.
낙검진천신공의 단점 아닌 단점이라면, 평상시의 이벽에게는 내공이 없으므로 기세 또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형편없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굳이 반박은 하지 않았다. 제갈소미가 말했듯, 가진 실력을 드러내지 않는 건 오히려 필요한 일이다.
“뭐, 아무쪼록 뒤태 간수 잘해.”
슥, 공손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흘끗거리는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통로 중앙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이내 식당 문을 나섰다.
이벽은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여린 외모와는 달리 입담은 지저분하다.
사파는 사파인가.
좌우간 이벽의 시선이 다시 식탁으로 향했다. 식사를 마저 잇는다. 아니, 이으려고 했다.
“…….”
어느새 식탁은 퍽 허전해져 있다.
특히 절반 이상 남아있던 과포육이 모조리 자취를 감추었다.
이벽은 언미희를 돌아보았다. 언미희는 시선을 외면했다.
“바…밥이 맛있네요.”
“…그렇군.”
남은 음식을 마저 비운 뒤, 두 사람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손수와 마찬가지로 식당을 뜨려 했다.
통.
“어이, 하오문도.”
그때였다.
중앙을 가로지르던 이벽의 발치에 어디선가 빈 술병이 날아들었다. 데구르르 구른다.
“술이 떨어졌는데 술 좀 받아다 주시겠소?”
“…….”
이벽이 시선을 향했다.
좌측의 흑천방 쪽에 앉은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이벽과 시선이 마주치자 능글능글 웃는다.
“뭘, 어차피 하오문이래봤자 본래 점소이에 기녀들 아닌가? 본분에 맞는 일이 아니오?”
“파하핫! 모 형! 퍽 재치있구려!”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무리들이 저들끼리 킬킬대기 시작했다.
‘굳이 상대할 필요는 없겠지.’
통, 이벽은 술병을 걷어차서 치워냈다. 그리고 다시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 했다.
타앙!
묵직한 충돌음이 장내를 울렸다.
일순 모두의 시선이 진원지로 향했다. 발을 구른 이는 처음 이벽에게 합석을 제안했던 흑천방의 사내였다.
“슬슬 참아주기 힘들군, 그래.”
“…….”
“이쯤 되면 궁금해질 정도야. 대체 뭘 믿고서 그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거지? 하오문이 근래에 제법 세가 올랐다 하여 근본을 잊은 모양인데.”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냉막한 시선이 이벽을 향했다.
“참 이상한 일이야. 시장바닥에서 설설 기면서 천대받던 것들이 어디서 고수 몇 명 불러다 앉혀놨다고 허리가 꼿꼿해진다는 게.”
“…….”
“선택해라. 네가 이 탁자의 모두에게 술을 한 잔 따르거나, 아니면 그쪽 소저께서 춤으로 여흥을 돋궈주는 것도 괜찮겠군.”
“킬킬킬, 거 고약하기는.”
일순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해남검파 쪽의 사내가 말했다.
“자자, 저쪽 보지 마. 깡패 새끼들이랑 눈 마주치면 삼대가 재수 없다. 우리는 상관없으니 술이나 마시자고~”
“…….”
이벽은 소란을 원하지는 않는다.
경거망동할 처지 또한 아니다.
하지만.
이벽은 언미희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두 주먹이 꾹 말아쥐어져 있다.
그녀는 무인이다. 하오문도라 한들 다짜고짜 기녀 취급을 받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저벅저벅.
이벽은 흑천방 쪽으로 다가섰다. 처음 술병을 던진 사내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뭐? 내게 불만이라도 있소?”
이벽은 흑천방과 그 주변의 무리를 죽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기세가 등등하다.
하지만 이벽이 판단하기에 언미희와 싸워 해볼만 한 상대는 잘해봐야 한두 명 정도에 불과하다.
‘…한심하군.’
히죽 웃는 상대를 바라본다.
칼을 뽑으면, 저 웃음이 얼굴에서 채 지워지기도 전에 목을 베어낼 수 있을 것이다.
불쑥, 살심이 치솟았다.
이벽의 손이 검 손잡이에 닿았다.
쐐액!
그때였다.
어딘가에서 암기가 날아들었다. 암기는 이벽의 어깨 위를 지나 웃고 있는 상대의 뺨을 스쳤다.
패앵, 암기는 흑천방 무리를 가로질러 벽에 틀어박혔다. 파르르르, 끝이 흔들린다.
암기의 정체는 젓가락이었다.
“에휴,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벽은 뒤를 돌아보았다.
식당의 문 쪽에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부여잡은 공손수가 서 있었다.
“귀찮지만 뭐, 이대로 가면 뒷맛이 찜찜할 것 같으니 한 번만 구해줄게. 딱 한 번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