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49)
49화. 무적파 (3)
“그냥 도망치는 게 상책이에요.”
“…….”
공손수가 말했다.
“호남이 최근 위태로워졌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무언가 암묵적인 거래가 오고 가지 않은 이상 정파놈들이 감히 이렇게 행동할 수 있을 리 없어요.”
“…거래?”
“네, 아마도 흑천방이겠죠. 정파 놈들 입장에선 본인들이 전면에 나서도 사패련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 이런 짓을 저지른 거예요.”
“…….”
“이곳 회화뿐만이 아니에요. 아마도 지금쯤 호남 무림 전체에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을까요?”
어둠이 내렸다.
무적파의 제자들은 다친 몸을 부지런히 놀리며 밥을 지었고, 부상자들을 먹였다.
풍전등화 같은 입장에 전력도 안 되는 이들을 무작정 받아들인 건 어리석은 행동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파 구성원들이 볼모로 잡혔다고 하더군요. 죽이지 않았다는 건… 전쟁을 하자는 게 아닌 이상 달리 노리는 게 있다는 뜻이겠죠?”
“…….”
“우선 호남무림을 남김없이 점령한 뒤 협상 같은 걸 할 생각인가 본데… 사파 측 대표로 흑천방이 나선다면 어차피 눈 가리고 아웅이겠죠.”
이벽은 공손수를 돌아보았다.
중앙에 피워놓은 불빛에 비친 공손수의 표정에는 무언가 말하지 못한 꺼림칙함이 감돌고 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우리와 관계가 있나?”
“…없다고는 못하겠네요.”
저만치 부상자들의 틈바구니 속에 섞여 파진성이 게걸스레 밥을 먹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든다.
“우리 계획을 순순히 두고만 보진 않으리라곤 당연히 예상했지만… 아예 호남의 주도권을 통째로 정파에 넘겨버릴 생각을 하다니. 굉장하네요, 흑천방.”
“…….”
“패왕가가 문을 닫았다곤 해도 사패련주께서 엄연히 건재하시는데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과감함에 놀랄 정도예요.”
하아, 공손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공손수의 시선이 대문을 향했다.
“아마도 곧 쳐들어오겠죠.”
“그렇군.”
“지금쯤이면 우리가 누구인지 대강 알았을 테고, 호남무림의 사적인 문제에 어찌 제삼자가 개입하느냐며 바득바득 억지를 부릴 거예요.”
“…….”
“다시 말씀드리지만, 도망치는 게 최선이겠죠. 무려 점창씩이나 되는 이들이 호락호락할 리는 없으니까요. 아쉽지만 호남세력은 이쯤에서 포기하고 일찌감치 다른 지역의 사파들을 찾아가는 게 백 번 나아요.”
이벽은 불빛에 비쳐 번들거리는 부상자들의 왁자한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이 터전을 빼앗기고 동문들을 볼모로 잡힌 것에 대한 책임이 자신들에게 아예 없지는 않다.
힘이 없으면 모르되, 그렇지는 않다.
“도망치지 않는다면?”
“뭐, 맞서 싸워야겠죠?”
공손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흑천방이 계산하지 못한 게 있다면 물론 오라버니의 실력이겠죠. 기껏해야 맹우강보다 위라는 것만 알았겠지, 설마 절정의 벽을 넘었으리라고는 생각이나 했겠어요?”
“…….”
“하지만 아시다시피 무림에서 자신의 실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건 가급적 피해야 하는 일이죠. 그러니 도망치는 게 더 상책이지요.”
“그렇군.”
“하지만 안 도망치실 거죠?”
공손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럭저럭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며 말로 꺼내지 않은 것들이 전달되기 시작한다.
“아무쪼록 언니 쪽 이야기가 잘 풀렸으면 좋겠는데… 뭐, 믿고 기다려봐야겠죠.”
“…….”
“그럼 푹 쉬세요, 오라버니. 죄송하지만, 아마도 실제로 싸우는 건 오라버니 혼자의 몫이 될 테니까요.”
“…알겠다.”
“기왕에 싸울 거라면, 저들의 희망이 되어주어야겠죠. 자고로 난세에 영웅이 나오는 법이 아니겠어요?”
훅, 공손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벽의 뺨에 입술이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언니가 없는 틈을 타서 새치기.”
“…….”
이벽이 미간을 찌푸리며 뺨을 닦아내었다.
피식, 공손수가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진성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 부상자들의 틈바구니 속에 섞여들었다.
그렇게 밤이 저물었다.
그리고 이튿날 날이 밝은 직후, 공손수가 예상했던 그대로의 일이 벌어졌다.
* * *
쩌억, 콰앙—!!
대각선으로 갈라진 무적파의 정문이 굉음과 함께 쓰러졌다.
그 뒤로 일단의 무리들이 우르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검문의 일행들이었다.
“핫하하, 이 쥐새끼 같은 사파놈들아!! 마침내 때가 왔다!! 순순히 나와서 무릎을 꿇고… 응?”
맨 앞에 나서서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던 대제자 장막수는 안쪽의 풍경을 보고서 당황한 소리를 내었다.
엉망진창 박살이 난 사파의 떨거지들이 최후의 발악을 준비하고 있으리란 예상과는 달리 마당은 깨끗이 비어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예의 떨거지들은 멀찍이 거리를 벌리고서 떨어져 있다.
전투를 치르려는 태세가 아니다.
그리고 텅 빈 중앙에는 단 한 명의 인영만이 서 있었다. 못 보던 얼굴이었다.
“누, 누구……?”
“이해할 수 없군. 잠가두지도 않은 문을 왜 굳이 부수고 그러나?”
“…….”
인영이 태연하게 말했다.
일순 장막수는 말문이 막혔다.
기선을 제압하려 했는데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다음 순간 자신이 말을 가로막혔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이런 건방진—!”
대뜸 칼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가 장막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스승이자 정검문의 문주인 양호명이었다.
“실례했군. 나는 정검문주 양호명이라 하네. 동도들 사이에선 부끄럽지만 관일검(貫日劍)이란 허명으로도 불리고 있지. 자네는 누구인가?”
“…이벽이라 하오. 사패련 비룡대의 대주를 맡고 있소.”
꾸벅, 이벽은 가볍게 목례했다.
“사문을 밝히지 않는다…? 뭐 상관은 없네. 보아하니 자네가 바로 그 사패련의 비무회에서 주목을 받았다던 후기지수인가보군.”
“…….”
현재, 이벽은 일부러 기세를 정제하여 바깥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내공을 저장하지 않는 낙검진천신공의 특성상 평소의 이벽은 일반인과 다를 바 없지만, 지금은 자신을 드러내야 할 때이기 때문.
물론 가진 것의 전부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양호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렇게 직접 보니 납득이 가는군. 사파의 제자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의 정순한 기운이야. 하지만 어찌 그 정도의 재능을 옳지 못한 곳에 쓰는 거지?”
“부끄러운 짓을 한 기억은 없소만.”
“그런가? 허나 내가 듣기로는 자네와 자네의 일행이 우리 정검문의 제자들을 핍박했다 하던데.”
우당탕!
“양호명 이 개자식아!! 어디서 개소릴 지껄이느냐!! 가만히 있던 우리를 먼저 공격한 건 잘난 네놈들이 아니더냐!!”
“이 비열한 새끼들아!!”
그때,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파 측 제자들이 일제히 땅을 박차며 목소리를 높였다.
챙챙!
정검문의 제자들이 마주 으르렁대며 칼을 꺼냈다. 이내 공간은 긴장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그 중심에 선 양호명과 이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글쎄, 과연 어느 쪽이 어느 쪽을 핍박한 건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군.”
“그야 그럴 테지. 명색이 사패련 소속이니 팔은 안으로 굽는 게 당연해.”
“…….”
“그러나 이 사태의 원인을 따지자면, 맨 처음 우리 쪽 제자들이 습격을 당한 게 먼저라네. 아니, 우리 정검문만의 일이 아냐. 이 호남땅에 있는 정도의 제자들이 정체불명의 세력들에 의해 일시에 습격을 당했지.”
“…그 습격을 저지른 정체불명의 세력이 사파라는 증거는 있소?”
“하! 사파가 아니라면 누구의 짓이란 말인가? 오십여 년 전 중원을 뜬 마교? 아니면 산적들?”
“…….”
대화는 통하지 않는다.
물론, 애시당초 이벽도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이벽은 이야기를 틀었다.
“그래서 무얼 하러 오셨소?”
“…뭐라?”
“보시다시피 이 안에 있는 것은 부상자들 뿐이오. 패배를 인정하라면 순순히 인정하겠소. 허나 만약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면, 더 잃을 게 없으니 싸워야만 하겠군.”
“뭐? 하하하!”
일순 양호명이 기가 찬 듯 웃음을 터뜨렸다. 소탈한 웃음이 긴장으로 가득 찬 장내를 훑고 지나갔다.
후욱!
그리고 기운이 내뿜어졌다.
이벽은 가볍게 몸을 긴장시켰다.
강호무림에서 관일검 양호명의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본디 점창의 속가제자 출신이었으나 일류의 벽을 넘어 절정에 다다르고 정식제자의 위계에 편입된 입지전적인 인물이 바로 그였다.
“퍽 방자하군, 그래. 기세가 제법인 것은 인정하겠다만, 그래서 자네가 직접 나와 한 번 겨뤄보겠다는 건가?”
“무, 문주님! 저딴 듣도 보도 못한 녀석이 건방 떠는 것을 어찌 일일이 받아주려 하십니까!”
그때, 장막수가 나섰다.
하늘 같은 그의 스승이 먼저 이름을 밝힌 것도 모자라 어쩐지 저 빌어먹을 놈을 인정해주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불쾌했다.
채앵!
“네 이놈!! 잔말 말고 칼을 꺼내라! 그 계집은 어디 있지?! 내 어제는 방심했다만 오늘에야말로 한꺼번에—”
“쯧, 어리석기는.”
양호명이 장막수를 끌어당겼다.
“물러서거라. 감히 네가 상대할 아이가 아니니까. 아직도 상대의 실력을 보는 눈도 없어서야 쓰겠느냐?”
“하, 하지만! 제자가 결코……!”
“시끄럽다!”
장막수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러나 양호명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벽을 향해 있었다. 이벽이 썩 맘에 드는 듯했다.
아닌 게 아니라 양호명은 이벽이 마음에 들었다.
혼자서 자신들을 막아서겠다는 패기도 마음에 들었고, 풍기는 기세로 미루어보아 만용을 부릴 만한 자격 정도는 있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어째서 사파에 몸을 담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품은 기운의 정순함은 오히려 도가에 가까웠다.
“하지만 난처하군. 만일 내가 직접 손을 쓴다면 후기지수를 핍박했다 손가락질을 받을 거고, 우리 제자들은 자네를 상대하기엔 모자란 것 같아.”
“…….”
“그래, 자네 생각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보는 눈이 많다.
그리고 정파는 보이는 모양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집단이다.
이벽이 홀로 나선다면, 무작정 머릿수로 밀어붙일 가능성은 비교적 희박하다.
퍽 다행히도 여기까지는 공손수의 예측대로 진행되었다.
이벽이 준비한 말을 꺼내려던 그때였다.
저벅.
“그렇다면 이 자리는 저희가 맡도록 하지요. 사숙.”
정검문도의 무리들 가장 뒤쪽에서 두 명의 사내가 전면으로 걸어 나왔다.
그것은 이벽이 바라던 바였다. 고로 이벽은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 그래 주겠나?”
대제자 장막수를 막아선 양호명도 굳이 그들의 앞을 막아서진 않았다.
두 사람이 이벽을 마주했다.
“반갑군, 그래. 나는 점창의 삼대제자 창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쪽은 내 사제인 창성.”
“…이벽이다.”
“하핫, 듣자 하니 사파무림의 후기지수 중에서 네가 제일 강하다지? 그렇다면 너를 꺾으면 사파를 꺾게 되는 셈인가?”
하잘 것 없는 도발.
이벽은 굳이 응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시선을 양호명에게로 향했다.
“음, 그래. 내 약속하지. 자네가 그 아이들 중 하나를 꺾는다면, 내 이 자리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순순히 물러나 주겠네.”
“…배려에 감사하오.”
“하하! 별 소릴 다 하는군! 미안하지만 자네가 이길 일은 결코 없을 거야. 다만 건투를 빌도록 하지.”
양호명이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의 실력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는 듯했다.
혹은 대 점창의 제자가 사파의 후기지수 따위에게 꺾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이벽의 앞에 선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나쁘지 않았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사형보다는 오히려 잠자코 있는 사제 쪽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는 것 정도일까.
“자, 그럼 어디 실력 좀 볼까?”
그때, 스스로를 창명이라 소개한 사형 쪽이 당연하다는 듯 먼저 앞으로 나섰다.
“…괜찮겠나?”
“응? 무슨 말이지?”
“이쪽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너보다는 네 사제 쪽이 좀 더 강한 것 같은데. 네가 나선다면 승부가 끝난 후에 뒷말이 나오지 않겠나?”
“…….”
일순 창명이 멍한 얼굴을 했다.
이내 서서히 미간이 찌푸려진다.
채앵!
“이 새끼가 건방진 소릴!”
타앗, 검을 뽑아 듬과 동시에 창명이 땅을 박찼다. 신형이 이벽에게로 쇄도했다.
50. 무적파 (4)
채앵!
창명의 신형이 지척까지 도달한 순간 이벽의 검이 마침내 검집에서 꺼내어졌다.
두 검이 맞부딪혔다.
“헹, 검 좀 쓸 줄 안다 이거지? 어디 한 번 점창의 검 앞에서도 건방을 떨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볼까?”
드드드드!
다음 순간, 맞부딪힌 창명의 검이 가볍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동은 순식간에 거세어졌다.
이벽의 검이 함께 흔들렸다.
타앙!
진동이 이벽의 검을 밀쳐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창명의 주위에 옅은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검신의 진동이 대기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공기가 모여들며 단단한 층을 형성했다.
“받아봐라. 급풍쾌검(急風快劍).”
콰앙!
모여들던 바람이 폭발했다.
기류 속에서 창명의 검이 폭풍 속에 휘말린 풀잎 한 가닥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챙, 챙챙!
그러나 물론 검은 풀잎이 아니다.
내력을 품은 날카로운 쇠붙이가 풀잎처럼 어지럽게 허공을 수 놓고 있는 것이다.
“…….”
불규칙성 속의 규칙성.
분명히 훌륭한 검술이다.
하지만… 이벽은 문득 과거, 회택의 장시 거리에서 있었던 청성의 제자와의 일전을 떠올렸다.
도가 계통의 검공으로 바람의 불규칙한 움직임을 담은 것도 흡사했다.
그 당시 아직 낙검진천신공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던 이벽은 선천의 힘을 쥐어짜 단 한 번의 초식을 펼쳤다.
청강유엽검식 회검제삼식, 유검.
그리고 그 대가로 이벽은 모든 기력을 잃고 탈진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순간, 분명 자신의 목검이 상대의 검을 넘어서서 상처를 입혔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즉, 파훼하는 것에 성공했다.
챙, 채앵!
“핫하! 그래, 제법이구나! 그렇게 나와줘야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보자꾸나!”
“…….”
난처하군.
방어에 치중하며 이벽은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마음만 먹으면 쓰러뜨릴 수 있다.
물론 청강유엽검식을 펼치기 위해선 상대의 그만한 빈틈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자만과 방심에 빠져 있는 상대에게서 청강검식을 통해 빈틈을 열어내는 건 손바닥을 뒤집듯 쉬운 일이다.
다만, 공손수는 만일을 생각해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벽으로서도 현재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상대하고 있는 이가 아닌 정검문주 양호명이다.
무엇보다 이대로 너무 쉽게 승부를 낸다면, 방심을 했다는 둥 지저분한 뒷말이 나올 것 같다.
채앵, 챙! 챙!
“…하, 하핫! 그래그래! 과연 그 정도는 되어야 사파제일이라 할 만하지!”
“…….”
이벽은 청강유엽검식을 펼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몰아치는 창명의 검을 하나하나 걷어내며 동시에 그 움직임을 침착하게 뜯어보았다.
상대의 강함과 약함을 떠나 찾고자 마음먹으면 모든 상대에게서 배울 점은 있다.
자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상대의 검은 쾌의 묘리와 변의 묘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숙련이 모자란 듯 두 무리가 서로 완전히 어우러지지 못했다.
폭풍 속에서 자신의 검이 흐르는 방향을 통제하지 못하고, 모처럼의 기세는 종종 엉뚱한 곳으로 새어 나간다.
이벽은 문득 파진성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싸운다면 퍽 좋은 승부가 될 것이다. 비슷한 수준이라면, 비슷한 방식으로 상대해볼까.
후욱!
이벽은 청강검식을 펼쳤다.
발검식 쾌의 묘리와 회검식 변의 묘리가 교차한다.
콰앙—!
“아, 아닛?!”
처음으로 이벽이 공세에 나서자 창명이 당황한 소리를 내었다. 불현듯 속도와 변화를 따라 잡히기 시작했다.
챙! 챙챙!
“…큭! 어딜 삿된 짓거리를!!”
창명은 더욱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다시 수십 합이 이어졌다.
그것은 검에 대한 문외한이 본다면 마치 두 사람이 같은 검법을 펼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물론, 검의 절정고수인 양호명의 눈에는 전혀 다른 것이 보이고 있었다.
“…….”
양호명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벽이라고 하는 저 사파의 제자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 강했다.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 순간, 놈은 숨겨둔 실력을 꺼내며 창명과 박빙의 승부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아니었다.
다시 미묘한 위화감이 감돈다.
‘…정확히 창명이 빠른 만큼만 빠르고, 강한 만큼만 강하다.’
완벽한 동수를 이루고 있다.
창명이 더더욱 힘을 끌어올리면, 다시 그만큼 강해진다.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그것은 승부라기보다는 마치 한참 아래의 경지를 지닌 이에게 ‘지도’를 내리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양호명은 문득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리 정순한 기운을 지녔다 한들 사파의 제자 따위가 점창의 제자를 상대로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
하물며 약관조차 되지 않았다.
무언가 자신조차 눈치채기 어려운, 사이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한 번 의심의 물꼬를 틀기 시작하자 놈의 검 역시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언뜻 도가의 검처럼 깨끗하고 정직해 보였으나, 내실은 비어있었다.
마치 여러 종류의 도가의 검을 겉핥기로 주워 배운 누군가가 억지로 기워놓은 듯한 모양새.
‘…잠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래, 분명히 본 적이 있다.
채앵!
그때였다.
창명과 이벽의 검이 부딪힘을 반복하려던 순간, 또 한 자루의 검이 그사이에 끼어들었다.
승부가 중지되었다.
“그만. 더 이상의 승부는 무의미한 것 같군.”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사형.”
끼어든 검의 주인은 또 한 명의 점창의 제자이자 창명의 사제인 창성이었다.
“아, 아직이다!! 비켜라!!”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의 사형으로선 이 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물러나세요.”
“…큭!”
창명이 무어라 항변하려 했다.
그러나 창성의 가라앉은 눈빛이 창명을 향한 순간, 창명은 입을 닫았다.
“…이건 무슨 의미지?”
“미안하군. 그대의 실력을 얕잡아 본 것에 대해 사과한다. 이후에는 사형을 대신하여 내가 진심으로 상대해주겠다.”
“…….”
이벽이 묻자 창성이 답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정에 어울려줘야 할 이유는 없다. 이벽은 고개를 돌려 양호명을 향했다.
“얘기가 다르지 않소? 둘 중 한 명을 쓰러뜨리면 순순히 물러나 주겠다고 약조했던 것 같소만.”
“…….”
양호명은 인상을 찌푸렸다.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얘기가 다른 건 자네 쪽인 것 같군. 자네는 분명 사패련에 속한 후기지수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소만. 무슨 문제가 있소?”
잠깐의 침묵.
그리고 양호명이 다시 입을 뗐다.
“자네, 혹 선우세가와는 무슨 관계지?”
* *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이벽은 짐짓 태연하게 답했다.
매 순간 선천의 힘은 이벽의 몸 안을 흐르며 청강유엽심공을 유도하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이벽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당황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가? 그럼 다시 한번 묻지. 자네의 사문은 어디인가?”
“운남의 낙검문이라고 하오만.”
“하!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로군. 그렇다면 내 부탁하지. 그 아이를 상대로 낙검문의 무공을 조금만 더 보여주지 않겠나?”
“…내가 어째서 그래야 하오? 정검문주께선 한 입으로 두말을 하시오?”
“부디 이해해 주게. 만에 하나를 대비하기 위해서니까. 이번에는 굳이 이기지 않아도 좋네. 어차피 이기려 한들 이길 수 없을 테니.”
“…….”
이벽은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만한 말은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저만치 멀찍이에 자리한 공손수는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애시당초 그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던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자네가 쓰는 검이 선우세가의 것이 아니라는 것만 충분히 확인된다면, 약속대로 오늘은 이만 순순히 돌아가 주겠네.”
양호명이 선언하듯 말했다.
이벽은 마음속에 위기감이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이 순간 주도권은 상대에게 있다.
만에 하나 양호명이 그저 단 한 순간의 불명예를 무릅쓰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어찌 되었든 전면전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최저의 상황이다.
“…알겠소.”
이벽은 검을 고쳐 쥐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아니, 예상했어야 했다.
—만에 하나 네 무공을 알아보고서 선우세가를 떠올리는 이가 나올 수도 있다고.
앞서 그의 무공을 알아보는 이가 나올 수도 있다고, 제갈소미는 경고했었다.
사저의 충고를 깊이 새겨듣지 않았다. 그리고 정파세력을 상대로 보란 듯이 청강검식을 펼쳤다.
“…….”
이벽은 양호명의 기색을 살폈다. 확신을 가진 것까지는 아닌 듯하다. 하지만…….
“점창의 삼대제자, 창성이다.”
꾸벅, 창성이 포권했다.
이벽은 마주 포권했다.
상대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분명한 것은, 검식을 사용하지 않고 잔재주만으로 제압할 수 있을 만한 상대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선우세가의 무공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벽에게는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그러나 선뜻 선택할 수 없었다.
…도살지도를 쓰고도 마음의 통제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가? 상대를 죽이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은 산적에게 점령당했던 마을을 떠난 이래, 이벽을 사로잡고 있던 화두 중 하나였다.
여정을 통해 비룡대의 일행들과 무수히 많은 비무를 거쳤지만, 차마 그것을 시도해볼 수는 없었다.
목숨은 담보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누군가의 목숨이 사라지고 나서는 돌이킬 수 없다.
“선공을 양보할 셈인가? 그렇다면 사양하지는 않도록 하지.”
그때 창성이 말했다.
타앗, 신형이 빠르게 쏘아졌다.
쏘아지는 것은 몸뿐만이 아니다.
뽑아 든 검이 일 자로 기울여진 채 그 날카로운 끝이 이벽의 가슴팍을 향해 찔러 들어온다.
채앵!
이벽은 막아섰다.
그러나 검의 무게는 묵직했다.
챙, 채앵! 챙!
섬전 같은 찌르기가 이어졌다.
사형제지간임에도 불구하고 창성의 검로는 그의 사형인 창명과는 전혀 달랐다.
파창!
직선의 검은 화살처럼 날카롭고 민첩했다. 섬짓한 빗줄기가 이벽의 검신을 연신 두드려댔다.
사일검법(射日劍法).
지금의 점창을 있게 한 검공으로, 일점의 찌르기를 극한까지 연마하는 강호의 이름 높은 검공이다.
채앵!
이벽은 연신 뒷걸음쳤다.
충격은 강렬했다. 또한 의식적으로 선우세가의 검을 따르려 하지 않자 검로가 뒤엉키기 시작했다.
공격은커녕 방어조차 쉽지 않다.
채앵, 슥!
“이상하군. 사형을 몰아붙이던 기세는 전부 어디로 간 거지? 설마 지친 건가?”
이벽의 뺨에 실선이 그어졌다.
선우세가의 검, 혹은 도살지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 그러나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그때였다.
후우욱, 탓!
누군가가 무적파 바깥의 저 멀리에서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엄청난 기세였다.
삽시간에 무적파의 담장을 넘어선 인영이 마침내 전투의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슥, 이벽의 등 뒤에 섰다.
채앵!
그리고 창성의 검이 가로막혔다.
“…….”
창성의 눈이 치켜 떠졌다.
그의 검 끝이 정체불명의 개입자의 검 끝에 의해 정확히 가로막혀 있었다.
검 끝을 검 끝으로 막는다.
신기에 가까운 검공이다.
아니, 창성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보니 자신의 검을 가로막은 것은 검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자루의 붓이다.
무쇠로 만들어진 붓, 혹은 판관필(判官筆)이라 일컬어지는 무기.
“오호호! 제법 강렬한 찌르기로군요! 당신 같은 사내는 싫어하지 않아요!”
간드러진 목소리.
그러나 여인의 그것은 아니었다.
이벽은 가까이에 선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그에게선 정체 모를 끈적한 향이 느껴졌다.
분칠을 한 듯 얼굴은 새하얗다.
척.
그때, 또 한 명의 인영이 담장을 넘어섰다. 착지와 동시에 땅을 튕기며 이벽의 옆에 얼른 다가섰다.
“괘, 괜찮아요, 공자?! 늦어서 미안해요!”
“…아니, 덕분에 살았소.”
마침내 이벽은 마음을 놓았다.
언미희가 이곳에 있다는 건, 이야기가 잘 풀렸다는 뜻일 테다. 그렇다면 이 사내의 정체는 아마도.
“누구인가?! 썩 정체를 밝혀라!”
그때, 한발 늦게 상황을 이해한 양호명이 일갈했다.
그러나 양호명의 서슬퍼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정체불명의 사내는 한껏 간드러진 웃음을 흘렸다.
“오호호! 소인은 초연서라고 해요. 붓놀림으로 먹고 사는 천하디 천한 환쟁이랍니다. 오호호!”
“…화, 환쟁이?”
“그러믄요! 다만 연약한 소인에게는 세상이 좀 험하다 보니 하오문에 적을 두고 있지요!”
스윽.
스스로를 초연서라 소개한 사내의 왼손이 슬쩍 품속으로 향했다. 패 하나를 꺼내어 이벽에게 드러내 보인 뒤 도로 감추었다.
“…….”
하오문 수호령주.
수호대의 소속을 알리는 물건.
문득 초연서라 자신을 소개한 사내가 이벽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