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86)
89화. 청강일협 (1)
“네가 비룡대주란 애송이더냐?”
“…….”
선우굉이 말했다.
청강일협(淸江一俠) 선우굉.
선우세가의 2대 가주 선우각의 아우로 세가를 대표하는 무력이자 운남지역에서는 퍽 이름이 알려진 절정고수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으나, 소가주 선우벽은 그를 일컬어 ‘숙부’라는 호칭을 사용했었다.
—어서 빨리 저를 베지 않으면 제가 언제 형님을 다시 벨지 모릅니다? 제가 살아있는 한 형님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어요.
악몽이 속삭였다.
미루고 미뤄두었던 고민이 마침내 혈족의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찰나의 순간, 무수한 생각들이 이벽을 스친다.
피할 수는 없다. 허나.
‘이 자리에서 정체를 들킨다면?’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면 과연 상대는… 숙부님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애초에 그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을까?
소가주 선우벽을 가문에서 축출하는 것은 누구의 생각이었으며, 어느 누가 가담을 했고 누가 하지 않았을까?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이벽에게는 이미 끝난 이야기였기에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욱신, 오래전에 아문 등의 상처가 또다시 고통을 호소했다. 일순 호흡이 흐트러졌다.
이벽은 죽립을 눌러썼다.
터벅,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타앙!
“비룡대주! 조금만 버텨주시게! 내 이번에야말로 이 잡놈의 뚝배기를 확실히 깨버릴 터이니!”
“하, 거지 주제에 꿈도 크구나!”
그때, 철면개가 대뜸 팽무옥을 파고들었다. 타구봉과 도가 충돌했다.
분명 나쁘지 않은 판단이다.
상대하기 쉬운 이부터 먼저 쓰러뜨려 버리는 것이 좋으리라는 계산인 듯했다.
물론 그러한 계산에는 이벽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다.
채앵, 챙!
“공손 소저, 조심해요! 위험해지면 내게 붙어요!”
“네, 언니. 생각해 볼…게요!”
등 뒤에서도 충돌음이 일었다.
참마대의 인원들이 주춤주춤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고, 언미희와 공손수가 파진성이 탄 마차를 지키기 위해 분전을 개시했다.
“왜 그러지? 오지 않을 셈이더냐?”
“…….”
으득, 이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몸 안에서 선천의 힘이 일어났다.
마음의 갈피를 놓친 순간, 선천의 힘이 바쁘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속삭인다.
일행이 위험하다.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아니다. 스릉, 이벽은 검을 꺼내 들었다.
‘이 자’를 쓰러뜨리는 것이 지금의 자신의 할 일이며, 잡념을 지운다. 이기는 것만을 생각한다.
타앗, 채앵!
마침내 검과 검이 부딪혔다.
“그래, 제법 단단하구나.”
그리고 선우굉의 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검로는 이벽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익숙한 검이기도 했다.
선우세가의 청강검식.
선우굉의 검 끝에서 발검식과 회검식이 수놓아졌다.
채앵!
누구보다 잘 아는 검이기에 맞상대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이벽은 초식을 숨긴 채 검을 내뻗었다.
타앙!
“호오.”
선우굉의 광대가 흔들렸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물론 그 이유 역시 잘 알고 있다. 선우굉은 전혀 제힘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절정고수다.
일개 후기지수를 상대로 선뜻 진심을 내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벽에게 생각할 시간이 되어주었다.
“…….”
이벽은 승산을 생각했다.
‘세가의 검은… 쓰지 않는다.’
정체와 얽힌 문제뿐만이 아니다.
자신보다 수십 년을 더 갈고닦은 이를 상대로 같은 검로를 꺼내 드는 것은 오만한 짓이다.
이벽은 입장의 차이를 생각했다.
이벽은 물론 선우세가의 검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상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타앙, 탕!
이벽은 짐짓 청강검식의 무리에 말려든 척, 한 발 한 발 물러나기 시작했다.
발검식, 직 쾌 강.
회검식, 곡 변 유.
청강검식은 여섯 개의 무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은 다시 청강유엽검식의 직검, 쾌검, 강검, 곡검, 변검, 유검으로 심화된다.
그러나 선우세가의 모든 무인들이 여섯 개의 무리를 모두 동등한 정도로 익히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개인의 성향이나 자질에 따라 한두 가지에 치우치게 마련이며, 실전에서는 그런 성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챙, 채앵!
수비에 치중하며 이벽은 상대의 검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선우굉의 검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발검식 쾌와 회검식 변.’
유난히 반복되는 두 개의 무리.
과거 선우벽에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벽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다.
챙, 채앵, 챙!
이벽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에 비례하여 선우굉의 검이 점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채앵!
그리고 이벽의 수비가 무너졌다. 검을 든 오른손이 어깨 뒤로 젖혀지며 가슴이 훤히 드러난다.
“흥, 이 정도인가. 뭐, 재능은 아깝다만 사도에 발을 들인 스스로를 원망하도록 해라.”
후욱.
그리고 다음 순간, 선우굉의 검 끝이 쾌의 묘리로 파고들었다. 이미 부서진 이벽의 단전을 향했다.
빠르다. 허나.
‘예상하고 있었다.’
그 순간 튕겨 나간 이벽의 검이 나뭇가지처럼 휘어졌다. 아래로 떨어지며 큰 원을 그린다.
팔절구궁필법(八節九宮筆法).
만월(滿月).
“…허?”
이벽의 검이 원을 완성하는 순간, 선우굉의 미간이 흔들렸다. 검로를 휘는 모종의 압력을 느낀다.
위화감을 느낀 선우굉이 반사적으로 검을 회수했다. 회검식 변의 묘리가 펼쳐졌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팔절구궁필법(八節九宮筆法).
삭월(朔月).
이벽의 검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림자 속으로 숨어든 검이 발검과 회검이 교차하는 접합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슥.
문득 선우굉은 위기를 느꼈다.
회검식 변의 잔상이 수많은 변초를 남겼음에도 검 끝에 부딪히는 감각이 없다.
후욱.
그리고.
아주 작은 기척이 스쳤다.
회검식 변의 모든 변화를 피해버리며 이벽의 검 끝이 선우굉의 지척까지 도달했다.
“아, 아니?!”
대경한 선우굉이 물러섰다.
탓, 이벽이 곧장 따라붙었다.
기세를 놓쳐선 안 된다. 그러나.
채애앵!
“…….”
“…….”
검이 교차하며 동시에 멈추었다.
이벽은 낭패감을 느꼈다.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단 한 박자, 아니, 반 박자가 늦었다.
원인은 명백했다.
선우굉은 연엽보를 펼쳤으나 이벽은 만월무변심공에 알맞는 보법을 가지지 못했다.
“…흥! 재밌군.”
다음 순간, 선우굉이 웃었다.
이벽은 그 안의 살기를 감지했다.
스르륵, 선우굉의 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 역시 이벽이 알고 있는 검로였다.
청강유엽검식, 회검제이식 변검.
타앗!
‘…위험하다.’
이벽은 미련 없이 물러섰다.
팔절구궁필법(八節九宮筆法).
만월(滿月).
추적을 뿌리치듯 만월을 펼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선우굉의 검이 줄기줄기 무수한 변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후우욱.
검로가 원 안으로 빨려들었다.
허나 청강검식과 청강유엽검식의 차이는 명백하다. 만월은 그 기세를 약화시킬지언정 무마할 수는 없었다.
팟, 파팟.
만월을 격하며 검이 파고들었다.
이벽의 몸 곳곳에서 피가 터졌다.
“…크.”
“아주 영악하군. 훌륭해. 일부러 실력보다 약한 척을 해서 내 방심을 유도한 건가?”
저벅저벅, 선우굉이 다가온다.
그 표정에서 이벽은 더 이상의 빈틈을 이끌어 낼 수는 없음을 직감했다.
팔절구궁필법의 한계.
다음 수를 생각해내야—
채앵! 퍼억
“커… 크윽.”
그때였다.
소란 속에서 이벽은 작은 신음 소리를 감지했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저만치에서 공손수가 상처를 움켜쥔 채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그 위로 도 몇 자루가 쏟아진다.
“아, 안 돼요! 소저!”
언미희가 외쳤다.
그녀가 공손수를 감싸려 했다. 그러나 적들은 언미희를 포위한 채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중과부적이었다.
파진성의 빈자리는 생각보다도 컸다. 언미희의 시선이 흔들렸다. 다급한 눈이 이벽과 마주쳤다.
타앗.
망설일 틈은 없다.
그 즉시 이벽은 땅을 박찼다.
서걱.
“커윽!”
“크악—!”
이벽의 검이 휘어졌다.
공손수를 향해 검을 뻗던 무사의 옆구리를 갈랐다. 일검에 참마대의 무인 셋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러나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퍼억.
“나 참. 등을 보이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이 선우굉이 그리도 만만하던가?”
다음 순간, 이벽의 복부에 칼끝이 삐져나왔다. 지척까지 다가온 선우굉의 검이 이벽의 등을 관통한 것이다.
쿨럭, 이벽은 객혈했다.
* * *
서늘한 날붙이가 등줄기를 파고든다. 그것은 이벽에게 있어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허나 쓰러질 수는 없다.
통증을 삼키며 이벽은 땅을 박찼다. 파고든 검으로부터 몸을 빼내며 거리를 벌렸다.
돌아서서 선우굉을 마주했다.
휘청.
그러나 그 순간, 몸이 흔들렸다.
이벽은 균형을 잃고 무릎 꿇었다.
시야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너머로 선우굉이 한 걸음씩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입을 열어 무어라 말을 한다.
허나 의미는 전달되지 않는다.
웅웅거리는 소음이 귀를 덮었다.
“…….”
그때, 철면개의 등이 이벽의 앞을 막아섰다. 헐레벌떡 이벽을 대신하여 선우굉과 부딪히기 시작했다.
허나 그가 상대하던 팽무옥 역시 아직 쓰러지지 않은 채였다. 이내 팽무옥과 선우굉, 두 사람이 합공을 시작했다.
철면개의 손이 어지럽게 엉켜 든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대 일의 싸움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뿐만이 아니다.
이벽은 시선을 돌렸다.
공손수는 피를 흘리고 있으며, 언미희는 여전히 참마대 무인들의 협공에 시달리고 있다.
양측의 전투가 모두 위태롭다.
다시 일어나서 가세해야만 한다.
이벽은 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콸콸 쏟아지는 피를 틀어막았다. 허억, 등줄기를 쥐어짜는 듯한 고통 속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이벽은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어째서 또 이렇게 된 거지?’
문득, 이벽은 화가 났다.
분노는 자기 자신을 향했다.
선우굉은 분명 과거의 선우벽에게 있어서는 가문을 대표하는 하늘과 같은 고수였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이 정말로 도저히 이기지 못할 상대였나? 후회 없이 싸운 것이 고작 이 결과인가?
—네 검은 날이 서 있지 않다.
—날이 없는 검은 쓸모가 없다.
문득, 고 노야가 떠올랐다.
상대는 산적들이 아닌 정파의 무인들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죽이는 것만큼은 피하고자 했다.
목숨은 되살려낼 수 없으며, 얽혀버린 무림의 은원은 뿌리처럼 자신을 옭아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살지도를 제쳐두었다. 허나.
‘어쩌면 살심이란… 본래 통제되지 않는 것에 그 본질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통제란 곧 약화를 의미한다.
생각이 무거워지면 날카로움은 무뎌진다. 그로 인해 같은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고 말았다.
후욱.
이벽은 더 분노했다.
쥐어짜듯 분노를 끌어내었다.
—죽어주십시오, 형님.
그리고 분노를 살심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손바닥을 뒤집듯 아주 쉬운 일이었다.
콰콰콰콰.
그리고 살심이 일어나자, 선천의 힘이 당연하다는 듯 적파심공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시 피가 들끓는다. 그리고.
피 안개에 휩싸이듯 시야가 붉어졌다. 혈향이 감미로워지고 고통이 사그라든다.
후욱.
그 순간 만월무변심공의 구결이 일어났다. 내력을 통제하려 했으나, 이벽은 그마저도 떨쳐내었다.
“…….”
이내 적파심공이 안정되었다.
이벽은 땅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저벅저벅.
이벽은 신중히 걸음을 옮겼다.
언미희에게로 다가갔다. 적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녀는 서서히 한계로 몰리고 있다.
따라서 적을 줄여줘야 한다.
도살지도(屠殺之刀).
삼 초식, 참(斬).
훅, 서걱.
이벽이 검을 휘둘렀다.
두 개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죽음은 갑작스러웠으므로, 도를 쥔 두 개의 몸은 그대로 서 있었다. 채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푸우우!
이내 잘린 단면에서 피가 터졌다.
두 개의 몸이 그제서야 쓰러졌다.
“…어? 공자?”
무너진 팽가 무인들의 몸들 너머로 피를 뒤집어쓴 언미희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