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88)
91화. 의방의 진인 (1)
번뜩.
이벽은 눈을 떴다.
잠들어있던 감각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되찾는다.
그리고 이벽은 자신의 몸이 침상에 눕혀져 있음을 확인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저릿.
이벽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상체를 일으키자 복부에서 통증이 올라온 탓이다.
“…….”
환부는 붕대에 감싸여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반라의 상태인 몸 곳곳에는 치료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의 모습은 낯설지만, 냄새만은 퍽 익숙했다.
갖가지 약재가 섞인 그 독특한 냄새는 누운 곳의 정체를 짐작하게 한다.
“…또 이 모양이군.”
앞서 암영각 동촌장 목일령의 저택에서 눈을 떴던 것처럼, 또다시 만신창이가 되어 눈을 떴다.
이벽은 이마를 짚었다.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
하나하나씩 되짚어본다.
탈진한 파진성을 마차에 실은 채 성가의방을 향했고, 그 목전의 산등성이에서 팽무옥을 비롯한 팽가의 참마대와 부딪혔다.
그리고 선우굉이 나타났다.
“…….”
일순 전투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철면개가 팽무옥을, 자신이 선우굉을 상대하는 사이 공손수가 참마대에 의해 쓰러졌다.
공손수를 구하려다 등을 보인 순간 관통상을 입었고, 이벽은 살심으로 적파심공을 일으켰다.
통제를 놓았고 적들을 베었다.
그리고… 종전에는 팽무옥과 선우굉을 쓰러뜨리기 위해 적파심공의 강기를 끌어올렸다.
승기를 다 잡은 순간, 출혈로 인해 빈틈을 보이고 말았다. 선우굉의 검과 자신의 검이 교차했고, 그리고.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지?’
채앵!
검이 가로막혔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선우굉의 쾌검은 이미 자신의 목전까지 도달해 있었고, 그렇기에 이벽은 방어를 도외시했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는 심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두 검로는 겹치지 않았고, 따라서 검과 검이 부딪힐 일은 없었어야 했다.
그러나.
두 자루의 검은 어느 쪽도 상대를 해한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것은… 검과 검의 사이로 또 한 자루의 검이 끼어든 탓이었다.
세 번째의 검.
그것은 마치 환영과 같았다.
소리도 없이 나타난 검은 검로를 가로막은 것도 모자라 이벽과 선우굉의 검에 어린 강기를 흩어버렸다.
생각할 여력조차 없었다.
내력이 흩어지자 살심이 흐려졌고, 적파심공의 내공이 빠져나갔다.
그 순간 이벽은 주저앉았다.
내력으로 버티고 있던 몸이 마침내 출혈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던 것.
그리고… 기억은 없었다.
‘그건… 대체 누구였나?’
검이 휘둘러졌다면 응당 그 검을 휘두른 자가 있을 것이다.
허나 그 자리에 대체 누가 있어 자신과 선우굉의 검을 동시에 가로막는단 말인가?
아니, 그러나.
이벽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공손수는 쓰러졌고, 파진성은 이미 전투를 치르기도 전부터 위중한 상태였다.
언미희 역시 간신히 버티고 있었으나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그 철면개조차 부상을 입고 주저앉아 있던 것이 이벽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벌떡.
이벽은 침상을 벗어났다.
주변을 살피자 자신의 소지품들이 머리맡에 고스란히 놓여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벽은 검을 집었다.
덜컥, 방문을 열고 나섰다.
해는 동쪽에서 떠오르고 있다.
이벽이 누워있던 방을 포함하여 세 칸의 작은 집채와 마당을 중심으로 담이 둘러져 있었다.
“호오, 벌써 정신을 차린 겐가?”
늙수구레한 목소리가 말했다.
이벽이 고개를 돌렸다. 좌측 집칸의 마루에 앉아 담뱃대를 문 노인을 발견했다.
“그런 상처를 입고도 고작 이틀 만에 자리를 털다니, 원. 보기와는 달리 퍽 단단한 통뼈로구만?”
노인이 껄껄 웃었다.
“…이곳은 성가의방입니까?”
“그렇다네.”
노인의 기세는 평범했다.
정체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의방에는 응당 의원이 있을 테고, 자신의 몸을 치료해 준 것은 저 노인일 테다.
하지만.
이벽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끝끝내 전투를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목숨은 붙어있었고 치료를 받았다.
그렇다면 ‘그 검’을 휘두른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의방으로 옮겨주었다는 얘기가 된다.
‘아군? 아니면…….’
“노야께선 혹 저와 함께 있던 일행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후우, 노인이 담배 연기를 피웠다.
“뭐라 말하기 어렵구만.”
“…….”
“솔직히 말하지. 자네의 일행들은 일단 치료를 받고 있네. 하지만… 적의 손아귀에 있으니 죽은 목숨과 매한가지지.”
탁탁, 노인이 담뱃대를 털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의방에서 환자를 해하는 건 강호의 금기에 해당하니 말이네. 허나 치료가 끝나면 더 이상 환자가 아니니, 어떤 식으로든 처분이 이뤄지지 않겠는가?”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별로 놀라지 않는군?”
“…죽은 목숨과 매한가지인 것과 이미 죽은 것은 전혀 다른 얘기이니까요.”
그렇군.
이벽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일행도 스스로도 지키지 못했다.
그 검이 누구의 것이었건, 전투 중 의식을 잃은 시점에서 이미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일단 눈을 떴다.
아직 죽지 않은 이상, 그 누구도 죽게 놔둘 생각은 없다. 채 회복이 끝나지 않은 몸 상태는 썩 좋지 않다.
허나 이벽이 각오를 다지자 선천의 힘이 몸 안에서 고요히 약동했다.
저벅저벅.
이벽은 마당을 가로질렀다.
정면에 난 대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득, 대문 바깥에서 적지 않은 수의 기세가 쏟아지고 있음을 눈치챘다.
안전하지 않은 것은 일행들 뿐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좌우간 이벽은 문고리를 잡았다.
“이보게, 그 문밖으로는 나가지 않는 걸 추천하네. 자네 혼자서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
이벽은 노인에게 목례했다.
덜컹,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수십 쌍의 시선들이 쏟아졌다.
눈빛은 곱지 않다.
적의는 날카로웠다.
“네 이노오오오옴—!!”
그때, 담 주위를 빙 둘러싼 일련의 무리들 사이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팽무옥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멀쩡하지는 않은 듯, 커헉, 피를 토했다. 주변의 무사들에 의해 부축받는다.
“…….”
팽가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던 사이 의혈맹의 여러 세력들이 일제히 소문을 듣고 의방으로 몰려든 모양이었다.
슥.
그때였다.
이벽의 양옆에서 두 자루의 검이 교차하며 이벽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벽은 양쪽을 둘러보았다.
대문을 지키듯 양쪽으로 시립하고 선 사내들이 있었다. 기세는 범상치 않다.
“물러서시오.”
“이 문밖으로 넘어가면 더 이상 그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소.”
“…….”
이벽은 생각했다.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
의혈맹에 의해 포위당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허나… 그에 맞서 이벽을 보호하듯 문을 지키고 선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어, 어째서!!”
그때, 팽무옥이 다시 외쳤다.
말 그대로 피 맺힌 절규였다.
“대체 왜! 천하의 무당이 악적들을 감싸고 도는 건가?! 정도맹에는 더 이상 정도도 뭣도 남아있지 않은 것인가—!!”
“…….”
무당?
아니, 그보다도.
이벽은 뒷걸음질 쳤다. 마당 안으로 들어선 뒤 철컥, 문을 도로 닫았다.
문 바깥에선 이벽과 그 일행, 그리고 무당을 성토하는 목소리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악적‘들’을 감싸고 돈다.
그 말은 즉, 이 대문 안쪽에서 지켜지고 있는 것은 자신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이벽이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노인이 씩 웃었다.
“…노야, 한 번 더 묻겠습니다. 노야께선 제 일행들이 어딨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야 내 등 뒤에 있지.”
“…….”
노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노인은 마루에 앉아있다.
그렇다는 건… 일행들은 그 뒤의 방문 안쪽에 있다는 의미가 된다.
허나 이벽은 직감했다. 그것이 결코 안심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들 상태가 중해서 아직 깨어나지는 못했지만 말일세. 모두가 자네 같은 괴물들은 아니니까.”
“…조금 전 제 일행은 적의 손아귀에 떨어졌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만.”
“그야 그렇지. 내가 여기 있잖나? 내가 언제 내 입으로 자네의 아군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나?”
“…….”
“나는 ‘적’의 손아귀에 떨어졌다고 말했지, 그게 의혈맹이라곤 말한 적이 없다네.”
이벽은 깨달았다.
“…당신은 의원이 아니군.”
“물론. 내가 의원이라고 말한 적도 없지. 껄껄껄!”
노인이 껄껄껄 웃는다.
이벽은 침음을 삼켰다. 노인에게선 여전히 아무런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기감을 벗어난 그 무언가.
섬짓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노야께선 누구시오?”
“나는 무당의 태허라고 하네.”
태허.
그것은 이벽 역시 알고 있는 이름이다. 이벽은 그 도호에 따라붙는 수식어들을 떠올렸다.
천하십대고수.
무당의 장문인.
그리고… 정도맹주.
“자네를 포함하여 자네의 일행들은 지금 내 손아귀 안에 있다네. 그리고 나는 무당에 적을 두고 있으니 사파인인 자네의 적이라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은가? 응?”
툭툭, 태극검존(太極劍尊) 태허진인이 담뱃대를 털어냈다.
* * *
“…내게서 무엇을 원하시오?”
정적 끝에 이벽은 말을 꺼냈다.
그때, 자신과 선우굉의 검을 막아선 또 한 자루의 검은 태허진인의 검이었을 테다.
그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고도 남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렇듯 자신과 일행을 살려둔 채 의혈맹으로부터 보호까지 해주고 있다면, 물론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게, 내가 자네의 몸을 좀 살펴봤는데 말야. 뭐, 다른 이유는 아니고 내상을 살필 생각이었네. 그런데… 퍽 흥미롭더군.”
“…….”
이벽은 침음을 삼켰다.
그에게는 단전이 없다.
선천의 힘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밀은 강호에 나온 이래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다. 허나.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마실 삼아 나와봤네. 의혈맹 놈들이 호북 앞마당에서 소란을 일으키니 잠자코 있기도 뭐해서 말일세.”
저벅.
태허진인이 몸을 일으켰다.
허억, 이벽은 숨을 들이켰다.
노인의 몸 안으로 감춰져 있던 기세가 터져 나왔다. 홍수가 범람하듯 장내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본능이 경종을 울린다.
물에 잠기듯 호흡이 답답해진다.
“그런데 막상 나와보니 웬걸, 사패련주의 비호를 받고 소림으로 가는 길에 의혈맹에게 꼬리를 밟힌 애송이가 하나 있다지 뭔가?”
“…….”
“후기지수 하나에 온 정사무림이 들썩이고 있으니, 거기서 나만 빠지면 섭한 노릇이지. 허허!”
저벅, 저벅.
그리고 태허진인이 뒷짐을 진 채 느긋한 걸음으로 이벽의 주위를 맴돌았다.
물건을 품평하듯 둘러본다.
이벽의 이마에 땀이 흘렀다.
“그래, 자네는 대체 누구인가? 천하의 어느 기인께서 자네 같은 녀석을 키워냈지?”
“…사문에 대해 묻는 거라면 운남의 낙검문이라 하오. 하지만 스승에 관해선 말할 수 없소.”
이벽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허헛, 그것도 그렇겠지. 암, 그 정도 기인의 존함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필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훅, 태허진인이 담뱃대를 빨아들였다. 그리곤 다시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좋아, 내게 자네의 검을 좀 보여주게.”
“…무슨 뜻이오?”
“어려울 것 없네. 자네의 일행들이 바로 저 안에 있음이니 데려가고 싶으면 나를 쓰러뜨리면 되는 것 아닌가?”
“…의방 내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금기사항인 것으로 알고 있소만.”
“재미있는 얘기로군. 자네가 내게 검을 쓴다고 해서 그게 과연 작은 소란 거리라도 될 거라 생각하나?”
“…….”
이벽은 할 말이 없었다.
상대는 강호의 정상에 이르는 열 명의 거인 중 한 명이자, 천하를 삼분하는 정도맹의 수장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건방진 소리였다.
하지만 과연 자신의 힘으로 이러한 기세의 검을 단 일 초식이라도 당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다.
이벽은 선천의 힘을 끌어올렸다.
무당의 검을 상대해 본 적은 없으나 그 묘리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다.
태극의 묘리를 근본으로 하는 그 검 앞에서는 그 어떤 허초도, 변초도 무의미할 테다. 그렇다면.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발검제일식(拔劍第一式).
직검(直劍).
이벽은 가장 정직한 검을 택했다.
직검은 쾌검만큼 빠르지 않으며, 강검만큼 강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렇기에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채 좀처럼 중심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뭐, 좋지도 나쁘지도 않군.”
그 순간 담뱃대가 원을 그렸다.
그리고 이벽은 그 단순한 동작 안에서 무수한 묘리가 생물처럼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일견 팔절구궁필법과 닮아있었으나 실상은 전혀 같지 않았다.
팔절구궁필법의 묘리가 휘어짐에 있다면, 태허진인의 원 안에는 그저 묵묵한 흐름이 있을 뿐이다.
후욱.
그 안으로 직검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파도에 바위가 깎여나가듯, 직검이 급격하게 기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내력이 푸스스 흩어진다.
그리고 검이 속도를 잃는다.
으득, 이벽은 이를 악물었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회검제삼식(拔劍第三式).
유검(柔劍).
이벽의 검이 흔들렸다.
직선으로 나아가던 검이 방향을 틀며 곡선을 그렸다. 태극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아주 작은 흐름 하나가 역류한다.
거스르듯, 거스르지 않듯, 검 끝이 연어처럼 힘겹게 태극을 해치고 지나 태허진인에게로 쇄도한다.
“호오?”
태허진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마침내 이벽의 검이 태극의 영역을 벗어났다.
그러나 검에 남은 것은 아주 실낱같은 기세에 불과했다.
팅!
담뱃대가 검신을 두드렸다.
그리고 힘겹게 지켜낸 단 한 줌의 기세가 허무하게 흩어져버렸다.
“…….”
터벅, 이벽은 물러섰다.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벽.
이벽은 이진천을 떠올렸다.
“허헛, 허허헛!”
그때, 태허진인이 웃었다.
“재밌군, 아주 재밌어. 엊그제와는 전혀 딴판이구만? 허헛! 주제에 부드러울 줄도 안단 말이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퍽 흡족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고작 담뱃대를 넘어서지 못한 이벽으로선 태허진인의 그러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벽의 주위, 한 바퀴를 맴돈 태허진인이 다시 마루에 걸터앉는다.
기꺼운 낯으로 이벽을 향한다.
“흠! 이보게. 어떻게든 넘어서야 하는데 도저히 쓰러뜨릴 수 없는 적을 만났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아는가?”
“…모르겠소.”
“간단하네. 적을 적이 아니게 만듦으로써 자기 자신을 구하면 되는 거지.”
“…….”
“진지하게 하는 말인데, 자네, 무당의 제자가 되는 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