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touch Eldmia Ega RAW novel - Chapter (457)
유적의 어둑한 천장을 바라보며 데오니 비레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유적을 가득 채우는 혈향이 그 순간을 노리고 그녀의 후각을 유린했지만, 데오니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성녀이기 전에 이단 심판관이었고, 교단의 적을 향해 무기를 들던 이답게 피는 익숙했다. 그럼에도 한숨을 내쉰 건 정신적으로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이단 심판관들의 고문 과정을 뒤에서 지켜보는 건 힘든 축에도 끼지 못했다. 그녀를 짓누른 것은 그로 인해 쏟아져 나오는 거대한 배교의 증언이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그에 비례하여 고통과 절망, 피와 절규가 같이 흐른 끝에 고문이 끝났지만 충격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마지막 고문을 끝마친 이단 심판관이 손을 씻으며 이단 심판관들의 합작이 낳은 결과물을 등지며 다가오자, 그 순간만큼은 데오니도 가슴을 옥죄이는 부담감에서 잠시 눈을 돌린 채 그들의 ‘결과물’에 먼저 시선을 둘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도구조차 마땅찮은 와중에 잘도 저기까지 사람을 ‘사람이었던 것’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성법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며 숨만 붙어 있을 수 있는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이어진 고문의 끝은 참담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를 행하면서 아무런 악의도 내비치지 않은 이단 심판관들도 대단하고, 저 모든 고문을 어떻게든 버티며 정보를 누설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마법사 역시 대단했다.
믿음의 방향이 그릇되지 않았다면 그는 좋은 신도가 되었을 것이다. 이미 늦어버렸지만.
데오니의 곁에 있던 이단 심판관들 사이로 들어와 자리 잡은 마지막 이단 심판관은 동료가 건네주는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신 뒤 덤덤히 자신의 소견을 입에 담았다.
“고문을 통해 알아낸 내용에 거짓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무려 여섯 번에 걸쳐 진행된 고문이었다.
3차 고문 이후로는 신빙성을 의심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증언이 확실해졌음에도 계속 고문을 이어나간 것은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보험에 불과했다.
항상 이런 것은 아니었으나, 그만큼 마법사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워낙 충격적이었기에 아무도 이를 과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다른 이단 심판관들도 그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데오니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문으로 알아낸 내용들을 다시 한 번 곱씹은 뒤 운을 뗐다.
“마왕군의 수뇌부가 통째로 배교에 빠져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사료됩니다. 형제님들께서는 어찌 여기시는지요.”
“마왕군 특작부의 기밀 유지를 위한 편집증적인 행보는 이미 소문을 넘어 악명에 이를 지경입니다. 수뇌부 전체를 적으로 염두하기보단 특작부의 소행에 불과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엔 이미 병기화와 양산까지 이뤄지지 않았습니까? 이를 정녕 특작부만의 독단이라 여길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특작부의 권한이 굉장히 높다는 건 이미 다 아는 사실입니다. 국외에서 이루어지는 기밀 활동의 8할 이상이 특작부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마냥 뜬소문이 아니라면 그들이 마왕군 내에서 지니고 있는 영향력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거대할지도 모릅니다.”
함부로 입을 열기 힘든 심각한 사안이었지만 주저하는 이단 심판관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 한결같은 모습이 데오니에게 위안으로 다가왔지만, 그렇다고 사태의 심각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남은 건 최대한 담백한 진실과 추측을 걸러내어 용사 엘드미아에게 전달하는 일뿐이었으나, 용사 엘드미아의 숙원을 고려하니 이 부분이 생각보다 큰 난관으로 다가왔다.
“특작부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암막공暗幕公은 무조건 연관되어 있겠죠.”
겨우 8살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품어왔던 기나긴 숙원의 성취를 위해 마왕군에 피해를 주고, 대륙에 이름을 날리며 자신을 건드리는 이에게 보복을 시행하는 자의 살생부에 마왕군에서 큰 축을 담당하는 집단과 집단의 수장이 들어가 있다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것만으로도 마왕군이 크게 흔들릴 텐데 다른 고위 귀족이나 실력자들까지 엮이게 된다면? 기나긴 전쟁에서조차 쉬이 죽는 일이 없던 실력자들이 줄줄이 죽어 나갈 것이 분명했다.
상대가 용사였기에, 이 자리에서 그걸 의심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문제는 죽어 나가는 게 그들만이 아니라 그저 의무를 다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을 뿐인 무고한 이들까지 포함이라는 점이었다.
교단은 전쟁에 동조하지 않고 배교자를 축출하고자 할 뿐이지, 무지한 신도들과 죄 없는 이들이 배교자들의 오만으로 비대해진 인족의 분노 앞에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하는 미래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만약 이 일을 계기로 마왕군이 뭉텅이로 날아가게 된다면 이번 전쟁은 역사에 유례가 없는 참패로 기록되며 대학살로 이어질 수도 있다. 용사의 의도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인족들의 생각은 다를 것이 분명했으니까.
“다른 고위 귀족들이나 마왕은 어떨까요?”
그러니 용사에게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신중, 또 신중해야 했다.
평소라면 여신께서 점지한 용사가 마족을 등질 리가 없다는 믿음이라도 있었겠지만 이번에 배교자들이 시도한 것은 그런 안일한 생각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경으로 느껴질 정도로 심각하게 도를 넘어선 시도였기에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지금까지 침묵을 고수하며 생각을 정리하던 멘데르 사제는 데오니가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에 조용히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은 뒤 입을 열었다.
“이번 대의 마왕은 여러모로 특출난 존재죠. 일신의 무력 역시 굉장하다고는 하나, 진정으로 칭송받는 건 미래안을 지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날카롭기 그지없는 예측과 이를 뒷받침하는 지성입니다.”
마왕군 내에서는 이미 용사 내지는 에파가의 재림이라 불릴 정도로 높게 평가받는 마왕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지시를 내리고 결과를 얻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이티스엘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마왕군이 여전히 미미한 우세를 점하며 전선을 고착화시킬 수 있었던 것 역시 그 덕분이라고 들었기에, 멘데르 사제의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 모두의 표정이 한 층 더 심각해졌다.
마왕이 이 사안을 모르고 방관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말이었다.
“사안을 보면… 이는 결국 예정된 결과일지도 모르겠군요.”
비단 마왕이 배교의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지금까지 하고 있었던 모든 고민을 관통하는 답을 내놓으며, 데오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려 신성을 모독하고 신역을 침범하려는 의도가 가득한 불경이다. 마족 전체를 위한다는 면에서 보면 마신의 용사가 마왕을 죽이는 결과로 이어지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몰랐다.
“주변을 정리하고 상황에 맞춰 바로 떠날 채비까지 마치십시오. 용사님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자신이 결단만큼이나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면서 데오니는 피비린내로 가득한 제단을 뒤로 하며 사전에 미리 이야기를 한 대로 엘드미아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원래도 꽤 거리가 떨어져 있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멀게 느껴지는 숲길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도 아니고 되려 아무런 연관조차 없는 입장이었음에도 데오니는 자신이 알게 된 정보들을 되새기며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엘드미아는 이번 세대의 마왕군이 낳은 업보였다.
그가 자신의 마을이 지워졌다고 했을 땐 단순히 목격자를 없애거나 추적에 훼방을 놓기 위함이라 여겼다. 하지만 마법사를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인 건 마신의 행보를 예상했기에 저지른 계획 범죄였다.
마왕군은 마신이 용사를 점지할 것임을, 그것도 인족에게 힘을 부여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발상이 가능한지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그 탓에 신전과 인접한 마을을 통째로 없앴고, 지나가던 노예 상단조차 휩쓸었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 분명한 노예 상단조차 그들의 목표였다는 점이다. 모두 죽여 없애야 했던 마을과 달리 그들은 거기서 노예로 팔려가고 있던 마족 하나를 구출해냈다고 한다.
너무나도 허황되게 느껴지는 이야기에 반발하여 집중적으로 심문했음에도 마법사 역시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미래라도 보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게 가능…
“…미래?”
강한 의문이 발걸음을 멈출 뻔 했지만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직접 본 이는 아무도 없으나, 마왕의 미래안은 마족령에서 너무나도 유명해 새로울 것도 없는 소문이다. 지금까지는 그냥 특출나게 영리하여 전장의 판도를 읽어서 생긴 별명이라 여겼지만 마법사의 증언과 상황을 대조해 보니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데오니는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의 가설을 부정했다. 그랬다면 전쟁은 진즉에 끝났겠지. 미래를 본다고 여겨질 정도로 확실한 정보망이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현실적이다.
잠깐이나마 허튼 생각에 현혹된 스스로를 자조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오두막이었다.
데오니의 움직임을 눈치챈 비룡이 오두막보다 으리으리한 제집에서 슬쩍 고개를 들어 바라보다가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날개에 고개를 파묻는다.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와 함께 간간히 들려오는 이야기소리는 영락없이 평범한 가정의 그것처럼 보였다.
마왕군이 유물을 노리지 않았다면 용사는 비룡 대신 자신의 가족들과 저 평범한 삶을 향유하고 있지 않았을까.
“…후우.”
동족의 죄업에 속이 거북해지는 것을 느끼며 문에 다다른 데오니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문을 두드렸다.
이어질 대화의 결과가 뭐가 됐든 성녀는 용사를 따라야 한다.
아니, 따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