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touch Eldmia Ega RAW novel - Chapter (521)
발자국에서 올라와 모습을 드러낸 수인들은 많았으나, 섣불리 이라노레프의 시체 앞으로 나오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용의 시체가 가져다주는 위압감도 위압감이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오랜 세월 초원을 군림해 온 용을 용’이었던 것’으로 만들어버린 내가 이라노레프의 잘린 머리를 깔고 앉은 채 대족장 레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처음 이렇게 앉았을 땐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기적 같은 회복 구슬이라 한들 결국 그 효과를 받는 게 결국 사람의 몸뚱이라 그런지, 상처가 없는 것과 별개로 굉장한 피로감이 몰려오더라고.
그렇다고 곧 있으면 대족장이라는 사람과 마주해야 하는데 모양 빠지게 바닥에 앉는 것도 좀 그래서 그냥 이라노레프의 대가리를 좀 옮겨서 걸터 앉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내 전투의 열기가 빠지고 차갑게 식은 머리로 상황을 돌아보니, 저들이 내 예상보다 우호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에게 있어서야 레이시스트 드래곤에 불과했던 이라노레프였지만 그들에게는 오래전부터 마왕군으로 하여금 그들의 성역을 두고 불가침 협약을 맺게 만든 방파제와도 같은 놈이었다는 게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대족장이 그렇게 호쾌하게 대해줬는데 이제와서 뒤통수를 칠까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족장의 입장이었고, 민중과 지도자는 보통 생각이 다른 법이니 방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검을 뽑아야 할 상황이 올 경우를 대비해 언제든지 싸우기 편한 자세로 앉았는데, 검 좀 만졌다는 놈들이라면 다 눈치챌 정도로 일촉즉발의 상태로 비춰졌는지 하나같이 멀찍이 서서 관망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두고 처음엔 에밋이나 데오니 성녀님께 조용히 자문을 구해봤지만, 그리 유익한 조언을 얻진 못했다.
이유는 정보 부족.
에밋은 이라노레프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냥 미친 용 정도로 여기고 있었고 성녀님은 아예 이런 용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이번엔 제가 먼저 여쭙고 싶을 정도입니다. 에밋은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던 겁니까?”
교단조차 모르고 있던 용의 존재를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눈에 띄게 당황한 성녀님이었지만 정작 에밋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이놈이 수인의 영역에서만 활동한 건 아니었거든. 사정이 있어서 마족령 반대편으로 자주 오고 가야 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하필 거길 이놈이 뻔질나게 돌아다녀서 재수 없으면 한 번씩 마주쳤지.”
“…반대편이요?”
이티스엘 아래는 전부 마족령이라고 알고 있었던 내 지식과는 맞물리지 않는 이야기에 이번엔 내가 반응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니, 에밋은 ‘아.’ 하는 표정과 함께 조금 더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자네가 듣기엔 좀 우스울 수 있으나 우리들은 마경魔景이라 부르는 곳이지. 나처럼 반대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마족령에서 서쪽으로 좀 더 이동하면 1년 내내 녹지 않는 얼어붙은 땅이 있다고 한다.
그곳엔 마치 경계선이라도 그어놓은 것처럼 거대한 크레바스가 대륙을 갈라놓고 있는데, 그 건너편이 바로 에밋이 말하는 마경되시겠다.
“왜 그런 꼴이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군. 그런 역사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거기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몸에 악영향이 가는 수준이라서 에밋도 연구 표본 채집을 위해 가는 게 전부였다고 한다.
그 뒤로 꽤 장황한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몬스터들조차 뒤틀린 기형들만 남아있다고 판명된 그 땅을 흥미본위로 조사하다가 이라노레프와 몇 번 조우했다는 소리였다.
그랬는데도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걸 보면 뭔 수를 썼는지 몰라도 조우하는 족족 기가 막히게 도주에 성공한 모양이다.
“도망치는 게 고작임에도 기껏 준비한 마도구를 몇 개씩 날려먹어야 하는 날이었지.”
말하는 에밋도, 같이 듣는 성녀님도 매우 덤덤하기 그지없는 반응을 보였지만 내겐 충분히 놀라운 정보였다.
이티스엘에서는 뭉뚱그려서 마족령으로 그려지는 땅이다. 그게 사실은 특정 경계를 기준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도, 몬스터로 분류되는 놈들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이야기도 전부 금시초문이었다.
“마경은 신성 시대 당시 악신과 선신들이 벌인 최후의 결전이 남긴 여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체 그딴 곳이 왜 존재하는 건지 의문을 지우지 못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성녀님이 짧게 첨언한 건, 저 멀리서 수인들의 인파가 갈라지며 라쿤맨과 대족장으로 보이는 이들이 우리를 향해 황급히 달려올 무렵이었다.
“교단에는 기록이 남아있는 건가?”
이에 흥미를 보인 에밋이 질문했지만 이번엔 성녀님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말 그대로 기록만 가까스로 남은 수준이지만 말이죠. 신성 시대의 기록들은 대부분 그런 식입니다. 잘해봤자 문장 한 줄 온전히 남은 게 전부죠.”
전설인지 역사인지 알 수 없는 글귀 하나가 전부라. 이번에도 내겐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에밋은 더 파고들만한 여지가 없다고 여겼는지 금방 흥미를 잃고 대족장과 라쿤맨에게로 주의을 옮겼다.
“어쨌든 이라노레프를 죽인 게 어떤 파급효과를 불러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결론만 확고해졌군. 저들이 무리한 요구를 할 경우 어떻게 할 생각인가?”
“글쎄요…”
잠깐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지만 대족장 레델의 성격이나 수인들이 보여 준 모습에 거짓이 없다는 가정하에서, 그들이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저들이라면 뭔가를 요구하더라도 쌍방이 납득할 수 있는 선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어쩌면 별다른 요구를 안 할지도 모른다. 대족장이나 라쿤맨이 이라노레프에게 그다지 호의적인 감정을 지니지 않았다는 건 짧게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대족장 레델은 ‘이라노레프라는 방파제를 마족들이 먼저 제시했으니 받았을 뿐이다.’ 라는 뉘앙스가 강했다. 이번 습격만 놓고 봐도 그들의 그런 반응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말 못 하는 짐승이라던 놈이 용언으로 소통이 가능했던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이라노레프는 자신으로 인해 수인들의 터전이 망가지는 걸 똑똑히 보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런 놈의 평소 행실이 수인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엮여 있으니 내가 이놈을 잡겠다는 의사를 보였을 때 레델도 흔쾌히 웃으며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럴 일은 없길 바라지만 무리한 요구를 하면 저도 좀 더 무리를 할 수밖에 없겠죠.”
이제는 얼굴 표정까지 또렷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대족장과 눈을 마주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니, 멀찍이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수인들이 크게 움찔거린다.
그에 비해 대족장과 라쿤맨의 반응은 침착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별개로 잔뜩 경계하는 눈치이긴 했지만, 용의 모가지를 딴 놈이 앞에 있으면 나라도 그랬을 것이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풍왕을 잡았군. 그것도 이렇게나 짧은 시간 안에.”
짧았나? 싸우는 입장에서는 천년만년 싸우는 기분이었는데.
그나마도 타이밍이 맞아서 놈의 등에 올라타 날개를 잘라 내고 시작해서 다행이었지, 그러지 못했다면 회복 구슬 세 개를 다 잃고 가까스로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꽤… 운이 좋았습니다.”
무심결에 그런 생각을 그대로 입에 담으려다가 말을 바꿨다.
만에 하나를 위해 담백하게 사실만을 입에 담기보다는 조금 강짜를 부리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인들 사회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인족에게 용의 부산물이라는 건 없어서 못 사는 매물이다.
“여러분의 영토 내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도 있고, 이것저것 허락받고 싶은 것도 있다 보니 뒷다리 하나를 두고 거래를 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말인즉슨, 인족들이었을 경우 내가 힘을 다 썼다는 확신이 생기면 그대로 날 죽이고 용의 부산물을 다 차지하겠다는 방향으로 대가리를 굴리는 놈들이 나와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딱히 소리 죽여 말한 건 아니었기에 내 말을 들은 수인들 사이로 술렁임이 퍼져나간다.
아쉽게도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기에 어떤 분위기인지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되려 뒤로 물러나는 이들이 많은 걸 보면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닌 듯했다.
“…용의 부산물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 지 우리보다 인족인 그대가 더 잘 알거라 생각하네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지만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 비교하면 동공만큼은 진도 8에 가까운 대족장 레델이었다.
그럼에도 목소리만큼은 평온하다. 나는 졸려서 고꾸라질 것 같은 고개를 억지로 움직여 에밋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동료가 숫자놀음에 도가 터서 말이죠. 알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제안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정식으로 그대들을 일족의 손님으로 맞이할 것이며, 앞으로의 여정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네.”
“그로 인해 마왕군을 적대하게 되더라도 말입니까?”
어차피 목격자라고 해봤자 나와 성녀님 그리고 에밋을 제외하면 전부 수인들이니, 저쪽만 입단속을 잘 한다면 근시일 내에 이라노레프의 죽음이 마왕군의 귀로 흘러 들어갈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불과하다. 혹시라도 예상보다 빠르게 정보가 들어갈 경우 마왕군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다.
이대로 수인들을 방치할 수도 있겠지만 용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수인들과 전면전에 들어설 수도 있으니, 레델 개인의 호불호를 떠나 사람들을 이끄는 대족장으로서 냉철하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문제였다.
문제는 그가 냉철하게 결단을 내릴 경우 높은 확률로 우리 쪽이 불리하다는 점이지.
그가 눈앞의 물욕에도 조금쯤 휘둘리고 감정적으로 결단을 내리길 바라며 던진 질문에, 레델은 진지하던 얼굴 위로 한가득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시원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자기들 문제를 떠넘기는 것에 불과했으면서 생색내듯 우리들의 신성한 땅을 침범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이야기를 증조부께 들었던 어린 시절부터 마왕군은 마음에 안 들었다네. 그런 놈들보다는 신을 섬길 줄 아는 교단이 낫지.”
그 한마디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요했던 주변에서 레델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레델은 그런 수인들을 한 번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히려 그대들을 도울 기회를 달라고 내가 부탁하고 싶군. 자신이 지켜야하는 이들을 위해 용마저 죽인 용사를 마주하며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날이 얼마나 있겠나.”
드래곤 슬레이어라, 지크프리트가 오열하겠군.
나는 당장이라도 쓰러져서 잠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레델의 큼직한 손을 맞잡았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다행히 수인들은 이라노레프의 마지막 발악 같은 개수작을 부리는 일 없이 우리를 열렬히 환대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