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touch Eldmia Ega RAW novel - Chapter (522)
수인들은 구두에 불과한 약속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들은 용의 다리를 회수하는 것보다도 결계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인원들을 안으로 들여보내는 걸 우선했다.
지금까지는 마왕군과의 약조로 인해 풍왕이라 불리던 용에 대한 사실을 대외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보니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위협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 여긴 것인지 처음 마주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살가운 태도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덕분에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사람들에게 설명하느라 시간을 써야했다.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과정은 분명 피곤한 일이었지만, 금전적인 문제로 인해 도시에서조차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없었던 이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그리 고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대족장 레델이 용의 다리를 대가로 제공한 휴식 기간은 자그마치 3주였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머물 생각도, 머물 수도 없었기에 우리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차고 넘치는 유예였다.
사실 처음에는 2만에 달하는 대인원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건 아니었다. 수인들은 그의 지휘하에 빠르게 움직이며 초원에 거주용 천막을 설치해주었고, 부족한 물자는 다른 발자국 부족들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채워넣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덟 발자국의 모든 부족들이 한데 모여 도움을 준 거였다.
“크룰의 인정을 받은 이는 우리들의 가족이라 해도 과하지 않으니, 이는 결국 부족의 일원이 용을 잡은 것과 진배없지.”
풍왕의 뒷다리가 거대하기는 할지언정 이렇게 대대적으로 지원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용살자를 위한 축하연까지 성대하게 준비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싶어 물어 봤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참으로 수인다운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처음엔 어쨌든 덕을 보는 것이니 대체로 마음 편히 호의를 받기만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들이 용살자를 위해 준비하는 축하연이라는 게 축제급으로 거대한 규모라는 걸 모두가 눈치채는 데까지는 사흘이 채 걸리지 않았고, 정확히 나흘 째 되는 날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수인들과 함께 축제 준비를 돕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에 불평을 가지는 이들은 없었다. 사람들은 구체적인 내막까지는 알리지 않았음에도 수인들이 왜 자신들을 받아줬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렇게 정말 오랜만에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마음 편한 휴식이 이어졌지만, 나는 그 안에 포함되지 못했다.
수인들이 마련해준 큼직한 천막에 주술사들과 교단의 성직자들이 함께 모여 앉아 의견을 나누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는 사이, 이제 막 천막 안으로 들어온 에밋이 내 쪽으로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우리 용사님의 상태는 어떠신가?”
그 물음에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수인들이 놓아준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닷새동안 변함없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작게 대답했다.
“변함없습니다.”
용사, 엘드미아 님이 피로를 호소하며 휴식에 들어간 지 닷새째.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다.
여덟 발자국에서 모인 명망 높은 주술사들과 교단의 고위 성직자들이 두루 모여 앉아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둘러본 에밋은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더니, 자신의 지팡이를 공중에 띄워 옷걸이처럼 만든 다음 거기에 걸어 놓은 뒤에야 엘드미아 님의 곁으로 다가갔다.
“마력은… 안정적이군. 내가 없는 사이 마력 기관에 하자가 생기지도 않았고…”
돈을 좀 많이 밝히기는 했으나 그는 몇 없는 우리 쪽 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였고, 다른 주술사나 성직자들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엘드미아 님의 용태를 파악하고자 최선을 다 했다.
혹시라도 용을 죽인 뒤 가사 상태에 빠진 사례를 아는 이가 있을까 싶어 여덟 발자국을 전부 방문하고자 무리하게 공간 이동 마법까지 사용하고 이제서야 돌아온 그였다. 여러모로 피곤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일 테지만, 그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으며 간단한 검진을 마친 뒤에야 내게로 걸어왔다.
“용살자가 둘이 아닌 게 한이로군. 무슨 일이 생기면 언질을 넣을 테니 좀 쉬시게. 꼴을 보아하니 사흘간 제대로 눈도 못 붙인 것처럼 보이는군.”
“괜찮습니다.”
“뭐, 그쪽이야 그렇겠지만 내 고용주의 마음은 그러지 않을 거 같아서 말이지. 푹 자고 일어났더니 초췌해진 일행이 반겨 주면 기분이 좀 그렇잖겠나?”
짐짓 가벼운 발언처럼 들리면서도 일리 있는 말이었다.
실력 있는 성직자와 주술사들이 열이 넘게 모였음에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상 증상이라고는 그저 계속 잠을 잔다는 것뿐. 차라리 몸에 문제가 생기면 이야기가 달랐겠으나, 정작 침대에 누워 있는 엘드미아 님은 땀 한 방울 흘리는 일 없이 곤히 자고 있다.
“…맞는 말씀이군요.”
차도가 있길 바라며 멍하니 있다 보니 자각하지 못했는데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이틀 정도는 잠도 못 잤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갑자기 잠든 채 며칠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의 혈색보다 멀쩡히 움직이는 사람의 혈색이 나쁜 건 확실히 꼴이 우스웠다.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게 언제인지도 기억이 안났기에 일단 뭐라도 먹고 눈을 좀 붙이고자 자리에서 일어나니, 순간 눈앞이 핑 돌아 에밋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정말 꼼짝도 안 하고 있었던 겐가?”
“그럴 리가요. 꼼짝도 안 하고 있는 건 저분들입니다.”
나는 그저 경황이 없었을 뿐이지만 부족의 주술사들과 교단의 성직자들은 혹여라도 엘드미아 님의 용태에 문제가 있지는 않을까 예의 주시하며 성법과 주술을 펼치는 중이다.
그게 정말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악신의 영향력에 노출된 용의 피를 뒤집어써가며 싸웠으니 뭔가 영향이 있을지 모른다는 그들의 주장은 나름 일리가 있었기에 뜻대로 하게 둘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냥 다들 쉬라고 하고 싶었으나, 저렇게라도 안 하면 당장 본인들이 불안해 죽으려는 눈치였기에 차마 말릴 수 없었다.
“적어도 축하연이 시작되기 전엔 깨어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당장 내일이면 악신의 잔재를 없애야 한다며 엘드미아 님이 잠들기 전에 용의 시체에 꽂은 성검 에스테를 중심으로 축하연이 시작된다.
여덟 발자국에서 온 수인들까지 가세해서 번화한 도심 한복판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북적거리는 와중에 수인들은 정말 자신들 일처럼 즐거워하며 준비했고, 여기까지 함께 해온 일행들도 도망자 신세라는 현실과 행군의 피로는 잠시 미뤄둔 채 수인들과 함께 한창 열을 올리며 즐거워하는 중이었다.
그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없으니 엘드미아 님의 상태는 극소수만 알고 있는 비밀이다.
“말씀대로 좀 쉬고 오겠습니다. 겸사겸사 저들에게도 음식을 좀 권해야겠군요.”
“세상에, 지극 정성인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용사답군.”
“그 표현은 조금 정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질문하는 에밋을 바라보며 잘못된 표현을 수정해주었다.
“‘이상적인’ 용사다운 것입니다.”
예로부터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용사는 생각보다 많으니, ‘용사답다’ 라는 표현은 맞지 않은 말이었다.
에밋은 작은 웃음과 함께 ‘과연.’ 이라는 한 마디로 내 의견에 동조했다.
◈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다.
아니, 천장이라는 표현은 부적절했다. 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은 경계나 구분조차 없었으니까. 그냥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다는 감각에 의존해서 멋대로 바닥과 천장을 구분할 뿐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것이냐.]에파가 님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해주셨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와 달리 당황하신 기색이 역력하다는 점 정도였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용사라는 이름에 걸맞은 일을 좀 많이 하고 다니는 거 같습니다.”
이에 기도를 하는 것처럼 자세를 취하며 농담과 함께 예를 갖췄다.
차이는 나에게도 있었다. 에파가 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머리를 울리고 몸을 울렸지만, 과거와 달리 꽤 버틸 만했다. 이 정도면 지난번보다는 편하게 말씀을 경청할 수 있을 것 같다.
[농을 던질 정도의 여유가 있다는 것은 자각하면서 그 여유가 어디서 나오는지는 모르는 눈치로구나.]지난 만남에서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으셨던 에파가 님이셨지만, 이번엔 새하얀 왕좌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오셨다. 그러자 대화만 나눌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중압감이 다시금 나를 압박했다.
“저기, 에파가 님?”
[참거라. 네 상태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거리를 좁혀야 한다.]그게 거리 좀 좁힌다고 해결이 되는 수준이라면 그냥 앉아서도 해결이 가능하시지 않을까요? 라는 말이 턱 끝까지 올라오려다가 쏙 들어갔다.
지금까지는 그저 물리적인 거리에 불과하다고 느꼈던 에파가 님과 나의 거리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에.
처음 두 걸음을 떼셨을 때까지는 평범했으나, 세 번째 걸음을 딛는 순간 대충 셰릴만하다고 여겼던 에파가 님의 신체神體가 나만큼 커졌다.
[일반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걸 이해했으면서도 이런 거리는 또 일반적으로 생각했더냐?]사뭇 진지하던 에파가 님이 내 반응을 읽고는 헛웃음을 터트리셨다. 그러자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한 중압감이 느껴지며 하마터면 정신줄을 놓을 뻔했다.
[지금은 여기까지가 한계로군.]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주셔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젠 농담은커녕 말할 여유조차 없었거든. 한 스무 걸음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겨우 네 걸음만에 이런 차이가 생기다니. 코앞까지 당도하면 대체 어떻게 될지 감도 안 온다.
그 상태로 잠깐 나를 바라보시던 에파가 님은 다시 걸음을 돌려 왕좌로 돌아간 뒤에야 입을 여셨다.
처음엔 나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으나…
[편린이 보이는구나.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신성의 편린이.]…이어진 에파가 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생각을 달리하고 말았다.
이거, 악신의 잔재랑 많이 엮여서 이단 취급받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