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touch Eldmia Ega RAW novel - Chapter (523)
어김없이 내 생각을 읽은 에파가 님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내 가설을 부정해주셨다.
[이상한 생각 말거라. 원래 스스로의 위업을 쌓는 이들은 다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니. 나도 그랬다.]“예?”
분명 승천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대뜸 이렇게 과거 썰을 풀어주실 줄은 몰랐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에파가 님은 여전히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설명을 이어가실 뿐이었다.
[말 그대로 편린에 불과하기도 하고, 설령 필멸자들이 발견한다 해도 신성력 정도로 치부하는 수준이다. 작은 불씨와도 같아서 평범하게 지낸다면 그대로일 테지만, 이대로 나아가면 점차 몸집을 키워나가겠지. 너 하기 나름이다.]“세상이 저를 억까 하는 건 어찌해야 합니까.”
[…내가 너희 생각과 기억을 읽을 수 있다고는 해도 갑자기 그런 단어를 쓰면 헷갈린다. 아무튼, 그건 어찌할 방도가 없구나.]그리 말하며 자연스럽게 왕좌에 턱을 괸 에파가 님은 다른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짧게 고민하시다가 다시 입을 여셨다.
[딱히 너를 부르지 않았음에도 이곳에 닿을 수 있었던 이유가 그 편린 덕인 거 같구나. 용의 피가 영향을 준 것도 있지만… 악신의 잔재를 흡수한 에스테의 힘이 강해진 것도 원인인 것 같고.]“아, 안 그래도 여쭙고 싶은 게 좀 있었는데 이번엔 좀 가능할까요?”
[지금 네 반응을 보아하니 조금은 가능할 거 같구나. 참고로 에스테는 원래 저런 성격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옛날엔 저런 성격이었다가 맞겠지.]분명 가장 먼저 물어보고 싶었던 내용이긴 했으나 어째서 정확히 말해주셨는데 더 알아먹지 못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걸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생각을 읽어 주시는 에파가 님이시니 질문하는 대신 경청하기 편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자, 에파가 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리면서도 친절히 설명을 이어나가주셨다.
[내가 승천하기 전에 사용했던 성창 에스테는 지금도 여전히 대륙에 존재한다. 연결이 끊겨서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성물들과 함께 마왕군의 손에 들려 있겠지. 네 검에 깃든 에스테는, 내가 직접 개입하여 벌을 내렸을 당시 과도하게 쏟아진 신성력이 빚어낸 의도치 않은 결과에 가깝다.]요약하자면 나와 함께 업적작을 하면서 격이 오른 검에 에파가 님의 신성력이 꽂혔더니 에스테 복사 버그가 터진 꼴이었다. 내 타고난 요약 능력에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신 에파가 님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 누르시면서도 말을 멈추지는 않으셨다.
“…그럼 성창 에스테의 성격은 많이 다릅니까?”
[자아를 지닌 존재가 성숙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지.]과연, 한 방에 납득했다. 쟤보다는 어른이라 이거지.
에스테에 대한 설명 다음에는 용의 피를 한 바가지 뒤집어쓴 걸로 인해 마력을 비롯한 기타 등등의 변화가 있을 거라는 내용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알려주신 에파가 님은, 당신의 말씀을 들으면서 생겼던 의문에 대해서도 먼저 언급해주셨다.
[이미 품어버린 신성이 커지는 걸 막을 방법은 없다. 그건 네 행동이 세상에 끼친 영향의 증거와도 같은 것이니까. 처음에 말했듯 그저 평범하게만 살면 편린에 그친다. 허나 네가 선택한 길을 계속 따라 걷다보면 계속 커진다. 네가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로 인한 변화는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말하는 건 좋지 않아.]“어째서인가요?”
선입견을 가지게 되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에파가 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내가 그걸 성실한 신도들처럼 다 새겨듣고 그대로 이행하려는 놈도 아니니까.
다행히 이번에도 내가 의문을 지니기가 무섭게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지금 나누고 있는 것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다. 신도들에게 내리는 계시와도 같은 것이지. 그리고 계시라는 건 많은 정보를 이해시키려고 할수록 필멸자에게 부담이 된다. 네 기억을 기반으로 예시를 든다면… 너무 많은 지식을 한 번에 얻어 뇌에 과부화가 일어나는 것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지.]“…튕겨 나가겠군요.”
[일어나서도 여파가 있을 정도로 튕겨 나가겠지. 계시가 추상적인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는 거다. 아직은 이 정도가 적당하다.]설명을 듣고 나니 지금도 말을 나눌 때마다 오락가락하는 정신적 부담이 이해됐다.
결국 계시는 일종의 정보 다운로드라는 소리다.
내가 지니고 있는 정보가 많다면 안 받아도 되어서 부담이 적지만 없는 정보라면 다 받아야 하니 데이터가 많이 나간다. 그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 데이터 초과로 강제 사출당해 현실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증거로, 방금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얼굴 반쪽이 날아간 것처럼 크게 휘청거려야 했다. 앞서 나눴던 긴 대화들을 다 합친 것보다도 큰 충격에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에파가 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마지막 질문은…]황급히 의식을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손을 떠난 것인지 쉽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에파가 님은 어떻게든 아득바득 버티려는 나를 보며 미소와 함께 대답해주셨다.
[순혈주의 용들은 혼혈을 극도로 혐오하기 때문이다.]그 미소는 신답지 않게 어딘가 처량해 보였으나, 입에 담겨 나온 정보의 파괴력만큼은 조금도 처량하지 않았다.
“요, 용사님!”
나는 마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에 버금가는 충격 속에서 눈을 떴다.
“정신이 드십니까 용사님!”
“선조들이시여 감사합니다…”
눈을 뜨면서 경기를 일으키듯 움찔 거렸더니 미처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내 안부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중 반은 아는 얼굴이지만 나머지 반인 수인들은 전혀 모르는 얼굴이라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는 사이, 열심히 에파가 님이나 조상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이들을 뚫고 다가온 익숙한 얼굴이 물잔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잘잤나?”
“…제가 얼마나 잤습니까?”
“내일까지 잤으면 딱 일주일을 채웠을 거야. 사람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네. 혹시 혼란을 피하려고 일부러 새벽에 깬 건 아니지?”
“그런 놈이 얼마나 잤는지 물어보겠습니까.”
자그마치 6일짜리 숙면이라. 왜 성자 성녀들이 계시를 받는 과정이 철저한 보안 속에서 이루어지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군. 에밋이 건네준 차가운 물을 마시며 정신을 차린 나는 어깨와 목을 풀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최대한 가벼운 동작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감격해서 울 것 같은 성직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의도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침대 밖으로 벗어나는 게 힘들 정도로 달라붙는 사람들 때문이기도 했다.
“성녀님과 대족장님을 찾아뵈어야겠습니다.”
다행히 나를 간호하느라 지친 이들은 더 이상 나를 가로막지 않았다.
그렇게 에밋과 함께 게르를 벗어나자 마지막 기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숙영지가 나를 반겼다. 장례식 겸 축제라 그런지 사방팔방에 돗자리와 술통이 깔려 있어서 사람과 음식만 채워지면 언제라도 축제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예상보다 훨씬 성대한 준비에 할 말을 잃은 나는, 에밋에게 설명을 부탁하기보다 그냥 에스테부터 회수하기로 마음먹었다.
“몸은 괜찮나?”
“예. 어디 문제가 있어서 길게 잔 게 아니라 그냥 적응하는 과정이었나봅니다.”
“적응…?”
“용의 피에 영향을 좀 받은 거라고 하셨거든요.”
“누가… 아, 계시를 받은 거였군.”
놀라는 일 없이 덤덤하게 반응하는 에밋에게 굳이 부연 설명할 것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실제로 구구절절 설명할 생각이 없기도 했지만 당장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에파가 님의 마지막 대답뿐이었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 마지막 질문은 ‘왜 이라노레프가 마족을 사생아라 부르는가.’ 였다.
이에 에파가 님은 혼혈이라 답하셨다. 덕분에 왜 대륙에 있는 수많은 종족들 중 용족과 마족만이 마력을 쓸 수 있으며 머리에 뿔까지 달렸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순혈주의 용’들’이라는 표현도 신경이 쓰였다.
영락없이 이라노레프만 맛탱이가 가서 지랄 염병을 떠는 거라 여겼거늘, 정말로 놈이 수많은 순혈주의 용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 이야기가 조금 복잡해진다. 자기들끼리 모종의 커넥션이 있어서 이라노레프가 죽었다며 노발대발하고 날아오는 미친용이 더 있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런 새끼들이 얼마나 더 있는 거지? 지금까지는 이라노레프가 한결같이 블랙컨슈머처럼 지랄을 해서 참고 있었던 것에 불과한 거라면?
애초에 용이라는 존재들이 워낙 속세에 관심이 없는 편인지라 쓸데없는 걱정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 건에 대해서는 성녀님과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리 생각하며 이라노레프의 시체가 있는 곳에 도착하니 멀리서부터 내 존재를 느낀 것인지 에스테가 연신 검신을 떨어댔다.
“주인을 알아보고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구만.”
“개는 한 마리로 충분한데 말이죠.”
자는 사람들마저 깨우는 게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시끄러운 녀석의 만행에 한숨을 내쉬며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자마자 에스테가 쏘아대는 속사포같은 말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비록 내가 의도한 건 아니었다고는 해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끝까지 다 들어 주었다.
어떻게 자신을 6일이나 이런 꼴로 방치할 수 있냐는 식의 하소연이 반복될 무렵 적당한 사과와 함께 에스테를 뽑아드니. 에파가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확실히 악신의 잔재를 꾸역꾸역 주워 먹고 힘이 커진 것이 체감됐다.
과도하게 집중된 이목과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감탄사만 아니었으면 이라노레프의 시체에라도 몇 번 칼질을 해봤겠지만… 당장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성녀님의 게르로 향하기로 했다.
자고 있는 성녀님을 직접 깨울 필요는 없었다. 이미 내가 묵고 있던 게르를 벗어나자마자 누군가가 황급히 와서 성녀님을 깨운 모양인지, 게르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엔 이미 성녀님이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약속 시간에 늦은 건 아니겠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성녀님께 가벼운 농담처럼 질문하자, 억울하게도 원망의 눈초리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