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03
1003회. 당신 정말 ‘산의 부족’인가요?
에스카토스 왕국.
벨룸성.
콜로르 궁.
정오 무렵.
왕의 관저인 콜로르 궁에 에스카토스 4세와 주요 귀족들이 모였다.
아직 캄포데네브의 참사가 알려지지 않은 터라 귀족들은 옆사람과 벌써부터 이후의 일정을 속삭이고 있었다.
그때 북방 삼대영주 중 하나인 베르나르도 후작이 굳은 얼굴로 왕의 앞에 섰다.
뒤늦게 그의 비장한 표정을 본 귀족들이 그를 주목했다.
“에스카토스 4세 전하. 지금으로부터 석 달 전, 그러니까 지난해인 SR(Settling in Rodina) 4421년 11월 20일에 코드란테스 백작령에서 빙벽의 균열이 발견되었습니다.”
에스카토스 4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빙벽? 저 창조신의 스쿠툼(Scutum, 방패)을 말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순간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스쿠툼은 인류가 로디나 대륙에 정착한 이래로 지난 4천 년의 역사상 단 한 차례도 문제가 일어난 적이 없어서다.
“균열의 크기는?”
“히르헤라 지역에 있는 균열은 최초 발견 시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였으나……. 1월 현재 가로 2미터, 세로 3미터로 확대되었습니다.”
“균열을 보수하지는 않았소?”
“지난 12월부터 두 달간 북방 3개 영지가 합동으로 보수 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왕궁으로도 보수 작업에 관한 긴급 보고서를 올렸습니다만.”
베르나르도 후작이 읽었냐는 눈으로 왕을 보았다.
그러자 에스카토스 4세가 계면쩍은 얼굴로 탁자 위의 서류 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다시피 연말 보고서가 쌓여서 아직 확인하지 못했소.”
베르나르도 후작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연말 보고서는 핑계고 파티를 개최하느라 읽어 볼 틈이 없었을 것이다.
왕궁에서 가장 바쁜 때가 연말과 새해라고 하지만 너무한다 싶다.
그러나 후작은 설사 왕이 알았다 해도 결과를 바꾸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에 그냥 털어 버렸다.
에스카토스 4세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훌륭한 대처요. 그런데 조금 전에 균열이 더 커졌다고 하지 않았소?”
“제가 열 일 제쳐 두고 왕성까지 올라온 것은 바로 그 문제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사흘 전 균열을 수리하던 세 개 영지군 병사 일천백 명과 기사 백 명이 전멸했습니다. 생존자는 코드란테스 백작과 영지군 병사 하나가 전부입니다.”
에스카토스 4세가 황망한 눈으로 베르나르도 후작을 보았다.
균열에서 잠깐 놀랐다가, 복구 운운하기에 그러려니 했는데, 전멸이란다.
“왜 코드란테스 백작과 함께 오지 않았소?”
“그와 영지군 병사는 중상을 입어 거동이 불가능합니다. 지금 코드란테스 백작은 백작의 성에서, 그리고 영지군 병사는 엔아르케에서 치료 중에 있습니다.”
엔아르케는 베르나르도 후작령에 속한 마을이다.
그러니 생존한 영지군 병사를 후작이 데리고 갔다는 소리였다.
베르나르도 후작은 슬쩍 왕과 귀족들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에스카토스 4세와 귀족들은 생존한 영지군 병사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운 좋게 살아남은 일개 영지군 병사보다는 소드마스터의 안위가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건 베르나르도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후작은 히르헤라 균열에서 생긴 일에 대해 자세히 들을 요량으로 병사를 거둔 것이었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대충 병사의 일을 매듭지으려 할 때, ‘왕실의 수호검’이라 불리는 스타우로스 에스카토스 공작이 질문했다.
“베르나르도 경, 그 영지군 병사의 부상 정도는 어떻소?”
“그 역시 코드란테스 백작만큼이나 중상을 입었습니다.”
후작은 왕실의 일원이자 소드마스터인 스타우로스 공작에게 정중히 답했다.
“코드란테스 백작과 영지병이 제 발로 백작 성과 엔아르케로 돌아갔을 리는 없고, 후작의 사람들이 구출한 것이오?”
“그렇습니다. 균열 수리를 위해 떠난 베르나르도 남작의 연락이 끊겨서 기사단을 파견했다가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사건 현장도 확인했겠구려. 소드마스터와 천 명의 병사가 몰살당한 원인이 무엇이오?”
지금까지 대화를 이끌어 가던 에스카토스 4세는 숙부(叔父)인 스타우로스 공작이 나서자 한발 뒤로 빠졌다.
어차피 소드마스터인 숙부에게 맡기려고 했는데 알아서 나서 주니 슬그머니 떠넘긴 것이다.
다른 귀족들도 그런 기류를 읽었는지 아무도 베르나르도 후작과 스타우로스 공작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베르나르도 후작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코드란테스 백작의 말이나 현장 상황을 보면 히르헤라에 메테오 스웜(Meteor Swarm)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
순간 왕은 물론 회의장의 다른 귀족들도 숨을 멈췄다.
마법에 입문하여 3서클까지의 마법사를 ‘디사이플(Disciple)’이라 부른다.
그러다 4서클에 도달하면 비로소 ‘메이지(Mage)’가 되고, 왕성에서 남작의 작위를 받는다.
궁정 마법사를 포함해 대륙의 유명한 마법사들 대부분이 ‘메이지’라고 보면 된다.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마법사가 ‘메이지’인 셈이다.
그러나 마법사의 세계에서 ‘메이지’는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
7서클에 도달한 최고 마법사를 ‘마구스(Magus)’라 하는데, ‘마구스’가 되면 제국에서 공작의 작위를 주고 모셔 간다.
‘마구스’가 최후 경지라는 9서클에 도달하면 제국의 황제조차 그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
9서클 마법사의 마법 영창 한 번이면 황도(皇都)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마법사와 인간들은 9서클 마법사를 ‘마그눔 오프스(Magnum opus)’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4천 년의 로디나 대륙 역사상 ‘마그눔 오프스’는 출현한 적이 없다.
사람들은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마법사 ‘마그눔 오프스’를 축복이자 저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메테오 스웜’은 세상에 알려진 가장 유명한 9서클 마법이다.
혼자서 제국조차 멸할 수 있는 ‘마그눔 오프스’가 에스카토스 왕국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충격인데, 인류를 지키는 빙벽에 메테오 스웜을 퍼부었다니!
왕실의 소드마스터 스타우로스 공작마저도 놀랐는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숙부의 침묵이 길어지자 에스카토스 4세가 확인하듯 물었다.
“메테오 스웜이 확실하오? 코드란테스 백작이 그렇게 말했소?”
베르나르도 후작은 대답 대신 품에서 밀봉된 봉서를 꺼내 왕에게 건넸다.
“코드란테스 백작이 전하께 올리는 전투 보고서입니다.”
에스카토스 4세는 전투 보고서를 읽고 숙부에게 넘겼다.
전투 보고서를 읽은 스타우로스 공작은 그것을 다시 왕에게 돌려준 뒤, 베르나르도 후작에게 질문을 이어 갔다.
“메테오 스웜에서 살아남은 영지병이라……. 그게 가능하오?”
“운이 좋았습니다. 그가 발견된 크레이터에 중첩된 흔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다른 운석이 그 위에 또 떨어졌다면 그도 죽었을 겁니다.”
그제야 스타우로스 공작은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는 왕을 향해 돌아섰다.
“전하. 그것이 정말 메테오 스웜이라면……. 북방의 영주들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왕국에서 직접 조사를 해야 합니다.”
에스카토스 4세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숙부께서 맡아 주시겠습니까?”
“전하께서 팬텀 기사단과 비공정(飛空艇)을 지원해 주신다면 제가 맡아 보겠습니다.”
숙부의 역제안에 에스카토스 4세는 잠시 머뭇거렸다.
‘팬텀 기사단’은 일명 ‘머스킷 기사단’으로 불리는 ‘마력 총사대’고, 비공정은 마력 부유물을 이용한 하늘의 배다.
팬텀 기사단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비공정이 마음에 걸렸다.
비공정이 몇 대 된다면 흔쾌히 내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국에 비공정은 딱 한 대.
비공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한편, 왕성에 변고가 생겼을 때 탈출하기 위한 최후 수단으로, 저 척박한 대설원에서 굴릴 물건이 아니었다.
“숙부, 비공정을 꼭 써야겠습니까?”
“빙벽을 조사하려면 비공정이 있어야 합니다.”
“설마 빙벽 너머 타메이온(마족 영역)까지 조사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무리 저라고 해도 그 정도의 담력은 없습니다.”
스타우로스 공작은 단호하게 부인했다.
타메이온에 뭐가 있는 줄 알고 비공정으로 넘어간단 말인가!
고민하던 에스카토스 4세는 조건부로 허락했다.
“비공정으로 빙벽을 넘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내어 드리겠습니다.”
비공정 한 대 값은 왕실의 십 년 재정과 맞먹는다.
그러니 에스카토스 4세의 입장에서는 비공정을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기사단의 이동 수단으로만 사용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에스카토스 4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우로스 공작은 그 자리에서 스쿠툼 조사대를 결성하고, 귀족들의 지원을 이끌어 냈다.
***
에스카토스 왕국 북방지역.
베르나르도 후작령.
엔아르케.
말라 있던 입술에 물이 닿자 본능적으로 ‘꼴딱꼴딱’ 삼키던 연적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에 젊은 여성의 얼굴이 들어왔다.
“……누님?”
그는 남궁연이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물을 먹여 주었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제야 연적하는 그녀가 남궁연이 아님을 깨달았다.
남궁연의 말이라면 자신이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억지로 눈을 몇 차례 깜빡이자 여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역시나 금발을 한 이십 대 초반의 여자였다.
‘왕들의 하늘’에서 보았던 천족 여전사들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다.
앰버는 청년이 정신을 차리자 살며시 받치고 있던 머리를 내려놓았다.
정신을 차린 남자의 머리를 안고 있기가 뭐해서다.
그녀의 외침에 치료사 일리아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일리아나는 청년의 눈을 응시하며 물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드나요?”
“…….”
“어느 영지에서 왔어요?”
“…….”
말을 알아듣지 못한 연적하가 눈만 끔뻑이자, 지켜보던 앰버가 끼어들었다.
“조금 전에 알아듣지 못할 이상한 말을 했어요.”
“이상한 말?”
“네, ‘제제’라고…….”
“말이 아니라 신음 소리를 잘못 들은 거 아냐?”
“말을 못하는 걸 보니 그런가 봐요. 머리도 심하게 다쳤는데, 그래서 말을 못하는 걸까요? 잭슨도 머리를 다치고 한동안 그랬잖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말을 못 알아듣는 걸 수도 있어.”
“에? 못 알아듣는다고요?”
“푸토코아 백작령에서 영지병을 모집할 때 ‘산의 부족’에서도 끌어모았다고 들었어. 봐 봐. 머리카락이 까맣잖아. 이 사람이 푸토코아 백작령 소속이고, ‘산의 부족’ 출신이라면…….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어.”
순간 앰버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이 남자가 수인(獸人)들과 섞여 산다는 그 ‘산의 부족’이라고요?”
앰버는 청년의 머리를 받쳤던 손을 ‘탁탁!’ 털었다.
흑발의 청년이 수인족 여자들과 뒹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몹시 불결했던 것이다.
이윽고 그녀는 굳은 얼굴로 청년에게 물었다.
“이봐요. 당신 정말 ‘산의 부족’인가요?”
두 사람이 알아듣지 못할 말로 떠드는 동안 몸 상태를 점검하던 연적하가 시선을 돌렸다.
‘어라?’
조금 전까지 호의적이던 여자가 불쾌한 얼굴로 쏘아보고 있었다.
‘이런 제길.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있나.’
“뭐라고 했어요?”
연적하의 물음에 앰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맞네, 맞아! 치료사님도 이상한 소리 들었죠? 쎈마? 그거 ‘산의 부족’ 말 맞죠?”
“몰라. 나도 ‘산의 부족’을 만나 본 적이 없거든. 게다가 야인(野人)들은 부족마다 조금씩 말이 달라서…….”
“세상에! 부족마다 말이 다르다고요? 야인이 몇 명이나 된다고.”
앰버는 미개인 보듯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감정은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연적하는 자신에게 물을 먹였던 여자의 돌변한 태도에 고개를 저었다.
‘네 마음대로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