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09
1009회. 일리아나 님도 보셨어요?
일리아나가 엘리오를 지그시 응시했다.
왠지 그라면 비공정이 북방 변두리까지 날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리아나 님이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연적하는 시치미를 뚝 뗐다.
아무리 자신이 둔하다 해도 빙벽의 균열에 대해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일리아나는 반신반의했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자신과 그의 관계가 그 정도로 친밀한 것은 아닌 까닭이다.
엘리오의 붕대를 정리하던 일리아나가 말을 돌렸다.
“이제 클루톤으로 떠나실 건가요?”
베르나르도 후작에게 남작의 작위를 받으려면 클루톤으로 가야 하니 그렇게 물은 것이다.
“아뇨. 그보다는 들러 볼 데가 있어서요.”
“후작님을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 영주님들은 참을성이 없거든요.”
연적하가 일리아나를 힐끔 보았다.
그녀와 대화하다 보면 그것이 자신에 대한 호의 때문인지, 베르나르도 후작의 지시 때문인지 헷갈릴 때가 종종 있다.
“아니, 그 전에 기사에게도 주인을 선택할 자유가 있지 않나요?”
“그야 물론이지요. 하지만 야인에게 작위를 내려 줄 영주는 많지 않아요.”
“아, 또 그런 걸림돌이 있군요.”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북방의 영주들 중에서 베르나르도 후작님은 훌륭한 귀족이에요.”
“참고하겠습니다.”
엘리오의 고집을 느낀 일리아나가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겉으로 보기에 꽤나 젊어 보이는데 오라(Aura)를 사용하니 너무 궁금했다.
“스물일곱요.”
“와아! 그렇게 젊은데 벌써 오라를 쓰세요? 정말 믿어지지 않네요. 저는 스물다섯이에요.”
연적하는 계면쩍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 치료사 아가씨 내가 무림에서 고금제일인 소리 들었다는 걸 알면 까무라치겠네.’
“영기의 수련도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 대단하세요.”
순간 연적하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구주의 종문을 제외하고 그런 소리를 듣기는 처음이다.
“저어, 일리아나 님?”
“네?”
“마나 유저와 영기 수련자의 차이가 왜 그렇게 심한지 혹시 아세요?”
“아!”
일리아나가 애잔한 눈으로 엘리오를 보았다.
영기 수련은 ‘마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야인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이자, 열등인의 낙인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마나는 창조신의 축복이지만, 영기는 수인(獸人)이 발견한 수련법이라서 그래요.”
“…….”
연적하는 그녀의 말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 그를 위해 일리아나가 설명을 이어 갔다.
“마나는 선택받은 사람들만 느낄 수 있어요. 사람이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죠. 마나를 각성한, 흔히 말하는 ‘마나 유저’들은 마나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해요. 우리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정말 뜬구름 잡는 소리지만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마나가 만물의 근원이라니…….”
“그럼 영기는요?”
“영기의 뿌리는 생명체의 정기(精氣)잖아요. 사실은 그것 때문에 수인족과 야인이 더 이상한 취급을 받고 있는 거예요.”
“아니, 영기가 어때서요?”
“영기 수련과 마족들이 마력을 얻는 과정이 겉으로 보기에 비슷하거든요. 마족들도 생명체의 정기를 흡수해서 마력을 키워 나가니까요.”
“마족이 정기를 흡수해서…… 비슷한 취급을 받는 거예요?”
영기 수련자인 연적하는 그 소리만큼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맞아요. 수인과 야인은 자기의 정기를 수련하고, 마족은 다른 생명체의 정기를 빼앗죠. 영기와 마족들의 마기는 완전히 다른데, 영기 수련자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들도 많아요. 마족처럼 다른 생명체의 정기를 은밀히 갈취하는 거 아니냐고.”
“허! 그럼, 마족들의 마기도 마나보다 약해요?”
“그건 아니에요. 마족들은 마신(魔神)에게 서약을 하는데, 그렇게 하면 마신의 능력을 일부 가져다 쓸 수 있대요. 그런 경우 마나 유저보다 훨씬 강하다고 들었어요.”
“마신이면 카마 데비아스를 말하는 거예요?”
“예? 카마 데비아스는 태양신이라고 했잖아요. 마신은 마계를 창조한 신으로 암흑 그 자체예요. 태양신 카마 데비아스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죠.”
“아, 그럼 혹시 카마 데비아스는 좋은 신(good god)이에요?”
“당연하죠. 제국에서 섬기는 주신인데요?”
“와…….”
이 순간 연적하는 자신의 계획이 순탄치 않음을 깨달았다.
천자마가 제국의 주신일 줄이야.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있는 그에게 일리아나가 계속해서 말했다.
“참, 흑마법사들을 조심하세요.”
“왜요?”
“흑마법사들 중에는 마족처럼 마신에게 자신의 영혼을 판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들을 ‘트레이더(Traidor)’라고 하는데, 마족처럼 사람의 정기와 영기를 빼앗아요. 트레이더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수인과 야인이에요.”
“아! 영기 때문에요?”
“네. 생명체가 가진 정기보다 영기가 훨씬 강력하잖아요. 하여튼 수인과 야인이 트레이더를 만나면……. 그날로 인생 끝났다고 보면 돼요.”
고개를 주억거리던 연적하가 물었다.
“모든 흑마법사들이 다 트레이더는 아니죠?”
일리아나가 ‘흑마법사’와 ‘트레이더’를 따로 구별해 언급한 걸 보면 왠지 그럴 것 같았다.
“그럼요. 대부분의 흑마법사들은 저주나 스피릿 포이즌(spirit poison)이라는 무형의 독마법을 연구해요.”
“스피릿 포이즌?”
“대상의 영혼을 중독시켜서 즉시 죽이거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부리는 걸 스피릿 포이즌이라고 해요. 이건 알 수도, 막을 수도 없어서 제국과 왕국들이 금지한 마법이에요.”
“그것도 좋은 건 아니네요? 왜 그런 나쁜 짓들을 한대요?”
“자기들의 음침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겠죠. 흑마법은 서클이 높지 않아도 위력을 발휘하거든요. 그래서 재능 없는 마법사들이 한번 그 유혹에 빠지면 헤어 나오질 못한대요.”
“그럼 고위 마법사들 중에는 흑마법사가 없나요?”
“그들도 치명적인 흑마법 한두 개는 익혔을 거예요. 대응 차원에서라도.”
“대응만?”
“풋! 고위 마법사들은 흑마법을 쓰지 않더라도 충분히 다른 사람들 위에 설 수 있잖아요. 고위 마법사가 되면 못 할 일이 없는데, 뒤에서 손가락질당하면서 흑마법을 쓰겠어요?”
“아, 그건 또 그렇네요. 오늘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남들도 다 알고 있는 것들인걸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오히려 제가 부끄럽네요.”
일리아나가 얼굴을 붉혔다.
로디나 대륙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로 그런 소리를 들으니 민망하기까지 했다.
그때 갑자기 그녀의 조수인 앰버가 헐레벌떡 방으로 뛰어들었다.
“일리아나 님! 밖으로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왜?”
“낯선 사람들이 이상한 짐을 던져 두고 갔어요.”
“이상한 짐?”
“네, 커다란 자루인데…….”
앰버가 말끝을 흐렸다.
“약재 자루 아냐? 그런 거 몰래 기부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일리아나의 말에 앰버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루에 핏물이 내비쳐요.”
그 말에 일리아나가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치료소 문제라고 생각한 연적하는 차분하게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다행히 짧은 기간이지만 내외상이 다 나았다.
치료사로서 일리아나의 실력이 꽤 좋은 것 같았다.
연적하가 흡족한 얼굴로 다음 목적지를 생각할 때, 일리아나가 굳은 얼굴로 돌아왔다.
“왜요?”
“하아! 내가 영주들을 쉽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죠.”
“예?”
“자루에 사람의 귀가 가득 담겨 있었어요.”
“사람의 귀요?”
연적하가 황당한 눈으로 일리아나를 보았다.
악질적인 녹림도들이 종종 하는 짓거리를 왜 치료소에?
“야인들의 귀예요. 틀림없이 푸토코아 백작가에서 보냈을 거예요.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
한순간 연적하는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행동으로 무고한 야인들이 살해당했다니…….
우두커니 서 있던 연적하가 메마른 음성으로 물었다.
“……몇 개나 되던가요?”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삼백 개 정도……. 본보기로 부족 하나를 몰살시킨 것 같아요. 틀림없이 ‘산의 부족’ 사람들일 거예요.”
“푸토코아 백작가의 가신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아요?”
“왜요? 정말 복수라도 하게요? 꿈도 꾸지 마세요. 그리폰 기사단의 목표물이 되면 엘리오 님은 하루도 살아남지 못해요. 게다가 북방 영주들은 에스카토스 왕국과 로디나 대륙을 지키는 영웅들로 칭송받고 있어요. 그럴 수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엘리오 님이 푸토코아 백작에게 해를 입히면 왕국의 반역자가 될 거예요.”
그러자 연적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맹세하건대, 야인들의 죽음과 관계된 푸토코아의 사람들은 모두 죽을 겁니다. 백작과 그리폰 기사단은 물론 귀족들까지, 예외는 없어요.”
순간 일리아나는 ―마치 엘리오가 우주의 중심이 된 것 같은― 기이한 느낌에 흠칫 몸을 떨었다.
잠시 후 밖으로 나간 연적하는 마당을 가로지르다 예의 그 ‘귀가 담긴 자루’를 발견했다.
핏물이 배어 나온 자루를 묵묵히 내려다보는 그의 곁으로 일리아나가 다가갔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야인의 억울한 죽음이 이것만은 아니니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뿐이에요.”
“부탁 하나 해도 돼요?”
“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해 드릴게요.”
“화장이든 매장이든, 이들을 야인의 장례법대로 장사 지내 주세요.”
“그럴게요.”
일리아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어차피 그건 엘리오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하려고 했던 일이었다.
“고맙습니다. 히르헤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히르헤라요? 그쪽으로 가는 길은 모두 막혔다고 하던데…….”
“어디로 가면 되는지 방향만이라도 알려 주세요.”
일리아나가 동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 방향으로 계속 가다 보면 히르헤라가 나와요. 병사들이 길을 막고 있다니까, 오히려 찾기는 쉬울 거예요. 정 모르겠으면 북쪽의 빙벽을 따라 동쪽으로 계속 가도 되지만, 그건 너무 어려워서 추천하지 않겠어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연적하가 무심코 읍(揖)을 해 보였다.
일리아나는 고개를 숙여 그의 인사에 화답했다.
작별 인사를 마친 연적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쓸쓸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일리아나의 곁으로 앰버가 다가갔다.
“사고뭉치가 떠나니 속이 개운하네요. 작위를 받아야 할 테니 후작님을 찾아가겠죠?”
“그럴 테지.”
“고생 많이 하셨어요.”
“고생은 무슨, 치료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에이, 그래도 일리아나 님이 야인의 옷까지 다 갈아입혔잖아요. 세상에 어느 치료사가 야인의 옷을 갈아입혀요? 물론 야인인 줄 모르고 그러신 거지만.”
“네가 못 하겠다고 해서 대신 해 준 거잖아.”
“헤헤, 온몸이 피에 절은 걸 보니까 진짜 못 벗기겠더라고요. 가슴이나 배가 터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으휴! 징그러워.”
앰버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겁이 많아서 치료사 하겠니?”
“정 안 되면 약제사라도 하죠 뭐. 그런데 일리아나 님도 보셨어요?”
“뭘?”
“야인이 처음 실려 오던 날 밤에……. 그의 이마에서 빛이 났었다고 하던데. 사실이에요?”
“누가 그래?”
“크리스토퍼요.”
일리아나가 눈을 찌푸렸다.
잡일을 하는 꼬마가 우연히 그걸 보고 퍼트린 모양이다.
“야광충 한 마리가 방에 있었어. 그걸 봤던 모양이네.”
“아!”
앰버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고위 사제들이나 가지고 있다는 성흔(stigmata)이 야인에게 나타났을 리가 있나.
일리아나는 앰버와 함께 귀가 담긴 자루를 뒷마당에 매장하고, 그 앞에 야인들이 좋아하는 향을 피웠다.
그리고 구중천(九重天)을 지키는 여신 샤스트라 파라크티에게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무사히 끝마치게 도와주세요.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