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20
1020회. 사흘간 숲에 숨어 지냈다?
알파 중대에서 가장 먼저 엘리오와 파비안을 발견한 사람은 1소대의 기사 케일이었다.
균열에서 뭔가 걸어 나오자 다급히 신호용 호각을 힘껏 불려던 그의 입에서, 호각이 툭 떨어졌다.
“파비안?”
균열에서 나온 것은 사흘 전 균열로 들어갔던 파비안과 엘리오였다.
“파비안 경! 엘리오 경!”
케일은 미친놈처럼 소리 지르며 균열로 달려갔다.
마수가 뜸한 틈에 쉬고 있던 알파 중대 병사들이 이끌리듯 하나 둘 균열 입구로 모여들었다.
이윽고 무사 생환한 엘리오와 파비안을 본 병사와 기사 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뒤늦게 오스카 아비드 자작과 데니스 로빈 남작이 다가오자 알파 중대 병사들은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갔다.
오스카 아비드 자작을 발견한 엘리오와 파비안이 고개를 숙였다.
“참모님.”
“인사는 됐네. 타메이온의 정찰을 마치고 지금 돌아온 것인가?”
오스카 아비드 자작은 ‘타메이온’을 힘주어 말했다.
혹시라도 다른 곳을 정찰하고 왔다면 정정할 기회를 준 것이다.
“예.”
“두 사람 모두?”
오스카 아비드 자작의 시선이 이번에는 파비안을 향했다.
“그렇습니다.”
파비안도 부인하지 않았다.
자신이 균열로 넘어간 것을 알파 중대가 보았기에 부인할 수도 없었다.
“고생들 했네. 중대장.”
자작의 부름에 데니스 로빈 남작이 앞으로 나섰다.
“예.”
“지금 즉시 이 두 사람을 따로 격리시키도록 하게. 심문관을 통해 정찰 내용에 대해 조사하도록 하겠네.”
참모인 오스카 아비드 자작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전문 심문관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순간 파비안은 저도 모르게 엘리오를 보았다.
하지만 엘리오는 남의 일인 것처럼 무심한 얼굴이었다.
결국 타메이온에서 무사 귀환한 엘리오와 파비안은 데니스 로빈 남작에 의해 각기 다른 장소로 옮겨지게 됐다.
***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심문관 칼 데인 남작은 이십여 년 전 영지전에서 사신이라 불리던 사람이다.
귀족 출신의 평민(라무스)이던 그는 그때의 공으로 남작이 되었고, 지금은 후작의 심문관으로 일하고 있다.
칼 데인 남작이 엘리오를 지그시 응시했다.
별다른 말 없이 15분 정도 서류를 읽던 칼 데인 남작이 불쑥 물었다.
“‘산의 부족’ 출신이라고?”
“예.”
“거참, 이상하군. 경의 검술 경지면 야인 부족들 사이에서 유명했을 텐데……. 경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더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야인을 자처하면 살아가는 데 유리한 게 있습니까?”
“그도 그렇군. 본론으로 들어가지. 타메이온으로 넘어가기는 했나?”
“균열 너머가 타메이온이라면 넘어간 게 맞습니다.”
“그곳은 어떻던가? 소문처럼 정말 어둡고, 삭막한 곳이었나?”
“제가 깊숙이 들어간 건 아니라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고요. 빙벽 근처에 한해서 말씀드리자면, 히르헤라 지역과 비슷했습니다.”
“어떤 점에서?”
“설원의 지형과 기후가 닮았습니다. 대설원을 빙벽으로 딱 막아 놓은 것 같았습니다. 서로 완전히 다른 차원은 아니었습니다.”
“빙벽 근처에 한해서 그렇다고 기록해 두겠네. 그리고 그런 발언은 아무 데서나 하지 말게. 이단으로 몰려 죽고 싶지 않다면.”
“이단요?”
“마족들의 세상인 타메이온이 우리 로디나 대륙과 비슷하다고 하면, 신전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은가? 그때는 내가 아니라 이단 심문관과 마주하게 될 걸세.”
그래도 같은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사람이라고 칼 데인 남작은 고발 대신 충고를 했다.
“아, 예. 주의하겠습니다.”
연적하는 칼 데인 남작의 말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신전에서 물고 늘어지면 자신만 피곤해지는 까닭이다.
“자아, 그럼 균열을 통과해서 타메이온에 들어간 뒤로 사흘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게.”
잠시 생각을 정리한 연적하가 운을 뗐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말이죠…….”
칼 데인 남작은 쉬지 않고 뭔가를 적어 나가다가 납득이 안 간다 싶으면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사정 청취인지 심문인지 모를 대화는 무려 9시간이나 계속됐다.
그동안 연적하는 타메이온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다섯 번 넘게 반복해야 했다.
다섯 번째 이야기가 끝났을 때 칼 데인 남작이 물었다.
“아, 참, 그런데 균열에 진입해서 처음 만난 마수가 뭐였다고 했나?”
“아이스 오우거요. 열심히 적으시는 것 같던데, 같은 얘기를 왜 자꾸 물어보는 거예요?”
그러자 칼 데인 남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의 이야기 중에서 모호한 지점이 세 개나 되네. 사실 사흘간의 행적에서 세 개면 양호한 편이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묻는 것은 바로 그 모호함과 명확함의 기준점을 확인하기 위해서지.”
“그래서 모호함이 줄어들었나요?”
“전혀. 자네와 파비안의 행적은 눈에 그린 듯 선명한데, 이해가 안 가는 게 있거든.”
“뭔데요?”
“타메이온은 인간에게 너그러운 땅이 아니네. 그랬다면 왜 창조신께서 빙벽으로 이편과 저편을 나누었겠는가? 자네들의 운은 지나치게 좋아. 내 평생 지금까지 자네들처럼 운 좋은 사람들은 만나 본 적이 없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드릴 말씀이 없네요.”
“여하튼 잘 알았네. 자네와 파비안의 목격담은 히르헤라 균열 조사에 큰 도움이 될 걸세.”
“그런데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 흑마법사들이 설원에 심은 말뚝요. 그건 대체 뭔가요?”
“글쎄, 솔직히 나는 모르겠네. 궁정 마법사이신 칼로스 님이라면 혹시 아실지도 모르겠군. 후작님께서 이 보고서를 들고 에스카토스 원수님을 만난다면, 흑마법사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될 걸세.”
“아…… 그렇겠네요.”
연적하가 고개를 주억거였다.
궁정 마법사 칼로스라면 흑마법에 대한 조예(造詣)도 남다를 테니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칼 데인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했네. 자네의 조사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지. 숙소로 돌아가 쉬어도 좋네.”
“그럼, 이제 파비안 경을 만나러 가시는 건가요?”
그러자 칼 데인 남작이 야릇한 눈으로 엘리오를 보았다.
“왜?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나? 있다면 지금 말해 주게. 다시 자네를 이곳으로 부르는 것도 번거로우니.”
“아, 파비안 경도 오랜 시간 같은 얘기를 하려면 피곤하겠다 싶어서요. 마음에 걸리는 거 없습니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알겠네.”
칼 데인 남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연적하도 알파 중대로 돌아가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 밝은 새벽이다.
초저녁에 불려와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더니 머리가 다 어질어질한 느낌이다.
잠시 후 균열 앞 알파 중대 구역에 도착한 그는 경계병들에게 물어물어 기사 막사를 찾아 들어갔다.
케일은 근무 중인지 보이지 않았고, 쿠누트와 리들리가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들어 있었다.
연적하는 대충 빈 간이침대에 파고 들어가 눈을 감았다.
몸은 피곤했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문득 처량한 느낌이 들었다.
구주에서 똥지게를 지고 다닐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강호와 구주에서는 누가 뭐래도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로디나 대륙에서의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유성우에 맞아 죽을 뻔하고, 흑마법사의 마법에 또다시 위기를 맞았었다.
유성우야 궁극의 마법이라니 그렇다 쳐도, 7서클 마법에 죽을 뻔했다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다.
‘마나가 그렇게 강한가?’
생각해 보니 구주에 처음 갔을 때도 비슷했던 것 같다.
확실히 영기는 내력보다 강했다.
오죽하면 현세로 돌아갔을 때 남궁연과 심통의 영기가 봉인됐을까.
만약 영기와 마나가 그런 관계라면 마나를 각성하지 않으면 답이 없겠다 싶다.
‘그래, 만나를 각성하자.’
영기를 터득했던 것처럼 마나의 각성도 어렵지 않을 게다.
연적하는 자신이 마나를 각성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상상을 하며 서서히 잠들었다.
***
다음 날 아침.
칼 데인 남작이 임시 막사에 격리되어 있던 파비안을 찾았다.
무덤덤하던 엘리오와 달리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는 파비안을 본 칼 데인 남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르겠군.’
둘 다 이십 대인데 엘리오에 비하면 파비안은 어린아이 같았다.
“파비안 클라우드. 실라스 클라우드 남작의 장자이지만, 단승 작위라서 아쉽게도 평민. 맞나?”
“예.”
“자네의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보았네. 16세에 마나를 각성해 ‘클루톤의 천재 기사’라는 칭호를 얻었다지?”
“과분한 칭호입니다.”
“그런데 첫 근무지인 몬타노사 산맥의 폰티악 중대에서 실종되었던 기록이 있더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치명상 입은 마수를 쫓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폰티악 중대는 유명한 레인저 부대인데……. 길을 잃었다는 건가?”
“초임지라 지형에 어두웠습니다.”
“레인저 부대의 신병은 기초 훈련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고 들었는데도, 그랬다는 말인가?”
“……예. 너무 당황하다 보니…….”
파비안은 남작이 흑역사를 들추자 수치심에 얼굴도 들지 못했다.
“몬타노사 산맥과 타메이온 중 어느 곳이 더 위험한가?”
“그야 당연히 타메이온입니다.”
“그렇다면 타메이온에서는 더 당황했겠군.”
“예.”
“그런데 왜 엘리오 경에게 타메이온의 길안내를 하겠다고 나섰나? 경의 임무는 엘리오 경을 데리고 알파 중대에 복귀하는 것이었는데.”
“빙벽 주위에 마수가 보이지 않아 조금 안도했습니다. 그래서 ‘이왕 타메이온까지 들어온 거 정찰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엘리오 경과 함께 있어 안도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맞나?”
“그런 점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몬타노사 산맥에서는 당황해서 길까지 잃어버린 사람이, 그보다 더 극악한 타메이온에서는 안도를 했다? 재밌군.”
“…….”
파비안은 어쩐지 말실수를 한 것 같았지만, 바로잡을 자신이 없어 그냥 침묵했다.
“부인하지 않는군. 잘 알았네. 그럼 데니스 로빈 중대장에게 엘리오 경을 데려오겠다고 자원한 이후부터 일어난 일을 말해 보게.”
칼 데인 남작은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갔다.
“타메이온에 들어간 직후 제가 본 것은 알파 중대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고 달아난 아이스 오우거와 엘리오 경의 싸움이었습니다. 엘리오 경이 거지반 죽어 가던 아이스 오우거의 마지막 숨통을 끊은 직후, 저는 엘리오 경과 만났습니다. 아이스 오우거 때문인지 빙벽 근처에 다른 마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에 제 임무를 지적하셨는데, 위험 요소가 없어서 엘리오 경과 주변 순찰을 하기로 했던 겁니다.”
변명처럼 말한 파비안이 칼 데안 남작의 안색을 살폈다.
칼 데안 남작은 별다른 반응 없이 열심히 적기만 했다.
그 모습에 안도한 파비안은 한결 편안하게 말을 이었다.
“순찰이라고 하지만 실은 얼어붙은 숲에 숨어서 설원 지대를 살피는 게 전부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기사 둘이 타메이온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요. 그러던 중 여섯 명의 흑마법사들이 말뚝 주위에 둥그렇게 서서 주문 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흑마법사들이 사람을 제물로 바치자 말뚝이, 마치 물에 담근 것처럼 설원 아래로 스르륵 녹아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여섯 명의 흑마법사들은 거대한 텔레포트진을 만들어 사라졌습니다. 그 뒤로 사흘 동안 기다렸지만 흑마법사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엘리오 경과 저는 숲에 숨어 지내다가 바로 복귀를 했습니다.”
“사흘간 숲에 숨어 지냈다?”
“예.”
“아이스 오우거도 없고, 흑마법사들에게 살해당한 시체가 여섯 구나 남아 있는 그 자리 근방에서?”
“예.”
“마수들은 10킬로미터 밖에서도 피 냄새를 맡는다는 거 알고 있나?”
“숲과는 거리가 좀 있었습니다.”
“인간의 냄새는 더 잘 맡지. 심지어 얼음 숲은 몇몇 마수들에게는 보금자리라네. 마수의 보금자리에서 사흘이나 지내다가 무사 귀환했다니. 엘리오 경이 소드마스터라면 혹 모를까? 있을 수 없는 일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