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34
1034회.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말게
멀리까지 엘리오를 배웅하고 돌아온 어윈 레더 남작이 웃으며 애슐리 넬슨 남작에게 물었다.
“그래, 만나 보니 어떻더냐? 마음에 들더냐?”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푸토코아의 후계자는 뭘 믿고 소드 익스퍼트 상급과 원수가 된 거예요?”
“알고서 그랬겠느냐? 모르고 그런 것이라고 들었다. 얼마나 놀랐으면 귀족들 앞에서 에스카토스 공작께 중재까지 요청했겠느냐?”
“푸토코아의 후계자도 자존심이 꽤 상했겠는데요?”
“그래도 후계자 자리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지. 푸토코아의 직계가 그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코르보 마법 병단은 언제까지 히르헤라에 머무른다고 하더냐?”
“스쿠툼의 균열을 복구하기 전까지는 아마 안 돌아가지 않을까요?”
“오늘 실패했다면서? 복구가 되기는 되는 거냐?”
“저는 마법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코르보 마법 병단이라면 무슨 수를 쓸 거예요. 지금까지 어떤 임무를 맡든 늘 성공했으니까.”
“그럼, 일을 마치고 바로 제도로 돌아가는 거냐?”
“그렇게 될 거예요. 코르보 마법 병단의 규율이 얼마나 엄한데요. 오늘도 마구스 킬리언 헤일 님이 자리를 비워서 겨우 빠져나온 거라고요.”
“나는 네 부탁대로 다 해 줬다. 판을 깬 건 너야. 그건 알지?”
“네, 네. 감사해요.”
애슐리 넬슨 남작의 시선이 엘리오가 앉았던 자리로 향했다.
끈적한 여느 귀족들과 달리 자신을 대하는 담담한 그의 태도를 떠올리니 만나 보길 잘한 것 같다.
***
숙소로 돌아가던 엘리오는 먼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이세계에 온 지도 어언 두 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인데 이상하게 길게 느껴진다.
체감상으로 이 년은 지난 것 같았다.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충격을 받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시간의 흐름이 달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까?
전자라면 다행이지만 후자라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문득 구천현녀의 말이 떠올랐다.
―혼돈 속에 그들이 있으니 혼돈을 따라가거라.
그 말대로라면 자신이 제대로 된 장소에 있는 건 맞다.
히르헤라에 발생한 균열이 혼돈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까.
“젠장. 너무 쉽게 생각했어.”
이세계는 ‘왕들의 하늘’과 달리 모든 게 감추어져 있다.
혼돈의 중심에 와 있지만 천자마와 금사는커녕, 유성우를 떨어뜨린 마법사가 누군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설사 알아내도 문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그 마법사의 상대가 못 된다.
순수한 무력으로 자신은 소드마스터 급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마법사는 소드마스터보다 아득히 위에 있었다.
자신과 코드란테스 백작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마법사와 싸울 때 구천검령을 꺼내야 한다는 소리다.
하지만 목격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
이세계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런 생각은 더 굳어졌다.
자신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지만, 반대로 천자마와 금사가 꼭꼭 숨어 버릴 수도 있었다.
심란한 마음에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간 엘리오를 맞이한 건 낯선 기사였다.
“나는 옵티머스 기사단의 딜런 모런 남작이오. 에스카토스 공각 각하께서 엘리오 경을 모시고 오라 하셨소.”
“아…….”
엘리오는 쉴 틈도 없이 딜런 모런 남작을 따라나섰다.
왕국 주둔군 원수인 에스카토스 공작의 부름은 미루거나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엘리오가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에스카토스 공작이 먼저 말을 걸었다.
“엘리오 경. 어서 오게.”
“예.”
엘리오가 뻘쭘한 얼굴로 서 있자 에스카토스 공작이 빈자리를 가리켰다.
“앉게. 경과 나눌 이야기가 좀 있네.”
“아. 예.”
엘리오가 앉자 에스카토스 공작이 커피 잔 두 개를 직접 가져왔다.
부관이 있음에도 직접 하는 것은 나름 엘리오에 대한 친근감의 표시였다.
잔에 커피를 채우자 고소한 커피 향이 올라왔다.
“커피 좋아하나?”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엘리오가 어색하게 웃으며 잔을 잡았다.
본래 차를 즐겨 마셨지만 커피와 같은 차는 처음이다. 그래서 아직은 호불호가 명확하지 않았다.
“야인은 커피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모두가 그런 건 아닌 모양이군.”
“하하…….”
엘리오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 익숙지 않아서 그런 것뿐인데 공작이 오해를 하는 것 같다.
에스카토스 공작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운을 뗐다.
“어제 마족의 출현 직후 귀족 회의가 열렸었네. 회의가 끝날 즈음 푸토코아에서 한 가지 요청을 하더군.”
“…….”
엘리오가 공작을 응시했다.
푸토코아의 요청이 자신과 관계가 된 것 같아서다.
“베르나르도 후작을 통해 경과 푸토코아 백작가 사이의 일은 들었네. 푸토코아 백작의 후계자가 몹쓸 짓을 했더군. 아직도 그런 귀족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 뭐,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으니까.”
“공작님이 보시기에도 몹쓸 짓이라는 거죠?”
“그렇네. 그건 누가 뭐래도 토비아스 푸토코아의 잘못이라 할 수 있네. 나는 푸토코아 백작가를 향한 경의 복수심을 충분히 이해하네. 결투라는 방법으로 그걸 풀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토비아스 푸토코아의 중재 요청을 수락했네. 이유는 다른 누구보다 경이 더 잘 알 걸세. 지금의 히르헤라는……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 되었네. 오늘 7서클의 대마법사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이 균열의 보수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네. 메이지 칼로스 경이 했던 것보다는 조금 발전했지만, 균열을 막지 못했지. 남부 왕국들의 문제로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은 히르헤라에 오래 머물지 못하네.”
“남부 왕국들의 문제는 뭔가요?”
한순간 엘리오의 귀가 번쩍 뜨였다.
혼돈을 따라가야 할 그로서는 그게 뭔지 알아야 했다.
“남부 대수림의 출입을 주변 왕국들이 통제하려 한다는군. 그 일로 제국의 군대가 남쪽으로 재배치됐다고 하네. 남부 왕국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부대가 코르보 마법 병단이라, 저들은 히르헤라에 오래 머무르지 않을 걸세.”
“대수림이라면 어비스가 있다는 곳 아닌가요?”
“맞네.”
“어비스는 모험가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들었는데……. 모험가들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건가요?”
“제국군이 움직일 정도로 노골적인 모양이야.”
“남부 왕국들이 갑자기 왜 그런답니까?”
순간 에스카토스 공작이 엘리오를 힐끔 보았다.
에스카토스 공작은 아주 잠시 망설였다.
왕국의 정보부에서나 취급하는 고급 정보를 엘리오에게 가르쳐 줘도 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수림과 어비스는 머나먼 남부의 이야기.
엘리오는 히르헤라에 제 발로 찾아온 사람이니 대수림으로 떠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이건 제국에서도 기밀로 취급하는 비밀이네만, 어비스에서 강철 골렘들이 발견되었다고 하네.”
“강철 골렘요?”
“현존하는 최강의 마법 병기지. 제국은 남부 왕국들이 강철 골렘들을 발굴해 제국에 반기를 드는 걸 두려워 하고 있네. 그래서 통제를 풀라고 압박을 가하는 중이지. 그렇게 해서 강철 골렘의 독점을 막겠다는 거지.”
“아!”
“방금 들은 이야기는 경만 알고 있게. 북방 영주들이 괜한 욕심에 대수림으로 인원을 돌리면……. 히르헤라 균열의 방어만 어려워지니까.”
“예.”
“여하튼 그런 이유로 코르보 마법 병단은 오래 머무르지 않을 걸세. 어차피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으로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황제가 알게 되면, 빠르게 대안을 마련할 테지. 그때가 되면 코르보 마법 병단을 남부로 돌릴 걸세.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북방의 3대 영주 중 하나인 푸토코아 백작가가 흔들린다면 어떻게 되겠나?”
당연히 균열의 방어에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복수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신가요?”
“복수를 하되, 그 시기를 늦추어 주었으면 하네. 지금 경이 푸토코아 백작가를 건드리면 그들은 차라리 푸토코아로 돌아가는 걸 선택할 걸세. 그들이 돌아가면 히르헤라에는 베르나르도 후작가와 코드란테스 백작가만 남게 되네.”
에스카토스 공작이 말을 끊고 엘리오를 보았다.
다행히 그도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아는 얼굴이었다.
“균열의 위험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경이 푸토코아의 귀족들에게 결투를 신청해도 상관하지 않겠네. 경도 지금 히르헤라의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지 않나?”
“…….”
엘리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에스카토스 공작의 말이 맞다.
지금도 북방의 3대 영지가 삼 일씩 균열을 감시하고 있다.
그런 뒤 주둔지로 내려와 육 일간 부상을 치료하고 장비를 수리한 뒤에 다시 삼 일간 투입되는 일의 반복이다.
여기서 푸토코아 백작가가 철수하면 재정비의 시간이 삼 일로 줄어든다.
자신도 경험해 봐서 알지만 그건 진짜 못 할 짓이었다.
“푸토코아 백작가가 자기들 마음대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까?”
“국왕의 명을 거역한 대가를 치르겠다고 작정하면 못 할 것도 없지. 폐인이 되느니 대가를 치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걸세.”
엘리오는 반박하지 못했다.
영주들의 문제는 자신보다 공작이 더 잘 알 터였다.
‘균열의 방어에서 빠질 수도 있다고? 그럼 안 되지.’
그건 베르나르도 후작가와 코드란테스 백작가의 병사들에게 못 할 짓이었다.
누구 좋으라고 그들이 자기들 영지로 돌아가게 한단 말인가.
“알겠습니다. 균열의 위험이 해결되면, 그때 푸토코아 백작가에 복수를 하겠습니다.”
엘리오의 말에 에스카토스 공작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잘 생각했네. 왕국을 향한 경의 그 충정, 내 잊지 않겠네. 혹시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주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주겠네.”
“없습니다.”
엘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출세할 일도 없고, 지금이 딱 좋았다.
하지만 에스카토스 공작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고마운 마음에 엘리오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었다.
“중대를 하나 더 늘려 줄 테니 중대장을 맡는 건 어떤가?”
“괜찮습니다.”
“알파 중대장 데니스 로빈 남작과 함께 지내는 게 불편할 텐데?”
“안 불편하던데요?”
“경이 괜찮다면 더 권하지는 않겠네. 언제라도 마음이 바뀌면 말하게. 지금이야 그렇지만 봉작을 받은 뒤에는 경도 참모가 되거나, 중대를 지휘하게 될 걸세.”
“예.”
대화가 잠시 끊겼다.
두 사람은 말없이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마셨다.
문득 에스카토스 공작이 말했다.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께서 경에게 관심을 보이더군. 조만간 경을 따로 부를 수도 있네.”
“저를요?”
“제국의 귀족들은 인재에 대한 욕심이 많거든. 솔직히 말해 경의 실력이라면 자작의 작위를 내려야 마땅하네. 경의 경지를 알지 못했으니 남작으로 봉해질 테지만……. 경이 지금까지 히르헤라에서 세운 공적만으로도 충분히 자작의 위를 받을 수 있네. 험, 험, 그러니까…….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네. 젊은 사람에게는 제도(帝都)가 화려해서 좋겠지만……. 귀족들의 파벌 싸움에 피곤하기 그지없는 곳이기도 하네.”
엘리오는 에스카토스 공작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피식 웃었다.
자신이 제국에서 온 코르보 마법 병단과 함께 히르헤라를 떠날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다.
“공작님, 저는 균열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히르헤라에서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봤군. 나는 경이 그런 사람일 줄 알았네. 설마 내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일은 없겠지?”
“저는 한 입 가지고 두말은 하지 않습니다.”
“믿겠네. 장하네.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엘리오 경의 승작(陞爵)은 올해가 가기 전에 이루어질 걸세. 그러니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말게.”
올해 안에 자작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소리다.
“감사합니다.”
엘리오는 작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작위가 높을수록 손해 볼 일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