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49
1049회. 도와 달라고 하시면 도와 드릴게요
보름 전 제도(帝都) 페트로폴리스.
제국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도시가 제국으로 성장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 누군가의 희생은 필수다.
제국의 귀족들이 암살자를 고용해 정적을 제거하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암살은 지방의 영지보다 제도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제도인 페트로폴리스에 거점을 둔 전문 암살 조직의 숫자만도 열 개가 넘었다.
시시껄렁한 범죄자들 말고, 전문적으로 운영되는 암살단의 숫자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암살 조직은 크레센트, 레드 스콜피언, 블랙 스파이더였다.
특히나 ―초승달이 심벌인― 크레센트는 암살에 실패한 이력이 없어 전설로까지 불리고 있었다.
“하아! 심각하군…….”
굳은 얼굴로 한 시간 넘게 회계 장부를 들여다보던 웨인 케이시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전설의 크레센트는 망해 가고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은 황실이 안정된 거고, 그다음은 고위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시들해진 탓이다.
암살 조직의 주 수입원은 당연히 암살 청부다.
그런데 최근 십 년간 이렇다 할 활동이 없다.
이건 크레센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애석하게도 제도의 3대 암살 조직 모두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경쟁 조직인 레드 스콜피언과 블랙 스파이더는 3년 전부터 인원 감축에 들어갔다.
전설의 청부 조직이라는 체면에 억지로 버티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부끄럽게도 이젠 위원(암살자)들에게 지급할 돈이 없다.
물론 위원들도 운영의 어려움을 알기에 독촉하지는 않겠지만, 크레센트 의장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크레센트의 인원 감축 문제를 놓고 고민할 때 문밖에서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의장님. 계십니까?”
웨인 케이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 부의장 에일린 레이더였다.
“들어오게.”
말이 끝나자마자 오십 대 여자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의장님.”
부의장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웨인 케이시는 짐짓 모른 척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군.”
“네, 그동안 큰 의뢰가 없었으니까요.”
큰 의뢰라는 말에 웨인 케이시의 눈이 번쩍였다.
부의장이 의장인 자신을 찾아올 정도의 의뢰라면 크레센트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으리라.
“의뢰자가 누군가?”
“에스카토스 왕국의 푸토코아 백작가입니다.”
“멀리서도 왔군. 대상은?”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기사 하나를 처리해 달라고 합니다.”
“베르나르도 후작가면 에스카토스 왕국의 일인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방금 큰 의뢰라고 하지 않았나?”
웨인 케이시가 김빠진 얼굴로 부의장을 보았다.
북방에 있는 후작가의 기사 하나를 처리해 봐야 얼마나 받는다고 큰 의뢰 운운하는지 모르겠다.
“대상이 소드 익스퍼트입니다.”
“아하.”
웨인 케이시가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소드 익스퍼트라면 돈이 된다.
지금까지 크레센트가 암살한 사람 가운데는 소드마스터도 있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의뢰인의 신분은 확실한가?”
“그리폰 기사단의 존 미치 남작입니다. 기사단장인 콜라시오 키퍼 자작의 지시로 왔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 뒤에는 푸토코아 백작이 있겠고?”
“그렇습니다.”
“금액은?”
“백만 골드로 정했습니다.”
“휴우! 대단하군. 그런데 제국의 백작도 아니고, 푸토코아 백작가의 현금 동원력으로 가능하겠나?”
“현금이 없다면 영지로 받아 내면 되니까요. 북방의 영주들에게 중개해 주면 수수료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돈은 확실하게 받아 낼 수 있다?”
“그렇습니다.”
“모처럼의 큰 의뢰니 의장단에서 맡기로 하지. 부의장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보도록.”
“대상이 소드 마스터도 아닌데 의장단은 과합니다.”
“일만 생각하면 그렇지. 이참에 북방의 전설이라는 스쿠툼(빙벽)도 한번 둘러보자고. 다들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했잖아?”
“알겠습니다.”
에일린 레이더는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확실히 스쿠툼에 대한 제국인들의 환상을 고려하면 의원들의 반발도 약할 게 분명했다.
***
그리고 현재.
애나 로건의 큰소리에 불청객들이 다소 황당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이윽고 크레센트의 의장인 웨인 케이시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용기가 가상하군. 아가씨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기회를 줄 테니 가 보도록.”
물론 여자의 용기가 가상해서 그런 건 아니다.
만약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멀리 떨어진 곳에 은신한 암살자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대화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소한 변수마저도 제거하고 싶을 정도로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신경 쓰였다.
마력건을 들고 있는 여자에게 가라고 한 것도 그래서다.
필요하다면 여자를 죽이는 것은 아무 때라도 할 수 있으니까.
“내, 내가 아니라고요?”
뜻밖의 말에 애나 로건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여자가 머뭇거리자 부의장 에일린 레이더가 나섰다.
“이봐요. 아가씨. 이건 우리와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일이니까, 제삼자는 빠지라고. 참고로 피차 누군지 모를 때 사라지는 게 좋을 거야.”
애나 로건의 시선이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게 향했다.
“남작님, 어떻게 할까요? 도와 달라고 하시면 도와 드릴게요.”
뜻밖에도 청순한 외모와 달리 셀레투스 기사단의 일원인 그녀는 강단이 있었다.
엘리오는 그녀의 호의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초면에, 누가 봐도 열세인 자신을 돕겠다는 것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대답에 앞서 엘리오는 불청객 중에 한 사람에게 전음을 날렸다.
―움직이면 죽는다.
뭉그적거리는 여자에게 단검을 던지려던 호몰카가 흠칫했다.
사람은 저 멀리 있는데 귀에서 속삭이는 소리라니!
게다가 자신의 은밀한 동작은 또 어떻게 알아봤는지 모르겠다.
암습을 포기한 호몰카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제야 엘리오가 말했다.
“말씀은 고마운데 사양할게요. 길을 모르실 테니 멀리 가지는 말고, 잠깐 뒤로 빠져 있어요.”
“예에…….”
눈치 빠른 애나 로건은 고집하지 않고 즉시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녀가 멀어지자 엘리오는 불청객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를 잘 아는 듯이 말하던데, 뭐 하는 분들이셔?”
그러자 웨인 케이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자부심이 대단한 상대를 만났군. 왕년의 클라이브 프레이저 경을 보는 것 같아.”
클라이브 프레이저는 이십 년 전 크레센트에 목숨을 잃은 소드마스터였다.
그때도 크레센트는 암습이 탄로나서 정면 승부를 걸었고, 고전 끝에 상대를 죽일 수 있었다.
“그래서 누구시라고?”
거듭된 엘리오의 물음에 웨인 케이시가 나직이 말했다.
“그건 클라이브 프레이저 경에게 물어보게.”
그 말을 신호로 여섯 명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의장인 웨인 케이시가 좌측, 부의장인 에일린 레이더가 우측으로 이동했다.
최고의원인 찰스 맨슨은 오히려 뒤로 빠졌고, 그의 앞을 호몰카, 헨리, 게인이 막아섰다.
이십 년 전 소드마스터 클라이브 프레이저를 암살할 때처럼 전사 둘이 좌우를 점하고, 마법사가 후방에 자리 잡은 것이다.
이윽고 7서클의 흑마법사 마구스 찰스 맨슨의 지팡이가 엘리오를 향했다.
“썬 버스트!”
꽈광―!
엘리오의 몸 주변에서 갑작스러운 폭발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썬 버스트는 무려 6서클 마법.
보통의 검사 같았으면 몸이 터져 나가고도 남았을 상황이다.
엘리오 역시 예고 없이 들이닥친 폭발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호신강기가 폭발로부터 그의 몸을 지켜 준 것이다.
‘와씨! 깜짝이야!’
엘리오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지니고 있던 천둔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그가 미처 반격하기도 전에 마구스 찰스 맨슨의 이 차 공격이 이어졌다.
“다크 스피어!”
어둠에 동화된 다크 스피어가 엘리오를 노리고 날아갔다.
쓰아아―.
엘리오가 지척에 이른 다크 스피어를 쳐 내려 할 때다.
돌연 그의 몸이 거꾸로 뒤집어졌다.
마구스 찰스 맨슨이 때맞춰 7서클 중력 역전의 마법을 펼친 것이다.
아까부터 좌우에서 기회를 엿보던 웨인 케이시와 에일런 레이더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두 자루 롱 소드가 각각 엘리오의 상체와 하체를 노렸다.
웨인 케이시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허둥대는 상대를 보니 걱정과 달리 일이 빨리 끝날 것 같았다.
쉬익! 쐑―!
그런데 이게 웬일?
자신과 부의장의 롱소드가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헉! 놈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던 웨인 케이시의 눈이 부릅떠졌다.
언제 움직였는지 부의장 에일린 레이더 뒤에 엘리오 라고아가 서 있었다.
자신과 부의장의 검 중에 하나 정도는 막힐 줄 알았다.
하지만 중력이 역전된 속에서 다크 스피어와 두 개의 검을 다 피하고 오히려 역습에 나서다니!
“피해!”
그러나 부의장 에일린 레이더는 엘리오의 이형환위(移形換位)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세계 검사들의 기술이 아닌지라 더 그랬다.
엘리오가 검면으로 중년 여자의 허리를 후려쳤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에일린 레이더가 훨훨 날아갔다.
그 틈에 웨인 케이시는 바람처럼 달려가 코르테 아셀로의 수법으로 검을 휘둘렀다.
코르테 아셀로의 뜻은 ‘강철을 벤다’이다.
무식한 이름에 걸맞게 파괴력 하나만큼은 대륙 제일이었다.
하물며 소드 익스퍼트인 웨인 케이시가 필살의 각오로 펼친 코르테 아셀로의 위력이 어떤지는 말할 것도 없다.
슈아악―!
그 무지막지한 검격을 엘리오는 무심한 얼굴로 막았다.
쩡―!
묵직하면서도 맑은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웨인 케이시가 불신의 눈으로 엇갈린 두 자루 롱소드를 보았다.
자신이 전심전력을 다한 코르테 아셀로를 한 손만으로 가볍게 막아 내는 사람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이, 이게 왜…….”
순간 성큼 전진한 엘리오가 롱소드 손잡이 끝으로 상대의 안면을 가격했다.
‘악!’ 소리와 함께 웨인 케이시가 뒤로 나뒹굴었다.
웨인 케이시가 쓰러짐과 동시에 엘리오를 노리고 초고열의 불꽃이 띠를 두르듯 길게 날아왔다.
7서클의 화염 마법 인페르노였다.
엘리오는 무리해서 막으려 하지 않고 가볍게 공중으로 도약해 불길을 피했다.
크레센트의 최고의원인 마구스 찰스 맨슨은 엘리오 라고아가 인페르노마저 피해 버리자 이를 악물었다.
마법사의 마법은 마나의 제약을 받는다.
같은 서클의 마법을 세 번 사용하면 마나가 고갈된다.
벌써 7서클 마법 2개와 6서클 마법 2개를 사용했으니 남은 기회라고 해 봐야 6서클 마법 한 번이다.
하지만 합공받는 와중에 소드 익스퍼트 둘을 간단히 때려눕힌 상대를 6서클 마법으로 제압할 수 있을까?
못한다고 결론 내린 마구스 찰스 맨슨은 자신을 호위하고 있는 세 암살자에게 말했다.
“놈을 공격해라.”
호몰카, 헨리, 게인은 마법사의 후방 지원을 믿고 서슴없이 달려 나갔다.
역시나!
세 사람은 광풍에 휘말린 낙엽처럼 이리저리 날아가 처박혔다.
그 틈에 마구스 찰스 맨슨은 나직이 텔레포트 주문을 영창했다.
우우웅―.
눈앞에 마력장이 형성되자 마구스 찰스 맨슨은 지체하지 않고 마력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마법사가 사라지려 하자 엘리오는 즉시 검을 던졌다.
쉬이익―!
화살처럼 날아간 천둔검이 한순간 마력장을 꿰뚫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천둔검은 이미 발동한 텔레포트 자체를 무효화시키지는 못했다.
이기어검의 수법으로 천둔검을 회수한 엘리오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검신에 피가 묻은 걸 보니 베기는 벤 모양인데, 마법사가 사라졌으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엘리오는 쓰러진 불청객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뚱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이것들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