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51
1051회. 귀하를 위해 충심으로 증언하겠소
분근착골(分筋錯骨)은 내성이 생길 수 없는 극단적인 고문법이다.
이세계 인류에게 없던 수법에 처음으로 당한 크레센트의 의장 웨인 케이시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분근착골 앞에서 그의 정신은 순수해졌다.
전설적인 암살 조직의 체면이라든가, 의장으로서의 책임 따위는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마지막 말이 무한히 반복되고 있었다.
―말하고 싶어지면 눈을 깜빡거리면 돼. 알았지?
그런데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눈을 깜빡였다.
빠각―!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고통은 뼈가 부러지는 듯한 울림을 끝으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웨인 케이시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 맛도 없어야 할 공기가 미치도록 달았다.
“씨부려 봐.”
껄렁껄렁한 그 한마디 말에 웨인 케이시는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 수치심이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왜? 막상 말을 하려니 아니다 싶어?”
순간 웨인 케이시는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아니오!”
잔뜩 쉬었지만 누가 들어도 진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말을 못 하겠다고?”
“하겠다는 소리요.”
“그럼 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소. 차라리 당신이 알고 싶은 걸 물어보시오.”
“이거 손이 많이 가는 아저씨네.”
엘리오의 말에 웨인 케이시는 흠칫 몸을 떨었다.
모두가 분근착골의 여파다.
그는 엘리오의 가벼운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갈 만큼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놀라기는! 대신에 뜸들이지 말고 바로 대답해. 머리를 굴린다 싶으면 다시 한번 ‘힘줄을 나누고 뼈를 어긋나게’ 해 줄 테니까.”
“알겠소.”
웨인 케이시의 빠른 대답에 엘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는 거야. 당신 소개부터 해 봐. 뭐 하는 사람이야?”
“나는…… 크레센트라고 불리는 암살 조직의 의장이오.”
“크레센트?”
그가 고개를 갸웃하자 언제 다가왔는지 뒤에서 애나 로건이 설명했다.
“제도(帝都) 페트로폴리스에 있는 유명한 암살 조직이에요.”
“아! 제국의 암살 조직이 왜 북방까지 와서 나를 죽이려고 한 거야?”
“당신을 처리해 달라는 푸토코아 백작가의 의뢰를 받았소.”
“그 마법사는 누구야?”
“최고의원인 마구스 찰스 맨슨이오.”
“최고의원?”
“크레센트에서 가장 뛰어난 암살자라는 뜻이오.”
“당신이 우두머리고?”
“그렇소.”
“나를 아주 물로 봤나 봐?”
“…….”
웨인 케이시는 차마 그렇다고 답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틀 만에 모습을 드러냈지. 안 그래?”
웨인 케이시가 놀란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남작을 보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소?”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대놓고 따라다니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웨인 케이시는 속으로 절규했다.
‘그런 말은 소드마스터들이나 할 수 있는 소리외다!’
아니, 생각해 보면 크레센트가 죽인 소드마스터 클라이브 프레이저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감시에 들어간 지 닷새쯤 지나서 알아차렸으니까.
문득 엘리오가 애나 로건에게 고개를 돌렸다.
“로건 경, 이제 다 끝난 것 같은데 가 보실까요?”
“끝났나요?”
“네, 저들이 누구며,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알아냈잖아요. 더 남은 게 있나요?”
“그건 그런데……. 저들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증인으로 내세워야죠.”
“푸토코아 백작가를 고발하실 건가요?”
“아뇨. 저들은 영지전의 정당성을 증명해 줄 사람들입니다.”
“영지전요?”
뜻하지 않은 말에 애나 로건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처음에는 푸토코아 백작가와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님이 푸토코아 백작가의 반대파인가 보구나.’
그녀는 그래서 푸토코아 백작가에서 암살자를 보냈다고 생각했다.
에스카토스 왕국의 내정에 문제가 없다고 들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영주에게 암살자를 보냈으니 당연히 영지전으로 가야죠.”
“어머! 남작님이…… 영주님이셨어요?”
“네, 슬래시 랜드의 영주입니다.”
엘리오의 말에 애나 로건은 정중히 인사를 했다.
“몰라뵀네요. 저는 로건 백작가의 기사인 애나 로건이에요.”
“네, 그럼, 가 보실까요? 어이, 그쪽도 조용히 따라와. 딴짓하는 순간 기술 들어간다.”
의장인 웨인 케이시와 크레센트의 암살자들은 묵묵히 엘리오 라고아의 뒤를 따라갔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공간 이동 수법도 그렇지만, 마나가 봉쇄되어 달아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싸우는 소리를 듣고 구경 왔던 에스카토스 왕국군은 엘리오 라고아 남작을 보고는 슬며시 떠났다.
애나 로건은 그 광경을 보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호기심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만도 한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누구 하나 다가오지 않았다.
그녀는 슬쩍 엘리오 라고아 남작을 훔쳐보았다.
다시 봐도 앳돼 보이는 얼굴이다.
많아야 이십 대 중반이나 될까?
하지만 그는 영지를 가진 남작이고, 소드 익스퍼트 둘과 7서클 마법사가 포함된 암살자 파티를 단번에 제압한 검사다.
눈이 높은 아버지라도 보자마자 좋아할 게 틀림없다.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애나 로건은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 냈다.
그때 엘리오가 멈춰 섰다.
“저기가 베일럼 왕국군 숙영지입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이만.”
여지를 남기지 않는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인사에 애나 로건은 섭섭함을 느꼈다.
담담함이 지나쳐 철벽을 친 것 같았다.
만약 자신의 외모가 평균 이하였다면 얼굴이 못나서 푸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했으리라.
“네, 감사해요. 언제고 기회가 되면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에이,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요. 괜찮습니다.”
말과 함께 돌아선 엘리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애나 로건은 엘리오 라고아 남작과 암살자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걸음을 옮겼다.
***
애나 로건과 작별한 엘리오는 암살자들을 뒤에 줄줄이 달고 베르나르도 후작의 숙소를 방문했다.
베르나르도 후작은 예고 없는 방문에도 엘리오를 환대했다.
“어서 오게. 엘리오 경. 그런데 저들은 누군가?”
“제도에서 온 암살자들입니다. 크레센트라고 하더군요.”
“…….”
멈칫하던 후작은 이내 상황을 파악한 듯 물었다.
“푸토코아의 짓인가?”
“예. 이봐, 의뢰자가 누군지 후작님께 당신이 직접 말해 봐.”
그러자 생기 잃은 얼굴로 서 있던 웨인 케이시가 말했다.
“저는 크레센트의 의장인 웨인 케이시입니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말처럼 푸토코아 백작가의 의뢰를 받았습니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의뢰를 한 사람이 누구냐?”
“존 미치 남작이 기사단장인 콜라시오 키퍼 자작의 지시라며 찾아왔습니다.”
“끙!”
베르나르도 후작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존 미치 남작이라면 확실히 콜라시오 키퍼 자작의 심복이었다.
콜라시오 키퍼 자작이 혼자 그런 결정을 내렸을 리 없으니, 푸토코아 백작의 짓이 분명했다.
‘어리석은 토비아스 푸토코아 같으니라고. 하필 이런 시기에 엘리오 남작을 건드리다니…….’
베일럼 왕국의 합류로 엘리오와 푸토코아 백작가의 싸움을 만류할 명분이 약해진 상황이다.
푸토코아의 암살 청부를 알면 에스카토스 공작도 더는 푸토코아와 엘리오의 중재에 나서지 않으리라.
생각에 잠긴 그의 귓가로 엘리오의 음성이 들려왔다.
“후작님, 푸토코아와 영지전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투가 아니라 영지전을 벌일 셈인가?”
“결투를 해 봐야 남는 게 없잖습니까. 복수를 하는 김에 이익도 보면 좋죠.”
“결투라면 모를까? 목적이 영지전이라면……. 푸토코아에서는 코드란테스 백작가를 끌어들일 걸세. 두 영지의 선대들이 상호 방어 협정을 맺었거든. ‘외부의 적이 쳐들어오면 힘을 합쳐 막는다’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엘리오는 속으로 애슐리 넬슨 남작을 원망했다.
두 영지 사이에 상호 방어 협정이 있는지도 모르고 영지전을 부추기다니!
한편으로 이해는 됐다.
제국의 귀족이 북방 귀족들 사이의 밀약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래도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땅이 아까웠다.
“코드란테스 백작은 소드마스터네. 히르헤라에서 입은 부상도 거의 회복되었다고 하더군. 그 외에도 아직 남아 있는 소드 익스퍼트가 셋이나 되지. 코드란테스 백작가와 푸토코아가 손을 잡게 해서는 안 되네.”
“복수만 해야 된다는 거네요?”
“다소 억지스럽지만, 꼭 영지전이 아니더라도 배상을 요구할 수는 있네. 복수에 배상까지 청구하면 좀스러워 보이겠지만.”
“영지전만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건 아니군요?”
“합당한 수준이라면 다른 귀족들도 묵인해 줄 걸세.”
“알바 누베스 산맥은 합당한 수준일까요?”
엘리오는 ‘산의 부족’이 살았던 알바 누베스 산맥을 빼앗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산의 부족’에게 덜 미안할 것 같았다.
잠시 생각하던 베르나르도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바 누베스 산맥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귀족 가문이 없으니……. 반대하는 귀족은 없을 걸세. 물론 그냥은 안 되고, 물밑에서 조율을 거쳐야 하지. 그건 내가 해결해 주겠네.”
베르나르도 후작은 엘리오 남작을 위해 그 정도 수고는 해 줄 용의가 있었다.
사실 일방적인 봉사는 아니다.
일련의 조율 과정을 거치는 동안 북방 귀족들은 엘리오 남작이 자신의 사람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걸 통해 북방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울 생각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푸토코아 백작가를 때려 부수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결투장을 작성해 푸토코아 백작에게 보내게. 그리고 그를 찾아가면 되네.”
“간단하네요? 상대가 응하지 않으면요?”
“응하지 않을 수가 있나. 찾아가는 길에 다 때려 부수는데. 증인까지 있으니 누구도 자네를 비난하지 않을 걸세”
“아하!”
엘리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세계는 은근 까다로운 절차에 비해 화끈한 구석이 있었다.
영지전이나 결투 같은 건 강호보다 더 무지막지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웨인 케이시가 슬쩍 끼어들었다.
“증언을 하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순간 엘리오가 차갑게 받아쳤다.
“조건? 웃기고 있네. 후작님, 암살자들에 대한 왕국법이 있나요?”
“있지. 어느 왕국에서나 암살 조직에 속한 자들은 예외 없이 사형이네.”
“들었지? 당신들은 사형이야. 내 손에 안 죽는 걸 다행으로 알아.”
그러자 웨인 케이시가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의장인 나 웨인 케이시와 부의장인 에일린 레이더는 제국의 종신 귀족입니다. 제국의 종신 귀족은 제국법에 의해서만 심판받습니다. 제국법에 의거해 우리를 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요구합니다. ”
“지랄. 후작님. 정말 저런 법이 있어요?”
“있기는 하네만……. 암살 조직과 같이 극악한 범죄자들에게까지 그걸 적용하는 건 좀…….”
베르나르도 후작은 말끝을 흐렸다.
감정적으로는 아닌데, 제국법을 왕국의 귀족이 무시할 수만도 없었다.
어디든 말을 만들어 내고, 부풀리는 자들이 있다.
만에 하나 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제국과 왕국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암살자들이 증언을 하지 않으면 결투의 정당성도 결여된다.
후작의 자신 없는 태도를 본 엘리오가 웨인 케이시에게 물었다.
“이봐. 제국법은 암살 조직에 관대해?”
“아니오. 그 부분은 제국법도 주변 왕국과 크게 다르지 않소.”
“사형당한다는 얘기네?”
“그럴 가능성이 높소. 아니, 그럴 게요.”
“그럼 여기서 죽어.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
“고향에 묻히고 싶어서 그러오.”
“시체는 보내 줄게.”
“최후만큼은 고향 땅에서 맞이하게 해 주시오. 그것만 약속한다면 귀하를 위해 충심으로 증언하겠소.”
웨인 케이시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사람도 환경도 낯선 에스카토스 왕국보다는 제국 법정이 자신들에게 유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