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52
1052회. 먼저 심부름을 좀 해야 겠다
엘리오는 사로잡은 암살자들을 베르나르도 후작에게 인계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루퍼스 중대는 균열 감시에 투입이 되는 터라 그들을 가두어 두고 감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서기인 글랜 테일러 남작이 엘리오를 방문했다.
결투장을 써 주기 위해 온 것이다.
그는 엘리오의 앞에서 장문의 결투장을 써 내려갔다.
어깨 너머로 구경하던 엘리오가 지나가듯 물었다.
“푸토코아 백작이 결투를 거절할 수는 없어요?”
“있습니다.”
“그럼, 결투장은 별 의미가 없는 거 아닌가요?”
“결투장은 다른 의미로 선전포고입니다. 남작님께서 푸토코아 백작가를 공격하는 것의 명분이 됩니다. 푸토코아 백작은 맞서 싸우든, 달아나든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할 겁니다. 지금과 같은 경우 달아나면 귀족 사회에서 매장됩니다.”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는 건가요?”
“코드란테스 백작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코드란테스 백작이 도와주겠다면 전력으로 싸울 테지만, 외면하면……. 거의 틀림없이 싸우는 시늉을 하다가 바로 항복할 겁니다.”
이윽고 글랜 테일러 남작은 완성된 결투장을 엘리오에게 내밀었다.
“확인하시고 서명해 주십시오.”
“아, 예.”
엘리오는 결투장을 받아 천천히 살폈다.
그간 계속된 글공부로 문장마다 아는 단어가 꽤 많았지만, 아직 술술 읽기에는 무리였다.
엘리오가 결투장 아래에 대륙 공용어로 자신의 이름을 적은 후 서기에게 돌려주었다.
결투장을 봉투에 넣고 밀납하던 글랜 테일러 남작이 말했다.
“보통은 이 밀납에 영주님의 인장을 찍습니다만, 혹시 인장을 만드셨습니까?”
“아뇨.”
글랜 테일러 남작의 시선이 엘리오의 손가락으로 향했다.
“그 반지에 문양이 있으니 임시로 그걸 사용하면 어떨까요? 그래도 슬래시 랜드의 영주님께서 보내는 결투장인데 밀납만 하려니 모양이 좀 빠지네요.”
“아무거나 해도 돼요?”
“인장이야 영주님께서 아무 때라도 바꾸실 수 있으니까요.”
“그럼 이걸로 찍어 볼게요.”
엘리오가 밀납에 아티팩트를 꾹 찍었다.
아티팩트 특유의 기하학적인 문양이 밀납에 선명하게 찍혔다.
글랜 테일러 남작은 문양이 마음에 드는지 찬사를 연발했다.
“아주 좋습니다. 제 눈에는 그냥 이것으로 쭈욱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엘리오 역시 밀납에 찍힌 문양이 싫지 않았다.
확실히 인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컸다.
방금까지도 밋밋하기만 하던 봉투가 꽤나 의미심장해 보였다.
엘리오의 반응을 살피던 글랜 테일러 남작이 계속해서 말했다.
“결정이 되시면 휘하의 기사를 시켜서 푸토코아 백작가로 보내시면 됩니다. 결투장에 명시한 결투일까지 푸토코아 백작가와 시비를 일으키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앞으로 사흘 동안 건드리지 말라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 기간 동안 푸토코아 백작은 대전사를 구하거나, 코드란테스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할 겁니다. 차분하게 지켜보시다가, 사흘 후 결투일에 결투장으로 가십시오. 그날 푸토코아 백작이 결투에 응하지 않으면, 푸토코아의 이름 아래 있는 자들을 베시면 됩니다.”
“사흘이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엘리오가 서기에게 꾸벅 목례를 해 보였다.
글랜 테일러 남작이 황송하다는 얼굴로 급히 마주 인사를 했다.
자작급의 인사가 남작에 불과한 자신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다니 귀족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글랜 테일러 남작이 떠나자 엘리오는 즉시 파비안을 불렀다.
잠시 후 막사로 들어온 파비안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대륙 공용어를 가르쳐 달라는 줄 알고 챙겨 온 것이다.
자리에 앉으려는 파비안을 엘리오가 제지했다.
“잠깐.”
“예?”
“공부는 이따가 하자. 먼저 심부름을 좀 해야겠다.”
“아, 예.”
파비안은 들고 있던 책을 탁자에 내려놓고 엘리오를 향해 돌아섰다.
엘리오가 파비안에게 밀봉된 봉투를 내밀었다.
“결투장이다. 푸토코아 백작가에 전하고 와라.”
“갑자기요?”
파바인이 놀란 눈으로 엘리오를 보았다.
균열 감시 부대에 여유가 생기면 복수를 할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런 전조 없이 결투를 하겠다고 할 줄이야!
“어젯밤 푸토코아 백작이 보낸 암살자들을 체포했다.”
“헉! 어젯밤 요상한 일이 있었다고 하던데……. 그게 암살자들이었습니까?”
“요상한 일?”
“중대장님이 베일럼 왕국군을 두드려 패고 미녀 기사와 함께 사라졌다면서요?”
“비슷해. 암살자들이 베일럼 왕국군 복장을 하고 주둔지에 침투를 했었다.”
“그 분수를 모르는 놈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베르나르도 후작님에게 인계했다.”
“결투도 후작님의 재가를 받으셨나 보군요?”
“조금 전 후작님의 서기가 찾아와 직접 결투장을 만들어 줬다.”
“알겠습니다. 저는 어젯밤 중대장님이 미녀 기사와 데이트를 하셨다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코르보 마법 병단의 여기사와 헤어진 지 며칠 안 되지 않았습니까.”
“큰일 날 소리 하지 마라. 코르보 마법 병단의 여기사와 사귀지도 않았는데 뭘 헤어진 지 며칠 안 돼? 어젯밤에도 데이트가 아니라, 길 잃은 베일럼 왕국군의 길 안내를 해 줬을 뿐이라고. 괜히 있지도 않은 말 붙여서 퍼트리는 놈은 죄다 처맞을 줄 알아.”
“어이쿠! 저도 사귀었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여하튼 푸토코아 백작가에 결투장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파비안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전하면 되지 뭐가 있다고? 네가 나 대신 싸우기라도 하게?”
“대답을 받아야 하나 해서요.”
“주면 받아오고, 별말 없으면 바로 와. 괜히 푸토코아 진영에서 얼쩡거리다가 봉변당하지 말고.”
“봉변요?”
“결투일이 사흘 후인데, 그때까지 조용히 지내라더라. 네가 두드려 맞고 와도 못 본 척할 거다.”
“헛! 그럼 결투장만 전하고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러는 게 좋을 거다. 결투 소식이 푸토코아 진영에 알려지면 분위기 살벌해질 테니까.”
“예!”
파비안은 묵례를 하고는 후다닥 달려 나갔다.
***
히르헤라.
푸토코아 백작군 숙영지.
루퍼스 중대의 파비안 소위가 다녀간 직후, 토비아스 푸토코아 백작은 가신들을 소집했다.
“조금 전,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나에게 결투장을 보냈소. 사흘 후 중앙 지휘 통제 막사 뒤의 연병장에서 만나자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좋겠소?”
토비아스 푸토코아의 말에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갑자기 왜 그런답니까?”
“봉토를 받아 영주가 됐다고 기세가 등등해진 겁니까?”
“그건 에스카토스 공작님을 무시한 처사입니다. 무시하고 공작님에게 맡기시지요?”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제멋대로 움직였다고 생각한 귀족들은 공작에게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참모인 리노 페인 자작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런데 백작님.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갑자기 결투장을 보낸 이유가 뭡니까? 베일럼 왕국군이 합류했다지만 대신에 코르보 마법 병단이 철수하지 않았습니까?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라면 질적인 면에서 오히려 히르헤라 주둔군의 전력이 퇴보했다는 것을 알 텐데, 갑자기 싸움을 걸어오니 이상해서요.”
순간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토비아스 푸토코아 백작을 향했다.
그러자 토비아스 푸토코아 백작이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백작가에 대한 충성심이 과한 남작 하나가……. 엘리오 라고아 남작에 대한 암살을 의뢰했던 모양이오.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그 사실을 알고 결투를 신청한 거요.”
“…….”
한순간 귀족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말로는 백작가에 대한 충성심이 과한 남작 하나가 벌인 일이라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그저 어느 남작이 덤터기를 쓰겠거니 생각할 따름이다.
본래 영주와 가신의 관계는 그런 것이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참모인 리노 페인 자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작님,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이 누굽니까?”
“그건 나도 모르오. 아직은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일방적인 주장이지만. 그래도 암살자들을 잡아 두었다니 거짓은 아닐 게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기사단장이 조사하고 있소. 그보다는 엘리오 라고아 남작과의 결투를 논의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이유로 결투장을 보냈다면……. 결투 자체를 불법 부당한 행동이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피차 알 만한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토비아스 푸토코아 백작이 차갑게 말을 끊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대책이지 상대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 확인이 아닌 까닭이다.
“엘리오 라고아와 맞서 싸울 대전사를 내세우거나, 결투를 피하고 코드란테스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과 대등하게 싸울 대전사가 있소?”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검술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리폰 기사단장인 콜라시오 키퍼 자작도 소드 익스퍼트 상급입니다.”
“아쉽지만 기사단장은 대전사로 나서지 못한다는 뜻을 알려 왔소. 다른 대전사가 있소?”
정확히는 ‘그를 상대로 승리할 자신이 없다’고 해서 뺐다.
“기사단장을 제외하면 우리 푸토코아 백작령에는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야 하오?”
토비아스 푸토코아 백작이 리노 페인 자작을 빤히 보았다.
참모인 리노 페인 자작이 마지못해 답했다.
“의뢰자를 색출해 벌하는 것으로 대응하면서, 코드란테스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의뢰자를 벌한 것에 만족해 한발 물러서면 다행이고, 아니면 버티면서 코드란테스 백작의 도움을 받자는 소리였다.
토비아스 푸토코아 백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사단장이 대전사를 포기한 지금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토비아스 푸토코아가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그런데 푸토코아의 영주인 내가 우리 영지 출신의 야인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히르헤라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귀족들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지금 철수했다가는 국왕과 귀족들의 원성을 살 게 분명하니 몸을 사리는 것이다.
귀족들이 눈치만 살피자 토비아스 푸토코아 백작은 리노 페인 자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참모?”
“그 부분은 코드란테스 백작의 대답을 듣고 난 뒤에 결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가 수모를 더 참아야 한다는 거요?”
“코드란테스 백작이 도와준다면 문제는 단숨에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철수를 하면……. 코드란테스 백작이 돕고 싶어도 도울 수가 없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토비아스 푸토코아 백작은 반대하지 못했다.
그런 그의 눈치를 살피던 리노 페인 자작이 말을 이었다.
“코드란테스 백작이 오늘내일 중으로 도착할 거라고 하니……. 며칠 기다려 보시지요?”
“코드란테스 백작이 온다고?”
“오늘 아침에 참모장인 메토 로베르트 자작에게 들었습니다. 베일럼 왕국군의 대장군인 레토나 그라운드 후작과 막역한 사이라, 베일럼 왕국군의 합류와 때를 맞추었다고 하더군요.”
“코드란테스 백작이 베일럼 왕국군의 대장군과 막역한 사이였소?”
“예, 제국 아카데미의 선후배랍니다.”
“하늘이 우리 푸토코아를 돕는 건가. 잘 알겠소. 그 문제는 내가 직접 코드란테스 백작과 만난 후에 결정하도록 하겠소.”
토비아스 푸토코아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만에 하나 코드란테스 백작이 외면하면 바로 철군이다.’
히르헤라에서 야인에게 모욕을 당하느니 욕먹더라도 푸토코아로 돌아가는 편이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