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53
1053회. 몰랐다고는 하지 말게
히르헤라 푸토코아 백작군 숙영지.
그리폰 기사단 막사.
그리폰 기사단의 기사인 존 미치 남작이 황당한 얼굴로 기사단장 콜라시오 키퍼 자작을 보았다.
“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암살 의뢰가 저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는 자백서를 쓰라고요?”
“실패하면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거 알았잖나.”
“…….”
존 미치 남작은 이를 악물었다.
끝까지 보증서를 써 주지 않을 때 조금 찜찜하기는 했다.
하지만 상대가 기사단장이라 계속 고집을 부릴 수도 없어 믿었다.
그런데 믿음의 대가가 이런 식으로 돌아오게 될 줄이야.
끝까지 보증서를 요구할걸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몰랐습니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저는 단장님의 지시대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경도 자신의 잘못을 아랫사람에게 떠넘긴 경우가 종종 있지 않았나. 어차피 세상살이라는 게 그런 법이네. 두 번 말하지 않아. 쓰게.”
“못 쓰겠다면요?”
“경을 흑마법사와 내통한 죄로 즉결 처분하고, 작위를 회수할 걸세. 죄 없는 경의 가족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노예로 팔려 갈 테지.”
존 미치 남작이 황망한 눈으로 기사단장을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표정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하기야 암살 의뢰까지 시킨 사람이니 무슨 짓인들 못 할까.
백작의 지시에 야인 부족을 몰살한 것만 봐도 그 성정이 어떤지 알 수 있다.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던 존 미치 남작은 결국 펜을 집어 들었다.
자백서를 쓰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존 미치 남작이 마지막으로 서명까지 마치자 기사단장은 빼앗듯 종이를 가져가 읽었다.
“수고했네. 그리고 미안하네. 모두 그리폰 기사단과 푸토코아를 위한 일이라 생각하게.”
“…….”
존 미치 남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내려질 형벌이 뭔지를 두고 고민할 때다.
자연스럽게 존 미치 남작의 뒤로 돌아간 기사단장이 벼락처럼 그를 덮쳐 입을 막았다.
“읍!”
존 미치 남작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작열감에 눈을 부릅떴다.
심장과 함께 마나홀이 파괴되었다.
덜덜 떨고 있는 존 미치 남작의 입을 뒤에서 감싸고 있던 기사단장이 속삭이듯 말했다.
“몰랐다고는 하지 말게. 경이 나였어도 이렇게 했을 테니까.”
마지막 경련이 멎자 콜라시오 키퍼 자작은 존 미치 남작에게서 손을 뗐다.
4서클 마법인 ‘진실의 눈’을 속일 방법이 없는 이상, 자백서를 유서로 만드는 게 가장 확실한 뒤처리였다.
***
그날 오후.
히르헤라 에스카토스 왕국군 중앙 지휘 통제 막사.
에스카토스 공작이 기막힌 표정으로 들고 있던 종이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암살 의뢰가 존 미치 남작의 단독 행동이었고, 구금해 두었던 존 미치 남작이 자살을 했다?”
엘리오에게 봉작이 내려지던 날 공식적으로 백작에 임명된 토비아스 푸토코아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귀족가에서 자주 쓰는 방법이군.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이걸 믿을 거라 생각하나?”
“라고아 남작이 믿든 믿지 않든 그건 사실입니다.”
에스카토스 공작이 심드렁한 눈으로 어린 백작을 응시했다.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교활한 이 젊은 녀석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
“자네,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의중에는 관심도 없군.”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해 보게.”
“출세를 위해 주군을 배신한 야인의 생각에는 관심 없습니다.”
“쯧쯧! 엘리오 라고아 남작은 자네의 가신이 아니야.”
“외람된 말씀이오나 베르나르도 후작이 그를 거두기 전까지, 그는 푸토코아의 병사였습니다.”
“있을 때 잘해 주지 그랬나. 아무리 야인을 차별한다 해도 소드 익스퍼트에게 병사는 너무했지.”
“그건 선대의 결정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배신한 걸 보니 그 결정이 옳았다는 걸 알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주군에게 칼끝을 돌릴 수 있는 기사를, 베르나르도 후작이 왜 중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토비아스 푸토코아 백작이 원망 어린 눈으로 에스카토스 공작을 보았다.
에스카토스 공작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위기에 기회가 나고,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하지 않던가. 엘리오 라고아 남작은 빙벽의 균열이 낳은 영웅이네. 에스카토스 왕가의 시조가 왕족이었는 줄 아나? 푸토코아의 시조 역시 백작은 아니었네. 야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야인으로 죽으라는 법은 없다 이 말일세.”
“푸토코아 백작가에게 엘리오는 주군을 배신한 야인일 뿐입니다.”
“경의 뜻은 잘 알겠네. 이거야 원 타협의 여지가 보이지도 않는군.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설득에 관심이 없다면 그 유언장은 누구를 위한 건가?”
“진실 그 자체를 위한 겁니다.”
“경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군. 알았으니 그만 가 보게. 나는 더 이상 경과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분쟁에 관여하지 않을 걸세.”
“…….”
머뭇거리던 토비아스 푸토코아 백작이 물었다.
“코드란테스 백작이 히르헤라로 온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사실이네.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올 걸세.”
“알겠습니다.”
토비아스 푸토코아 백작은 묵례를 해 보이고 돌아섰다.
이윽고 출입구로 걸어가는 그의 귓가에 에스카토스 공작의 말이 들려왔다.
“나와 국왕 전하께서는 우리 에스카토스 왕국군에 더 이상의 분열이 없기를 바라네. 코드란테스 백작에게도 그런 뜻을 밝힐 생각이고.”
멈칫했던 토비아스 푸토코아 백작은 말없이 떠나갔다.
에스카토스 공작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코드란테스 백작과 손을 잡아 보시겠다? 그깟 유서 따위에 움직일 코르란테스 백작이 아닌데…….”
문득 에스카토스 공작은 히르헤라의 균열이 표시된 거대한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2미터였다는 균열의 폭은 어느새 4미터로 확장되어 있었다.
궁정 마법사가 마법으로 틀어막고 있음에도 그렇다.
날씨가 따뜻해서 그런 거라면 차라리 이해를 하겠지만, 북방의 날씨는 여전히 추웠다.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은 흑마법의 영향이라고 했지만 그것도 미덥지가 않다.
‘창조신의 가호를 무시할 정도로 강한 흑마법이 있을 리가…….’
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에는 또 히르헤라에 떨어진 ‘메테오 스웜’이 걸린다.
히르헤라에 또다시 ‘메테오 스웜’이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에스카토스 공작은 머리를 흔들어 생각만으로도 오싹한 상상을 털어 냈다.
***
히르헤라 베일럼 왕국군 주둔지.
셀레투스 기사단.
“애나. 어젯밤에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에서 길을 잃었다지?”
숙소에서 열심히 마력총을 닦고 있는 애나 로건이 뒤를 돌아보았다.
부단장인 줄리 그린우드 남작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네.”
애나 로건은 짧게 답하고 다시 마력총을 닦았다.
줄리 그린우드 남작은 아카데미 선배로 제법 친하게 지냈었다.
하지만 친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린우드 백작가가 첫째 왕자, 로건 백작가가 둘째 왕자를 지지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도 금이 갔다.
“그렇다면 그 소식도 들었겠네?”
애나 로건은 반응하지 않았다.
사적인 친분이 깨진 지 오래인데 갑자기 친한 척하니 난감할 뿐이다.
애나 로건이 침묵하자 줄리 그린우드 남작은 갑자기 정색을 했다.
“부단장이 묻는데 태도가 불량하군.”
그제야 애나 로건은 마력총을 내려놓고 돌아앉았다.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몰라서 답하지 못했습니다.”
“호호! 장난이야. 장난. 뭘 그렇게 진지해?”
“…….”
애나 로건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참았다.
셀레투스 기사단에 줄리 그린우드 남작이 부임해 올 줄 알았다면 지원하지 않았을 게다.
“너, 혹시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루퍼스 중대장에 대한 소문 들었니?”
이미 알고 묻는 표정이라 애나 로건은 부인하지 않았다.
“네.”
“그랬구나.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에서 너를 본 사람들이 있더라고. 그쪽 지휘관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봤다나, 어쨌다나.”
애나 로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못 들었다’고 시치미를 뗐으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어떤 관계야?”
다짜고짜 묻는 질문에 애나 로건은 기가 막혔지만 고분고분 답했다.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서 잠깐 길 안내를 받았을 뿐이에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
“몰라요.”
애나 로건은 지난밤 그가 싸우던 모습을 떠올렸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알아 두면 좋을 거야. 엘리오 라고아 남작. 푸토코아 백작가의 야인 부족 출신이야. 출세를 위해 푸토코아 백작군을 버리고 베르나르도 후작가로 갔단다. 베르나르도 후작의 눈에 들 정도로 검술은 뛰어나지만, 배신의 아이콘이라서 가까이 하기는 좀 꺼림직한 남자랄까? 네가 보기에는 어떻디?”
“판단할 만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지 못해서……. 모르겠네요.”
애나 로건은 줄리 그린우드 남작을 돌려서 깠다.
그에 대해 뭘 안다고 배신의 아이콘이라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어머, 그거 혹시 라고아 남작의 편을 들어 주는 거야?”
“아닌데요?”
“여하튼 단장님에게 들었는데 에스카토스 왕국군은 난리가 난 모양이더라.”
“왜요?”
애나 로건은 저도 모르게 묻고는 ‘아차!’ 싶었다.
다행히 줄리 그린우드 남작은 그녀가 보인 관심을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암살범들의 배후가 푸토코아 백작가로 밝혀져서 라고아 남작과 푸토코아 백작가의 싸움이 시작될 거 같단다. 하필 이 시국에 내분이 일어난 거지. 우리가 남 얘기할 처지는 아니지만. 훗!”
어딘지 자조적인 웃음이지만 애나 로건은 못 본 척했다.
“애나, 가문을 위해 그와 어떻게 해 보려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도움이 필요해도 그렇지 배신자에 눈독을 들이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
“도움이 필요한 건 그린우드 백작가가 아닌가요? 무력으로 찍어 누르려면 힘이 필요할 텐데요.”
객관적으로 볼 때 첫째 왕자 쪽의 세가 약했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베일럼 왕국의 첫째 왕자는 전형적인 방탕아로 귀족들의 신망을 잃은 지 오래였다.
오죽하면 귀족들이 둘째 왕자를 지지할까.
소수의 귀족들이 첫째 왕자를 옹위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면 내분도 일어나지 않았을 정도로 첫째 왕자는 왕위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귀족들 의견이 나뉘다 보니 왕위를 승계하는 작업도 공중에 떠 버렸다.
그나마 왕자들이 악독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피바람이 불었을 게다.
하지만 그것도 최근 들어 많이 변했다.
첫째 왕자를 옹위하려는 소수의 귀족들이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건 백작가의 영애인 애나 로건에 대한 납치 시도도 그중 하나였다.
“여하튼 나는 라고아 남작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 줬다. 선택은 네 자유지만, 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총기를 손질하고 싶은데요?”
그만 가 달라는 말이다.
줄리 그린우드는 미련이 남았지만 이렇다 할 용무가 없는지라 돌아서야 했다.
‘앙큼한 것. 천하의 애나 로건이 라고아 남작에게 관심을 보인다고?’
말로는 그에 대해 모른다고 했지만 몸이 보인 반응은 그게 아니었다.
***
히르헤라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
루퍼스 중대.
늦은 오후.
엘리오가 심심파적으로 에너지 볼을 입안에 물고 굴릴 때 파비안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중대장님! 들으셨습니까?”
“컥! 커억―!”
에너지 볼이 목에 걸려 컥컥거리던 엘리오가 파비안에게 눈을 부라렸다.
“야! 인마! 사람 놀라게 할래? 뭔데 그래?”
“그리폰 기사단의 존 미치 남작이 유서를 남겨 놓고 자살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