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62
1062회. 따로 살면 큰일 납니다
히르헤라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
푸토코아 백작군 숙영지.
왕국군 참모장 메토 로베르트 자작이 푸토코아 백작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알바 누베스 산맥을 배상금으로 지불하고 덮으십시오. 공작님께서는 대귀족들과 엘리오 남작의 충돌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내가 이 꼴이 됐는데 덮으라는 거요?”
푸토코아 백작이 퉁퉁 부은 눈으로 참모장을 노려보았다.
만약 메토 로베르트 자작이 푸토코아 백작가의 사람이었으면 욕부터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에스카토스 왕가의 자작.
비록 자신보다 낮은 품계의 귀족이지만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렇습니다. 감히 한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참모장의 조심스러운 청에 푸토코아 백작은 해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히르헤라의 균열은 북부 왕국들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균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최우선입니다. 공작님도 그래서 그와 같은 지시를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로베르트 자작.”
“예.”
“나도 남의 손톱 밑에 박힌 가시에는 관심이 없어. 하지만 자작의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혔다고 생각해 봐. 그 가시를 빼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할걸?”
“…….”
메토 로베르트 자작은 가타부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푸토코아 백작이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공작님의 지시를 전했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메토 로베르트 자작은 푸토코아 백작에게 꾸벅 인사를 한 후 떠났다.
홀로 남은 푸토코아 백작이 중얼거렸다.
“남의 일이라 이거지?”
뭔가 곰곰 생각하던 푸토코아 백작은 품에서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머뭇거리는 걸 보니 그 와중에도 갈등이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에 힘을 주어 비비자 구슬은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이윽고 그의 앞으로 마력장이 형성되는가 싶더니 한 사내가 나타났다.
제국의 암살 조직 크레센트의 흑마법사 마구스 찰스 맨슨이었다.
“결심을 했느냐?”
“소드마스터인 코드란테스 백작도 당해 내지 못한 놈입니다. 그자를 죽일 방법이 있습니까?”
”방법이 없다면 너에게 블랙 비드를 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뭡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매사 제멋대로인 푸토코아 백작도 7서클 흑마법사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굴었다.
“그 전에 묻겠다. 복수를 위해 너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느냐?”
“물론입니다. 놈에게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것이 너의 영혼을 바치는 일임에도?”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설마.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 하는 복수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럼 영혼을 바친다는 건 뭡니까?”
“마나 유저에 불과한 네 육체가 소드마스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격을 올려야 한다. 인간의 격으로는 어림도 없지.”
“어떻게 격을 올릴 수 있습니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격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게 가능합니까?”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흑마법이다.”
“누굴 받아들이게 됩니까?”
“마족, 혹은 마신.”
“누군지도 정확히 모른다는 겁니까?”
“누가 너를 마음에 들어 할지 모르니까. 너의 영혼을 마계의 명부에 올리면 누군가 찾아올 것이다. 보통은 마족이 관심을 보이지만, 간혹 예기치 않게 마신들이 관심을 보일 때도 있다. 그거야말로 예기치 않은 행운이지.”
“마족이나 마신을 받아들이면 저는 어떻게 됩니까? 소문처럼 마물이 되는 거라면 싫은데요.”
“흐흐흐. 마물을 받아들이면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건 초보 흑마법사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고. 4서클의 메이지만 돼도 마물이 찾아오는 일은 없다. 하물며 나는 7서클의 마구스다. 마물은 네 영혼의 근처에도 오지 못하니 안심해라.”
“마나를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하다마다. 네가 마물이 된다면 내 마나를 마나 프트라스께서 거둬 가도 좋다.”
맹세는 마물 한정으로 바뀌었지만 푸토코아 백작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
베르나르도 후작군 숙영지.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엘리오는 파비안을 중대장 막사로 불러들였다.
“찾으셨습니까? 중대장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지?”
“알고 있습니다. 베일럼 왕국군이 균열 감시에 투입되는 첫날 아닙니까?”
“비상대기 태세 유지하라고 했지?”
“소대장들에게 말해 두었습니다.”
“행여나 다른 대귀족들에게 책잡힐 짓 하지 마라. 더 이상 후작님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우리 중대도 이제는 더 이상 신출내기들이 아닙니다. 지난번 균열 감시 투입 이후로 다들 독이 오른 상태이니 괜찮을 겁니다.”
“베일럼 왕국군 합류로 주둔지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져 있더라. 밀주 냄새도 전보다 더 진해졌고. 아직은 술 때문에 사고 치는 사람이 없어서 봐주고 있는데……. 소대장들 잘 관리해라.”
“예! 준비 태세 단단히 하라고 두 번 세 번 강조하겠습니다.”
“준비 태세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풀어져 있으니 조심하자고. 말귀를 못 알아먹겠냐?”
“예, 그래서 준비 태세를 단단히 하겠다고 말씀드린 겁니다만?”
“됐다. 무슨 말을 못 하겠네. 괜히 병사들 괴롭히지 말고 대낮부터 소대장들하고 도박이나 하지 마. 나가 봐.”
“준비 태세는요?”
“알아서 하라고 인마!”
엘리오가 버럭 소리치자 파비안이 구시렁거리며 막사를 나갔다.
정오경, 베일럼 왕국 셀레투스 기사단의 애나 로건이 ‘몸을 가볍게 하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엘리오를 찾아왔다.
엘리오는 약속대로 그녀에게 경신술을 가르치려 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경신술은 단지 빠른 몸놀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엘리오를 흉내라도 내려면 내력을 써야 하는데, 혈도의 설명에서 막혔다.
“예? 혈관요? 마나를 혈관으로 보내요?”
애나 로건이 황당한 눈으로 엘리오를 보았다.
아까부터 자꾸 마나를 혈관으로 보내라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답답하기는 엘리오도 마찬가지다.
혈도라는 말이 없는지 반지는 계속 혈도를 혈관이라고 했다.
물론 비슷하기는 할 게다.
그러니 그렇게 통역을 했으리라.
하지만 혈관에 마나를 흘려보내야 한다는 말을 애나 로건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묻지 말고 그냥 해 봐요.”
“아니요, 마나가 심장에 모여 있는 건 사실이지만, 마나와 혈관은 별개라서요. 그런 게 가능한가요?”
“나도 영기가 아랫배에 모여 있지만 혈관으로 보냅니다. 가능하니까 해 보라는 거예요.”
그 말에 한참을 낑낑거리던 애나 로건이 말했다.
“안 돼요.”
“그게 안 되면 배울 수가 없어요.”
“그 전에 진짜 마나를 혈관으로 보내는 게 가능해요?”
“내 움직임은 마법이라고 착각할 만큼 빨라요. 그렇죠?”
“네.”
“그런 움직임이 근육의 힘만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불가능하죠. 해 볼게요.”
애나 로건은 마침내 진지하게 마나를 혈관으로 보내는 것을 연습하기로 했다.
앉은 자리에서 한 시간 이상 끙끙거리던 그녀는 점심 식사 종소리가 들리자 엘리오를 힐끔 쳐다보았다.
“남작님, 식사하셔야죠?”
“예, 우리 주둔지에서 먹으면 말들이 많을 테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죠.”
“내일 같은 시간에 오면 될까요?”
“오늘부터 9일간 베일럼 왕국군이 균열 감시를 맡는 거죠?”
“네, 오늘 아침 크레타 중대가 균열 감시에 투입됐어요.”
“셀레투스 기사단도 투입되나요?”
“왕궁 기사단은 베일럼 왕국군 최후의 보루라서 주둔지에 상주해요.”
투입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최후의 보루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왕족과 대귀족 들을 지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마나를 혈관에 보낼 수 있을 때까지는 혼자서 연습하세요. 보낼 수 있게 되는 날 정오에 찾아오시고요.”
“혼자서 하라고요?”
애나 로건이 놀란 눈으로 엘리오를 보았다.
물론 배울 준비가 돼야 만나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여기에 있어 봐야 어차피 혼자서 해야 하잖아요. 괜히 정신만 산만해져서 방해될 겁니다.”
애나 로건은 ‘아니요. 괜찮아요.’라는 말을 삭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기는 하네요. 그럼 연습을 하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찾아올게요. 그 정도는 괜찮겠죠?”
“그야 당연하죠. 언제라도 찾아오세요.”
“감사해요.”
자리에서 일어난 애나 로건은 정중하게 베일럼 왕국식 작별 인사를 건넨 후 사라졌다.
그녀가 떠난 직후 파비안이 불쑥 막사로 들어왔다.
“중대장님?”
“왜?”
“식사하러 가셔야죠?”
“왜? 나하고 먹으러 가게? 중대 소위들과 안면을 터야 한다면서? 벌써 다 튼 거야?”
“예, 이제야 이름하고 얼굴이 따로 놀지 않습니다. 약속이 있으신 건 아니죠?”
“있겠냐?”
심드렁한 엘리오의 말에 파비안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왜요? 애나 로건 양은 남작님이 식사하자고 하면 좋아할 텐데.”
“너 애나 로건 경에게 관심 있냐?”
“설마요. 제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잊으신 겁니까?”
“아니. 네가 입만 열면 애나 로건 경 이름을 들먹거리니까 그러지. 오해받고 싶지 않으면 그러지 마. 듣는 사람 오해한다.”
“에이, 왜 그러십니까? 이게 다 중대장님을 위해서 그러는 건데.”
“나? 너야말로 잊었냐? 나 임자 있는 몸이라고.”
“어디에요?”
“고향에.”
“산의 부족은 푸토코아 백작에게 다 죽었잖습니까. 이제 그만 현실로 좀 오십쇼.”
“죽긴 누가 죽었다고 그래? 잘만 살아 있는 사람을.”
“혹시 가족들이 다른 부족에 있는 겁니까?”
“어.”
“예? 왜요? 같이 사신 게 아니었습니까?”
“뭘 그렇게 놀라? 살다 보면 가족들 따로 살 수도 있지.”
“따로 살면 큰일 납니다.”
“큰일은 개뿔.”
“정말이라니까요. 중대장님을 보십쇼. 지난번에는 애슐리 넬슨 남작, 이번에는 애나 로건 양, 주변에 여자가 계속 맴돌지 않습니까? 남자들만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세상 사람들의 절반이 남자입니다.”
“헛소리는 거기까지. 다 이유가 있으니 그러는 거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눈 돌릴 품성이면 같이 산다고 안 돌릴 것 같으냐?”
“쩝.”
파비안이 계면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중대장의 말이 맞다.
당장 중대장만 봐도 주변에서 미모의 여기사들이 들이대는데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같이 피부 맞대고 살아도 바람을 피울 사람은 피우기 마련이다.
“가서 식사나…….”
엘리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급박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땡! 땡! 땡! 땡! 땡―!
엘리오가 파비안을 보았다.
“이거 비상 종소리 맞지?”
“맞습니다. 균열 감시 부대가 뚫렸나 봅니다. 와아! 무슨 첫날부터 저러냐?”
“그럼 이제 어떻게 하는 거냐?”
“전투 태세를 갖추고 알파, 벨라투스, 찰리 중대가 출동합니다. 우리는 알파 중대 지원이라서 조금 애매한 상황이네요.”
“일단 가 보자. 빨리 정리할수록 좋은 거니까.”
“중대장님, 잠시 기다려 보십쇼.”
파비안이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나가려는 엘리오를 불러 세웠다.
“왜?”
“균열 앞쪽의 공간이 많은 건 아니잖습니까? 우리가 한 개 부대씩 돌려 가면서 막고 있는 것도 그래서고요. 네 개 부대가 몰려가면 오히려 전투에 방해가 될 겁니다.”
“그런가?”
엘리오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파비안을 보았다.
기사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했다고 하더니 역시 생각하는 게 남달랐다.
“그래도 일단 전투 태세는 갖추어야 하니 중대장님은 10분쯤 후에 나와 주십시오.”
말과 함께 파비안이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으려던 엘리오의 눈이 번득였다.
종소리가 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기이한 기운이 해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뭐지?’
지금까지 히르헤라에서 이 정도의 기운은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다.
그때 막사 밖에서 파비안의 절규가 들려왔다.
“중대장님! 빨리 나오십쇼! 뭐하십니까!”
10분 후에 나오라던 놈이, 빚 받으러 온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