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71
1071회. 어떻게 된거냐 파비안
히르헤라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
베르나르도 후작가 진영.
중대 숙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엘리오는 곧바로 알파 중대장을 만났다.
지난 사흘간의 이상 현상에 대한 그의 의견도 파비안과 같았다.
“타메이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흘간이나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히르헤라에 배치받은 이후 처음입니다. 엘리오 남작님까지 그렇게 말씀하시니 아무래도 참모님에게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세요.”
엘리오는 이쯤에서 슬쩍 빠질 생각이었다.
어차피 윗선에 보고를 한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니스 로빈 남작은 그가 빠져나가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같이 가셔야죠. 제가 열 마디 하는 것보다 엘리오 남작님 같은 분이 한마디 하는 게 더 효과적입니다.”
“…….”
틀린 말은 아닌지라 엘리오는 데니스 로빈 남작과 함께 후작군 참모 오스카 아비드 자작을 찾아갔다.
“……사흘 내내 마수가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타메이온에서 모종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알파 중대장의 보고가 끝나자 오스카 아비드 자작은 바로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의견을 물었다.
“루퍼스 중대장은 어떻게 생각하오? 혹시라도 그게 마족 침공의 전조 현상일 수도 있겠소?”
“지난번에 보니 마족이 꽤 체계적으로 마물과 마수를 부리더군요. 마물과 마수가 특정 장소에 집결해서 균열 근처가 조용할 수도 있습니다.”
“흐음…….”
오스카 아비드 자작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게 정말 마족으로 인한 것이라면 마족 침공의 전조 현상에 가까웠다.
“알겠소. 두 사람의 의견을 왕국군 참모장에게 전하도록 하리다. 수고들 했소. 다른 보고 사항이 없으면 그만 돌아가 쉬도록 하시오.”
“예, 그럼 이만.”
엘리오와 데니스 로빈 남작이 오스카 아비드 자작에게 인사를 올린 후 돌아갔다.
잠시 생각하던 오스카 아비드 자작은 간이 책꽂이에서 히르헤라 현황 일지를 꺼냈다.
과연! 주둔지에 도착한 이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마수가 출현했다.
몇 달간의 기록을 다 뒤져 봤지만 마수가 출현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균열이 커 갈수록 마수와 마물의 출현 빈도가 높아졌다.
지금은 협곡처럼 아예 길이 뻥 뚫린 상태.
마수나 마물의 숫자가 늘면 늘었지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오스카 아비드 자작은 히르헤라 현황 일지를 들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
히르헤라 베일럼 왕국군 주둔지.
셀레투스 기사단.
이른 아침.
기사단장 조르바 아미쿠스 백작이 부단장 애나 로건에게 말했다.
“로건 경 덕분에 요즘 내가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바빠졌어.”
불려 다녀 바쁘다는 사람이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히르헤라 주둔지에도 왕도처럼 대귀족들이 따로 모여 친목을 다진다.
단지 친목 모임이라고 무시하면 큰일이 난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주둔지 부대의 병력 재배치와 보급 문제까지 거론되기 때문이다.
환영받지 못했지만 기사단장이 꼬박꼬박 친목 모임에 참가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마력 총사대인 셀레투스 기사단 단장은 대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근접전이 두려워서 칼 대신 마력총을 잡았다’는 고정된 이미지 때문이다.
일왕자와 이왕자 간의 왕위 승계 다툼이 벌어졌을 때도 셀레투스 기사단장은 열외였다.
셀레투스 기사단장이 대귀족들의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얼마 전까지 그랬는데 마족의 침공 이후 분위기가 바뀌었다.
원수인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애나 로건을 부단장에 임명했고, 대귀족들은 중요한 대화의 자리에 셀레투스 기사단장을 불렀다.
낙오자에서 얼떨결에 핵심 인물이 되어 버린 조르바 아미쿠스 백작은 애나 로건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애나 로건 부단장이 사과하자 조르바 아미크스 백작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아니야. 경 덕분에 요즘 살맛이 난다는 이야기를 한 거야. 셀레투스 기사단장이 되고 나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다고. 알잖나? 셀레투스 기사단을 귀족들이 은근 무시하는 거. 기사단장도 마찬가지야. 대귀족들 모임에 나가면 들러리 신세를 면치 못해. 그런데 경 덕분에 요즘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중요한 회의에는 꼭 불려 나가고, 내 의견도 물어봐 주거든.”
“아, 네에.”
“참, 줄리 그린우드 남작과의 관계는 좀 어떤가? 신경 쓰이면 다른 보병 중대로 보낼 수도 있는데.”
보병 중대에도 총병이 있으니 그리로 배치하겠다는 이야기다.
“괜찮습니다.”
“그래? 말만 하게. 원수님도 그린우드 남작 문제는 자네의 의견을 참고하라고 하셨으니까.”
“그린우드 남작이 보직 변경의 심사를 요청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아직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실감하지 못한 거지. 원수님의 이왕자 지지 선언으로 왕도도 쑥대밭이 됐다던데. 일왕자도 갈려 나가는 판국에 고작 남작의 보직 변경을 누가 신경 쓴다고.”
“…….”
뻘쭘한 얼굴로 서 있던 애나 로건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면 기사단을 좀 둘러보고 싶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 그러게. 추후에 혹시라도 그린우드 남작이 하극상을 범하면 바로 말해 주게. 아예 작위를 회수하고 보병 부대로 보내 버릴 테니까.”
“예.”
애나 로건은 꾸벅 묵례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셀레투스 기사단원들 막사로 걸어가던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며칠 사이에 주둔지 분위기가 변했다.
더 이상 일왕자와 이왕자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귀족은 없었다.
왜 그런가 했는데 이제야 알겠다.
원수인 허버트 리베라토 공작이 대귀족들에게 이왕자의 지지를 선언한 모양이다.
그 소식이 아직 줄리 그린우드 남작의 귀에 들어가지 않은게 분명하다.
자신도 기사단장에게 ‘원수가 이왕자를 지지했다’는 것을 들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아직 세상이 바뀐 걸 실감하지 못하는 건지,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는 건지…….’
잠시 후 막사에 도착한 애나 로건은 휘장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쉬고 있던 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애나 로건에게 예를 취했다.
애나 로건은 고개를 까딱여 화답하고 줄리 그린우드 남작을 향해 다가갔다.
이윽고 그녀는 줄리 그린우드 남작의 앞에 멈춰 섰다.
그러나 줄리 그린우드 남작은 손에 들고 있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상관에 대한 예의가 없군요.”
그제야 줄리 그린우드는 고개를 들어 애나 로건과 눈을 마주쳤다.
“작위부터 받고 그런 소리를 해.”
“하극상으로 신고해도 될까요? 보직 변경 심사 요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텐데요.”
“작위도 받지 않은 기사에게 고개를 숙이는 남작은 없어. 세상이 잘못된 거야. 나는 그 부조리한 세상에 순응하고 싶지 않아.”
애나 로건은 피식 웃었다.
“순응하지 않겠다는 것치고 하극상에 대한 변명이 긴 것 아닌가요?”
“지금은 네가 이긴 것 같지? 부단장의 지위를 만끽하도록 해.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자리라는 걸 곧 알게 될 거야.”
“…….”
그 말에는 애나 로건도 반박하지 못했다.
아직 마나 유저에 불과한 자신에게 부단장 자리가 과분한 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이 원해서 얻은 부단장 자리가 아니지만, 애나 로건은 변명하지 않았다.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세상이 잘못됐다느니, 부조리한 세상이라느니 하는 말이 와전되면……. 선배 하나가 벌받고 끝나지는 않을 테니까.”
순간 줄리 그린우드 남작은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 전해 들으니 실로 위험천만한 발언인 까닭이다.
놀란 줄리 그린우드 남작을 뒤로하고 애나 로건은 돌아섰다.
마지막에 한 방 먹여 줄 수 있어서 기뻤지만 개운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셀레투스 기사단 막사를 나선 그녀는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로 걸음을 옮겼다.
***
히르헤라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
베르나르도 후작군 진영.
균열 최전방에서 내려오면 15일간 장비를 점검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 기간 동안 부상을 치료하고, 부서지거나 마모된 장비를 수리한다.
하지만 이번처럼 마수와 전투 한번 없는 경우, 내려오면 그냥 쉬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파비안의 수련은 멈추지 않았다.
파비안은 루퍼스 중대 뒤의 공터에서 오전 내내 롱소드를 휘둘렀다.
부웅! 붕―!
지금 그는 한껏 고양된 얼굴로 그 어느 때보다 더 검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침에 처음 롱소드를 잡았을 때부터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뭔가 엄청난 일이 다가오는 느낌이다.
처음 드래곤 플라이를 펼치는 순간, 엘리오 중대장의 가르침대로 마나가 몸속에서 쭉쭉 내달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황당하게도 중대장의 말처럼― 혈관을 흐르는 마나가 느껴졌다.
그때부터 롱소드는 더욱 가벼워졌고, 검의 궤적이 그림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이것은 혹시 중대장님이 말씀하시던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마음[劍意]인가?’
의식은 거기까지였다.
그 뒤로 파비안은 무아지경에 빠져 롱소드를 휘둘렀다.
롱소드에 맺힌 검기가 대기 가르는 소리가 공터를 가득 메웠다.
츠츠츠츠―.
애나 로건이 루퍼스 중대에 도착한 것은 그때였다.
엘리오 라고아 중대장을 찾아가던 그녀의 걸음이 소리를 따라 공터로 향했다.
‘아!’
애나 로건의 입이 벌어졌다.
왕국이나 제국의 굵직굵직한 검술과 달리 어딘지 섬세한 동작인데, 검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운은 멀리 떨어진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강했다.
‘대단하다!’
한참 검술을 펼치던 파비안이 롱소드를 쭉 내뻗었다.
롱소드 끝에 새파랗게 마나 오라가 맺혔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하아아―!”
파비안이 길게 숨을 내뱉으며 검을 거두자, 애나 로건이 허겁지겁 달려갔다.
“파비안 경! 방금 그거, 마나 오라 아니었나요?”
그제야 애나 로건을 발견한 파비안이 뿌듯한 얼굴로 답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다니요? 마나 유저가 어떻게 마나 오라를? 그건 소드 익스퍼트나 가능한 거잖아요?”
“저 오늘부터 소드 비기너입니다.”
“아! 축하드려요. 어쩐지 롱소드 소리가 다르다 싶었어요. 그런데, 마나 오라는 어떻게 된 거죠? 분명히 제가 봤다고요. 경의 검끝에 마나 오라가 맺히는 걸요.”
“항상은 아니고요. 드래곤 소드의 마지막 동작에서만 잠깐 그렇게 되더라고요.”
“예에?”
애나 로건이 반신반의한 눈으로 파비안을 보았다.
항상은 아니라고 하지만, 드래곤 소드의 마지막에 그렇게 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원하는 순간에 잠깐이지만 마나 오라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파비안이 애나 로건을 힐끔 보았다.
검사의 검술 비밀에 대해 묻다니?
그녀가 검사였다면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잠깐 멈칫했지만 총사인 애나 로건의 순수한 호기심에 답을 하기로 했다.
“중대장님 가르침에 따라 마나를 계속 움직이는데, 어느 순간 마나가 혈관을 따라 달리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그 뒤로는 보셨다시피 드래곤 소드의 마지막 동작에 마나 오라가 만들어진 거고요.”
“…….”
애나 로건은 황당한 눈으로 파비안을 보았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결국 혈관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소리였다.
파비안은 멍하니 서 있는 애나 로건에게 묵례를 보내고 중대장 막사로 달려갔다.
“중대장님! 저 드디어 조금 전에 소드 비기너가 됐습니다! 모두 중대장님 가르침 덕분입니다!”
파비안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하자 엘리오가 뚱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그런데 내 대륙공용어는 너의 검술만큼 늘지가 않는다. 어떻게 된 거냐, 파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