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70
1070회. 오늘은 조용하네요
히르헤라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
그날 저녁, 라미노프 왕국 시찰단을 태운 비공정이 주둔지 위로 떠올랐다.
비공정을 응시하던 에스카토스 공작이 참모장에게 물었다.
“뭐라고 하던가?”
“돌아가는 즉시 파병을 건의하겠답니다. 시찰단 앞에서 빙벽 상부를 지탱하던 아치가 무너지고, 마수를 격퇴하는 것까지 봤으니 뜸들이지 않을 겁니다.”
“나도 그러기를 바라네.”
에스카토스 공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족의 침공 이후로 히르헤라 주둔지의 병력을 늘려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제국에도 지속적으로 지원을 요청하게. 제국의 관심을 남부가 아닌 북부로 돌려야 하네.”
“예, 그런데 제국이 북부로 병력을 지원하겠습니까? 척 봐도 자기들 대신 라미노프 왕국을 밀어 넣으려는 분위긴데.”
“그렇기는 하네만 대륙 최강은 누가 뭐래도 제국군이네. 히르헤라를 지키려면 그들의 협조가 필수야. 다른 북부 왕국들에 대한 소식은 없나?”
“다들 라미노프 왕국과 비슷합니다. 시찰단을 보내 사실 확인부터 하겠답니다. 다들 빙벽에 구멍이 났다는 걸 쉽게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천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 왔으니 그럴 법도 하지. 마족의 침공이 늦어지기만 기도해야겠군.”
“마족이 다시 침공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빙벽에 큰 구멍이 나면 없던 관심도 생길 걸세. 하물며 아나킨이 인간세계로 넘어와 한차례 싸우기까지 했지. 다른 마족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그냥 넘어갈 것 같은가?”
“…….”
“마족은 다시 침공할 걸세.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지금의 히르헤라 주둔군만으로 막아 낼 수 있을까요?”
“글쎄. 아나킨처럼 한두 개 하위 마족들이라면 막을 수 있겠지만, 만에 하나 마족 군주가 직접 군단을 이끌고 온다면……. 몰살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에스카토스 공작이 암울한 눈으로 전방을 응시했다.
빙벽에 발생한 균열이 마족의 침공으로 이어질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막상 그 일이 현실로 다가오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
라미노프 왕국 시찰단을 시작으로 북부 왕국들의 시찰단이 하루 간격으로 히르헤라에 도착했다.
북부라고는 하지만 에스카토스 왕국과 국경을 맞댄 곳은 베일럼과 라미노프 왕국이다.
사실상 히르헤라의 균열로부터 다른 북부 왕국들은 제국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히르헤라의 균열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당장 빙벽을 따라 마수와 마물이 이동하면 바로 북부 왕국들에 닿기 때문이다.
제국과 달리 중간에 완충 지대가 없는 북부 왕국의 시찰단은 균열을 확인하자마자 허겁지겁 돌아갔다.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
좋은 날도 다 가고 마침내 에스카토스 왕국군이 균열에 투입될 차례가 됐다.
그리고 그 출발을 알파 중대가 끊었다.
자연히 푹 퍼져 있던 루퍼스 중대도 알파 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함께 움직여야 했다.
균열 최전방으로 이동하던 파비안이 툴툴거렸다.
“왜 알파 중대가 시작입니까? 원래대로 하면 마지막 차가 알파 중대잖습니까?”
“새 마음으로 새 출발하겠다잖냐. 어차피 쉬는 날은 같으니까 그러려니 해라.”
엘리오는 파비안의 불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2개 왕국군의 6개 중대가 3일씩 균열을 지킨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새 마음 새 출발이 아니라 지휘부에서 헷갈리니까 투입 순서를 초기화시킨 거 아닙니까. 그 바람에 우리는 6일이나 일찍 임무를 받게 된 거고요.”
“그게 그거지. 어차피 3일 일하고 15일 쉬는 건 변함이 없는데 뭐가 불만이야.”
“6일이나 먼저 일하게 됐으니까 그러는 겁니다.”
“아, 진짜. 똑같은 소리 지겹지도 않냐? 병사들이 너보고 웃는다.”
“겉으로 웃고 있지만 속마음은 저와 같을 겁니다.”
“헛소리 그만하고. 보급품 확인했지? 오랜만의 임무 투입이라고 빼먹은 거 있으면 안 된다.”
엘리오가 확인하듯 물었다.
기사는 자기 물건만 챙기면 되지만 지휘관은 중대원들 것까지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예, 예. 식량과 파이어 스톤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쇼. 보급관도 우리 중대에는 아주 후합니다. 더 달라고 사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퍼 준답니다.”
“동상 걸리지 않게 중대원들 잘 지도해. 우리 중대에서 동상으로 손가락 발가락 자르는 사람 나오면 넌 끝이야.”
“중대장님. 게으른 놈은 왕도 구제를 못 한다고 합니다. 저 게을러서 동상 걸리는 게 왜 제 탓입니까?”
“게을러지지 않게 쪼라고 인마.”
“하아! 동상보다 마수와 싸우다가 손발 잘리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쓰읍! 하여간 불필요하게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고! 기사 아카데미 나온 거 맞아?”
“예, 맞습니다. 우리 중대에도 기사 아카데미 선배와 후배 있습니다.”
둘이 노닥거리는 사이 균열 최전방에 도착했다.
루퍼스 중대는 이전처럼 알파 중대의 후방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균열을 본 파비안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중대장님. 보셨습니까?”
“균열?”
“예, 엄청 커졌는데요? 위쪽까지 뻥 뚫렸습니다. 이젠 아예 통로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러게.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녹는 속도가 빨라진 건가.”
“둘 다인 것 같습니다.”
“야아. 이거 지키고만 있을 게 아니라 벽이라도 쌓아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러게 말입니다. 윗분들에게서 별말씀 못 들으셨습니까?”
“일개 중대장에게 그런 말을 해 주겠냐?”
“그래도 영주님이시잖습니까?”
“데리고 온 영지병도 없으면서 영주 대접을 바라면 안 되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중대장님이 일당천인데, 당연히 영주 대접을 받아야죠.”
“그거야 내 입장이고. 저 윗분들이 그런 것까지 생각해 주겠냐? 자기들 앞가림하기도 바쁠 텐데.”
“이렇게 마음이 넓으신 분인데 왜들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뜬금 없는 파비안의 말에 엘리오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
“중대장님이 단순하고 폭력적이시랍니다.”
“내가?”
엘리오가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항상 결과를 예측하고 행동하는 자신에게 단순하고 폭력적이라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모르겠다.
“예.”
“왜?”
“귀족과 평민 들 앞에서 푸토코아 백작을 두드려 팼잖습니까.”
“신성한 결투였잖아.”
“에이, 그게 무슨 결툽니까. 솔직히 제가 봐도 그건 결투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고 폭력적이다?”
“예, 제가 볼 때 중대장님의 잣대는 좀 오락가락하십니다. 아니 심하게.”
“심하게 뭐?”
“분노의 기준이 들쭉날쭉하시다고요.”
“감정에 충실한 거야.”
“하지만 그래서야 중대장님이 싫어하는 푸토코아 백작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다르지.”
“뭐가 다른데요?”
“나의 분노는 정의롭다.”
“아…….”
그 말에는 파비안도 반박하지 못했다.
확실히 중대장이 미친놈처럼 날뛰기는 했지만 그런 상대는 정해져 있었다.
‘푸토코아 백작가나 암살 조직처럼 박살 난 귀족이나 평민은…… 없구나.’
그는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왔고, 기사와 병사 들을 챙겼다.
한마디로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한’ 다소 기괴한 성품의 귀족이었다.
균열 최전방의 하루가 지나갔다.
엘리오의 옆에서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바라보던 파비안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오늘은 조용하네요.”
“그러게.”
엘리오가 이제는 협곡처럼 변한 균열을 응시했다.
바로 앞의 프록스 중대는 하루 평균 다섯 마리 정도의 마수를 처치했다던데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다.
문득 ‘폭풍 전의 고요’라는 말이 떠올랐다.
‘설마 아니겠지.’
엘리오가 고개를 저을 때 파비안이 물었다.
“라미노프 왕국에서도 파병한다면서요?”
“어.”
“와아! 이러다 히르헤라에 북부의 왕국들이 죄다 모이는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좋아할 것 없다.”
“예, 예, 그만큼 위험하다는 말씀이시죠? 그래도 북부 왕국군이 모이는 건 무려 오십 년 만의 일입니다. 왕국 연합이야말로 기사들의 로망 아니겠습니까.”
“그런 로망도 있냐?”
“그럼요. 기사를 알아주는 게 기사 아닙니까! 히르헤라에서 이름을 떨치면 북부 왕국 전역에서 유명해집니다. 작위를 받는 것도 그만큼 빨라지고요.”
“작위를 받으려면 소드 비기너부터 돼야지.”
“물론 그렇습니다만 소드 비기너라고 죄다 작위를 받는 건 아니니까요. 어느 정도 유명해지지 않으면 순서에서 밀리기도 합니다.”
“아하! 그런데 너는 이미 ‘균열의 기사’로 이름을 날렸잖아? 그거로 부족해?”
“누가 부족해서 그럽니까? 그냥 북부 왕국의 기사들 사이에 더 이름을 떨치고 싶다 이거죠. 중대장님도 에스카토스와 베일럼 왕국에서나 알아주지, 다른 데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르면 어때서?”
“모르면 귀찮은 일이 생기죠. 가는 곳마다 신분을 증명해야 하고, 하룻강아지들이 시비를 걸기도 하고, 어쩌다 푸토코아 백작과 같은 영주와 얽히면 두 발 뻗고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아하!”
엘리오는 파비안의 말에 일정 부분 공감했다.
강호에서도 그랬다.
유명해지고 난 뒤로는 녹림의 마두들이 설설 기어서 칼 뽑을 일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엘리오도 북부 왕국들이 기다려졌다.
다음 날도 마수는 출몰하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알파 중대와 루퍼스 중대는 마수와의 싸움 없이 사흘을 보내고 디바 중대와 교대를 했다.
주둔지로 내려가는 내내 파비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보다 못해 엘리오가 물었다.
“파비안, 뭐 두고 온 거라도 있냐? 얼굴이 왜 그래?”
“중대장님,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지난 사흘 동안 균열에서 마수가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적은 없었지 않습니까?”
“마수가 나올 때도 있고 안 나올 때도 있지. 나오기로 약속을 한 건 아니잖아?”
엘리오도 이상했지만 부대원들의 사기를 고려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쳤다.
“제가 몬타노사 산맥에 있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몬타노사 산맥 끝에 동해가 있습니다.”
“동해면 바다라는 거야?”
“예.”
“그런데?”
“가끔 해산물을 구하러 어촌에 간 적이 있는데요. 그때 어부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본론만 말하자.”
“수십 년에 한 번씩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온답니다. 그럴 때면 해변의 물이 바다쪽으로 쭉 빠져나가서, 바다 밑에 있던 뭍이 드러날 정도라네요.”
“…….”
“그다음은 아시죠?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와 해변가 마을을 싹 쓸어버린답니다. 그래서 바닷물이 갑자기 쭉 빠져나가면, 사람들은 산 위로 대피를 한답니다.”
“와아! 수십 년마다 그런 게 오는데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단하다.”
“제 말의 요지는 그게 아닙니다. 균열에 마수들 씨가 마른 거 말입니다. 왠지 바닷물이 싹 빠져나가는 것과 비슷한 느낌 아닙니까?”
“산더미 같은 파도가 올 거다?”
“예, 제 느낌이 그렇습니다.”
“괜찮아. 여기는 산이니까.”
“중대장님. 제 말은 그 파도가…….”
“거기까지. 후작군 참모님께 말씀드릴 테니까 걱정은 그만해라. 걱정한다고 균열이 다시 메꿔지는 건 아니잖냐.”
“그, 그렇기는 합니다.”
“주변을 둘러봐. 네 말 때문에 다들 쫄아 있잖아. 안다고 뭐 달라질 게 있냐? 사기를 생각하자고 사기.”
“예,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냐. 시기적절했어. 나도 그 비슷한 말을 떠올리고 있었거든. 폭풍 전의 고요라고.”
“저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군요?”
“나는 뭐 바보냐? 사흘 내내 마수가 한 마리도 안 나온다는 게 말이 되냐고?”
“디바 중대도 비슷하겠죠?”
“그러지 않겠냐?”
두 사람은 그 말을 끝으로 약속이나 한 듯 더는 균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사상자가 단 한 사람도 발생하지 않았지만 루퍼스 중대의 분위기는 어둡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