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87
1087회. 나를 따라가고 싶냐?
히르헤라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
주둔지로 내려가자마자 엘리오는 베르나르도 후작의 참모인 오스카 아비드 자작의 호출을 받았다.
엘리오가 그를 찾아가자 오스카 아비드 자작이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거 쉬셔야 하는데 불러서 미안합니다.”
승작의 소문이 나돌아서 그런지 오스카 아비드 자작은 아예 존대를 했다.
“괜찮습니다. 잠자리만 바뀌었지 별로 한 일도 없습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 균열 인근은 이전보다 더 고요한 상태였다.
인간의 땅에서 달아난 마수와 마물은 균열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오스카 아비드 자작이 친근한 미소로 말했다.
“모두 라고아 남작님 덕분입니다. 새로운 마수와 마물이 출현하기까지 잠잠할 테지요.”
“그럴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 뵙자고 한 건 균열 감시 부대 운영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조언요?”
“베일럼과 라미노프 왕국에서 이전과 같은 부대 운영 방식에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삼교대나 이교대를 투입할 병력이 없다고 합니다.”
“한 번만 맡겠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교대 주기가 짧아지더라도 한 개 부대밖에는 지원할 수 없답니다.”
“음…….”
엘리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기야 이번에 입은 피해를 생각하면 이전처럼 세 개 중대는 어려울 터였다.
오스카 아비드 자작이 설명하듯 말했다.
“억지 주장은 아닙니다. 그들보다 피해가 적은 우리 에스카토스 왕국도 두 개 중대로 줄어들었으니까요. 베일럼과 라미노프 왕국은 한 개 중대밖에 편성을 못 할 겁니다.”
“그럼 모두 네 개 중대로 균열 감시를 하겠다는 건가요?”
“그 부분에서 라고아 남작님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내가 협조할 게 있나요?”
“현재 우리 왕국군은 알파, 골리앗, 그리고 알파 중대를 지원하는 루퍼스 중대, 이렇게 세 개 중대가 균열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루퍼스 중대가 지원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균열 감시를 맡게 된다면……. 총 다섯 개 중대가 투입되게 되는 셈입니다.”
“아…….”
“균열 감시에 투입되는 부대의 피로를 덜어 주기 위해서 루퍼스 중대가 지원이 아니라……. 정식으로 균열 감시 임무를 맡았으면 좋겠다는 게 왕국 연합군 지휘관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엘리오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바로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오스카 아비드 자작이 엘리오 라고아 남작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덧붙였다.
“물론, 라고아 남작님이 동의하신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미 우리 베르나르도 후작군의 알파 중대가 균열 감시에 투입되고 있으니까요. 다만 균열 감시 부대의 피로도를 생각해서 루퍼스 중대가 나서 주면 좋겠다는 의견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엘리오는 거절하지 않았다.
사실 지난 사흘간 균열 감시 초소에서 루퍼스 중대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비슷할 것 같았다.
하는 일 없이 알파 중대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게 계속되면 결국 말이 나올 게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이 선선히 받아들이자 오스카 아비드 자작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승작이 결정되면 라고아 남작님의 보직에도 변화가 생길 겁니다. 그때까지만 루퍼스 중대를 이끌어 준다 생각해 주십시오.”
“다른 보직을 받게 되나요?”
“전사한 케리 도우너 자작을 대신해 불사조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가게 될 겁니다.”
“그럼 루퍼스 중대는?”
“파비안이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혹시 그를 기사단으로 데리고 가겠다면, 다른 사람을 임명할 수도 있습니다.”
“파비안도 작위를 받게 되나 보죠?”
“그렇습니다. 파비안은 오래전부터 눈여겨보던 인재라 지체없이 상신을 올렸습니다. 라고아 남작님의 승작과 동시에 처리가 될 겁니다.”
“잘됐군요. 기사단으로 데리고 가지는 않겠습니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아직은 그를 데리고 다닐 계획이 없습니다.”
“예,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용무는 끝났습니다. 이제 돌아가도 됩니다.”
“아, 예.”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오가 몇 걸음 걷다가 문득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루퍼스 중대의 균열 감시 투입은 언제부터 시작되는 건가요?”
“이미 시작했으니 라미노프 왕국까지 한 바퀴 돌리고 난 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파 중대 다음이면 12일 후가 되겠고, 골리앗 중대 다음이면 15일 후가 되겠군요. 언제로 원하십니까?”
“골리앗 중대 다음으로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골리앗 중대 뒤, 15일 후로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용단을 내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후작님과 저도 큰소리 좀 칠 수 있게 됐습니다.”
엘리오는 피식 웃어 보인 후 자리를 떠났다.
“알겠습니다. 골리앗 중대 뒤, 15일 후로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용단을 내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후작님과 저도 큰소리 좀 칠 수 있게 됐습니다.”
***
베르나르도 후작군 진영.
루퍼스 중대.
중대장 막사로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파비안이 찾아왔다.
“중대장님. 왜 불렀답니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들을래?”
“아, 진짜. 설레게 왜 그러십니까? 나쁜 소식 먼저 들려주십시오.”
“우리 루퍼스 중대도 단독으로 균열 감시 임무를 맡게 됐다. 15일 후부터 투입하기로 했으니까 중대원들 준비 단단히 시켜라.”
“아! 결국 그렇게 됐네요? 하여튼 남 잘되는 꼴을 못 본다니까요. 좋은 소식은요?”
“조만간 너에게도 작위가 내려질 모양이다. 나 승작하는 날, 너에게도 작위를 준단다. 작위를 받으면 루퍼스 중대도 네가 지휘하게 될 거다.”
“그럼 중대장님은요?”
“불사조 기사단의 부단장이 전사를 해서 공석이래. 나더러 부단장 하란다.”
“저도 데리고 가 주십쇼.”
“루퍼스 중대는 어쩌고? 네가 맡는 게 다른 사람이 오는 것보다 나을 텐데?”
“그야 그렇지만 중대장님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나중에 부를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너 데리고 가 봐야 시킬 일도 없고.”
파비안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데리고 가 달라고 고집부리지는 않았다.
기사단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면 기사 시절 그의 목표였던 중대장 일을 맡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부르시겠다는 약속 꼭 지키십쇼.”
“너나 그때 가서 싫다고 발뺌하지 마.”
“발뺌 안 합니다. 중대장님에게 배울 것도 많고, 모든 기사들의 최종 목표는 영주의 기사가 되는 거 아닙니까! 엘런 파레스 기사단장님처럼 말입니다.”
“…….”
엘리오는 꿈에 부푼 파비안을 힐끔 보았다.
자신이 슬래시 랜드의 영주로 살 생각이 없다는 걸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너 꿈이 야무지구나?”
“하하! 야무지다니요. 중대장님이 영주니까 거의 다 이루어졌잖습니까? 설마하니 저를 후작가에 떼어 놓고 가실 건 아니시죠?”
“나를 따라가고 싶냐?”
“당연하죠! 저는 무조건 중대장님을 따라다닐 겁니다. 저를 떼어 놓고 갈 생각은 하지 마십쇼.”
“뭐 그러든지.”
엘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훗날 제국과 남부 대수림으로 갈 때 데리고 다니면 적적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속도 모르고 파비안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좋아! 됐다!’
파비안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을 따라 슬래시 랜드로 가서 몇 년 수련하면 금방 기사단장이 될 수 있으리라.
***
히르헤라 주둔지 사람들은 몰랐지만 마족과의 전쟁은 대륙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하던 북부의 왕국들이 앞다퉈 부대를 파병했다.
제국도 더 이상 방관하지 않았다.
남부의 긴장된 상황 탓에 본격적인 대처는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7전투 사단을 파병했다.
제국에서 악명 높은 전투 사단으로는 7전투 사단과 9전투 사단이 있다.
50년 전 제국 전쟁 발발 시 7전투 사단이 남부 왕국과의 전쟁에서 대활약했다면, 9전투 사단은 북부 왕국과의 전쟁에서 그랬다.
제국은 북부 왕국의 묵은 감정을 고려해 9전투 사단을 남부로 돌리고, 남부에 주둔하던 7전투 사단을 히르헤라로 전환 배치한 것이었다.
마족과의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 만에 히르헤라 주둔지로 북부 왕국 다섯 곳과 제국의 7전투 사단이 진출했다.
삭막하기만 하던 히르헤라 전역이 거대한 군사 도시로 변해 갔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균열 감시 부대도 대폭 늘어났다.
기존의 3개 왕국군도 충원을 했지만, 새로 들어온 다섯 개 왕국군과 7전투 사단의 가세로 이제는 한 달에 한차례 균열 감시 초소에 투입됐다.
히르헤라에 8개 왕국군과 제국 7사단이 주둔하면서 민간 사업자들도 물밀듯 밀려왔다.
황량하던 설원에 수십 개의 석조 건축물과 수백 개의 이동식 천막이 세워졌다.
새로 세워진 석조 건축물과 천막의 대부분이 음식점, 술집, 도박장이었다.
정식으로 출범한 ‘북부 연합 지휘 본부’에서는 민간 사업자들의 진출을 금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장려하는 편이었다.
히르헤라 주둔지가 단기간 운영될 상황이 아님을 알고 장기전에 대비한 것이다.
히르헤라 주둔지가 단기간 운영될 상황이 아님을 알고 장기전에 대비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장려하는 편이었다.
그동안 엘리오 라고아 남작은 자작으로 승작했고, 파비안은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은 불사조 기사단 부단장으로 영전됐고, 파비안도 루퍼스 중대장에 취임했다.
중대장이 된 뒤에도 파비안의 생활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균열 감시에 투입된 사흘을 제외하면 연병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의 목표는 슬래시 랜드의 기사단장이었다.
파비안은 슬래시 랜드로 가자마자 기사단장에 임명되기를 바랐다.
한 달이 지나자 균열 주변으로 마수와 마물이 하나 둘 출현하기 시작했다.
쫓겨 달아나던 날의 기억을 잊었든지, 타메이온 저편에 새로운 놈들이 자리를 잡은 것이리라.
그래도 8개 왕국 연합군과 제국 7사단의 주둔으로 히르헤라는 평화로웠다.
히르헤라 주둔지.
여관 겸 술집 크리소페디오(황금 들판).
석양 무렵, 제법 규모가 있게 지어진 석조 건물 안으로 두 남자가 들어섰다.
문짝 열리는 소리와 함께 냉기가 휘몰아치자 1층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 쪽을 향했다.
그들은 새로 나타난 남자들의 복장을 확인하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술집 겸 여관인 크리소페디오는 병사들 월급으로 출입하기 어려운 곳인지라 기사들 전용이었다.
파비안이 신기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는 엘리오를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면 촌놈 취급받습니다. 그냥 오십쇼.”
“이야. 언제 이런 게 생겼대?”
“언제라뇨? 여기가 가장 먼저 세워진 술집입니다. 히르헤라에 개발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며칠 안 다니다가 와 보면 집 한 채가 뚝딱 서 있다니까요.”
“천막만 보다가 석조 건물을 보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주인이 부잔가 봐?”
“그러게요. 히르헤라에 이런 건물을 지으려면 돈깨나 들었을 겁니다.”
“건물만 좋으면 뭐해? 술맛이 좋아야지.”
“그래서 제가 모시고 온 거 아닙니까? 입맛에 딱 맞으실 술을 제가 발견했습니다.”
때마침 주문을 받으려고 여점원이 다가왔다.
기다렸다는 듯 파비안이 호기롭게 말했다.
“맥주 두 잔과 적당한 안주로 부탁하지.”
“안주로는 견과류와 훈제한 소고기, 닭고기, 오리…….”
“닭고기요.”
엘리오가 여점원의 말을 끊었다.
“그럼, 맥주 두 잔과 훈제한 닭고기로 가져다 드릴게요.”
손님이 많은 탓에 여점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돌아갔다.
“그런데 맥주가 뭐냐?”
“남부에서 유행하다가 최근 제국까지 알려진 술이랍니다. 히르헤라의 술집에서 요즘 가장 잘나가는 술입니다. 달달하고 고소한 게 입맛에 딱 맞으실 겁니다.”
“그래? 검술을 포기하고 술집만 돌아다닌 모양이네? 그것도 괜찮은 선택이야. 인생 뭐 있다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즐기다가 가는 게 낫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