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15
1115회. 강물, 바다, 기름
부라퀴족 선두에 있던 족장 판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위 마족인 부라퀴족의 생존 본능이 위기 신호를 보냈다.
참새 떼처럼 떠들던 상위 마족들을 달아나게 할 정도의 존재라면 부라퀴족은 그가 숨만 불어도 가루가 될 터였다.
쿠웅―!
문이 완전히 열리자 판의 시선은 습관적으로 위쪽으로 향했다.
부라퀴족 입장에서 ‘몰록의 성’은 모든 게 컸기에 판의 고개는 위로 꺾여 있었다.
그런데 7미터 쯤 높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판의 시선이 조금 더 아래로 향했다.
중간에도 없다.
마족의 평균 키가 5미터니 이쯤이면 보여야 정상이다.
더 아래로 고개를 내리자, 거대한 궁전 문에 어울리지 않게, 정말 작은 마족(부라퀴족) 하나가 보였다.
판은 부라퀴족으로 보이는 마족과 눈이 마주치자 급히 허리를 숙였다.
자신이 아카드 산지에서 출발한 부라퀴족의 선두이니 상대는 말로만 듣던 부라퀴족 군주가 틀림없었다.
“부라퀴족 족장 판이 존귀하신 모쿠바스의 군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그의 뒤쪽에 있던 부라퀴족들도 허리가 부러져라 굽혔다.
엘리오가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여어! 아카드 산지의 부라퀴족! 우리 동족! 어서 와요! 오늘도 안 오면 내가 찾아가려고 그랬는데, 잘 왔어요. 일어나요. 얼굴이나 좀 보게.”
백여 년쯤 전 멍청한 흑마법사에게 소환당한 경험이 있던 족장 판은 천천히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대륙 공용어를 알아듣지 못한 다른 부라퀴족들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만 끔뻑였다.
부라퀴족들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엘리오가 판에게 말했다.
“일어나라고 해요.”
“에르게세 렉토(모두 똑바로 서라).”
판의 말에 부라퀴족들은 조심스럽게 숙였던 허리를 폈다.
부라퀴족은 새로운 군주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라이는 새로운 그들의 군주를 유심히 살폈다.
일단 외형은 부라퀴족을 닮았다.
그녀가 부라퀴족이라고 확신하지 못한 것은 얼굴빛과 눈 때문이다.
시뻘건 얼굴과 용암처럼 타오르는 붉은 눈은 보기만 해도 무서웠다.
부라퀴족이라기보다는 말로만 듣던 마왕 같았다.
상위 마족인 아나킨들이 문 열리는 소리만 듣고 달아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가까이서 대면한 새 군주는 공포의 마왕을 보는 듯했다.
그런데 왜 마족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때 판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두 손으로 바쳤다.
그것은 검은 수정으로 만든 목걸이였다.
“저희 부족의 보물인 ‘트레듀서’라는 아티팩트입니다. 군주님께서 마족의 언어를 모르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걸 사용하시면 마족들과 대화가 되실 겁니다.”
부라퀴족은 약한 마족답게 문제를 대화로 풀려는 성향이 강했다.
트레듀서는 그런 부라퀴족의 염원이 만들어 낸 중급 아티팩트였다.
엘리오는 마족들과 대화가 된다는 말에 목걸이를 받았다.
트레듀서는 소환을 경험하지 않은 마족들과 뜻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던 참에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가 목에 목걸이를 걸자 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부라퀴족의 선물을 새 군주가 마음에 들어 하는 걸 보니 앞으로의 일도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엘리오의 뒤에 서 있던 파비안이 신기한 눈으로 부라퀴족들을 보았다.
부라퀴족들이 야인 속에 섞여 살았다고 하더니 정말 인간을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의 정체를 몰랐다면 타메이온에 잡혀 온 인간인 줄 알았을 것이다.
‘신기하네. 마족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솔직히 부라퀴족은 ―얼굴과 눈동자가 시뻘겋게 변한― 엘리오 자작보다 자신과 더 닮아 있었다.
잠시 후 엘리오는 부라퀴족들을 이끌고 내성 중앙 홀로 이동했다.
아나킨족 족장이자 ‘몰록의 성’ 관리를 맡고 있던 멘티로어는 부라퀴족 족장 판에게 내성의 일을 모두 넘긴 후, 슬그머니 중앙 홀을 빠져나갔다.
내성 중앙 홀에는 엘리오와 파비안, 그리고 부라퀴족만 남았다.
보좌에 앉은 엘리오와 부라퀴족들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부라퀴족들이 눈알만 굴리자 엘리오가 말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요. 아는 건 모두 말해 줄 테니까.”
그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쏘우가 물었다.
“군주님, 로디나 대륙에는 얼마나 많은 부라퀴족들이 남아 있습니까?”
“몰라요. 교류를 전혀 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살았으니까. 타메이온의 부라퀴족들은 교류를 하고 있나요?”
엘리오가 되묻자 쏘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저희도 다른 부라퀴족의 상황을 알지 못합니다.”
엘리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부라퀴족을 사칭해도 전혀 문제 될 건 없었다.
로디나 대륙과 타메이온의 부라퀴족들이 각자도생하는 분위기라면, 무슨 말을 해도 통하기 때문이다.
눈치를 살피던 라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그런데 왜 군주님은 마족의 말을 하지 못하세요?”
엘리오가 여자 마족을 보았다.
강호에 있을 때 자신의 주변을 한동안 맴돌던 누군가를 닮았다.
‘누구였지? 이름도 기억이 안 나네.’
잔뜩 겁먹은 얼굴이지만 눈동자에는 열정이 가득했다.
“조상 때부터 쓸 일이 없으면 잊고 살 만도 하죠.”
“아!”
라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수천 년 전에 생긴 빙벽을 생각하면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때 부라퀴족에서 어린 축에 드는 샤이가 눈치 없이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군주님의 얼굴은 부라퀴족을 닮았는데 왜 피부 색깔과 눈이…… 빨간가요? 그건 부족의 특성인가요?”
샤이는 새 군주가 불쾌하게 받아들일까 봐 나름 그럴듯한 답을 덧붙였다.
하지만 엘리오의 대답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과 달랐다.
“경지가 높아져 종족의 한계를 초월하다 보니 이런 모습이 됐네요.”
그 대답에 부라퀴족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자기들이 생각해도 그보다 더 이치에 맞는 답은 없었다.
데몬족들은 경지가 높아지면 메리에 뿔도 돋아난다.
그걸 생각하면 눈이 빨개지는 건 변화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자 잔뜩 굳어 있던 부라퀴족들의 표정도 풀어졌다.
마왕 같은 엘리오가 보기와 달리 친절하다는 것을 알게 된 때문이다.
부라퀴족들은 이런 군주를 왜 아나킨족들은 그렇게 무서워 덜덜 떠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씽이 인간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희는 군주님을 가까이서 모시기 위해 코디악으로 왔습니다. 저 인간을 내성에 계속 두실 계획이신지요?”
씽은 인간을 새 군주의 종이나 노예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부라퀴족이 없을 때의 일이다.
이제 군주 옆에 부라퀴족이 있으니 인간을 치워야 할 때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직 소개를 안 시켰군요. 저 남자의 이름은 파비안입니다. 파비안은 인간족 챔피언으로 내 가족과도 같습니다. 함께 지내는 동안 나를 대하듯 하세요. 만에 하나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코디악의 모든 마족을 죽일 겁니다. 맹세하지요. 코디악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 겁니다.”
엘리오의 눈에서 혈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그 눈빛을 본 부라퀴족은 공포에 잠식되어 숨도 쉬지 못했다.
그제야 부라퀴족들은 왜 아나킨족들이 그를 피해 다녔는지 알았다.
방금까지 친절하다고 생각했는데 죽음을 말하는 새 군주의 눈은 마치 악신 샤이틴처럼 보였다.
부라퀴족들이 덜덜 떨자 엘리오는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중앙 홀을 붉게 물들이던 혈광이 가라앉았다.
혈광이 가라앉자 부라퀴족들은 막혔던 숨을 몰아쉬었다.
헐떡이는 그들의 귓가에 새 군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수일 내로 코디악을 떠날 겁니다. 타메이온과 로디나 대륙을 둘러보고 올 계획이거든요. 그때까지 여러분이 나 대신 성 관리를 맡아서 해야 합니다. 다른 군주가 오면 외유 중이라고 적당히 잘 둘러대세요. 중요한 건 모쿠바스의 군주는 나고, 시찰을 마친 후에 돌아올 거라는 사실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새 군주의 말에 집중하던 부라퀴족들은 한목소리로 답했다.
“그만 물러가서 맡겨진 일을 하세요. 일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멘티로어를 찾아가서 물어보고요.”
이번에는 족장인 판이 부라퀴족을 대신해 답했다.
“예.”
대화가 끝났음에도 부라퀴족이 움직이지 않자 엘리오가 손을 휘저었다.
그제야 부라퀴족은 중앙 홀을 비우고 나갔다.
잠시 후 파비안만 남자 엘리오가 말했다.
“이제 다들 나를 부라퀴족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
“부라퀴족요? 그보다 훨씬 상위의 무서운 마족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 그럼 더 좋고.”
“그런데 얼굴과 눈은 왜 그런 겁니까? 이제는 저도 자작님이 진짜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정돕니다.”
“너 영기와 마나와 마력의 차이를 알아?”
“모릅니다.”
“영기가 강물이라면 마나는 바다고, 마력은 기름이야.”
“강물, 바다, 기름요?”
“그래. 영기와 마나는 서로 다르지만 본질은 같아. 담수든 짠물이든 물이라는 건 변함없어. 하지만 마력은 달라.”
“기름이라는 거죠?”
“맞아. 흑마법사들이 왜 바디 체인지를 한다고 생각해?”
“마나와 마력이 달라서 그런 거 아닙니까?”
“반만 알고 있는 거야. 마력을 기름이라고 했잖아. 기름에 불이 붙으면 어떻게 돼? 장난 아니지? 흑마법사들의 마나에 마력이라는 기름이 첨가됐는데, 거기에 마법이라는 불이 붙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래서 흑마법사들의 마법 경지가 갑자기 올라가는 겁니까?”
“어, 영기나 마나에 작용하는 마력의 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야. 바디 체인지를 하지 않으면 마나홀이 터질 정도로. 흑마법사들이 흑마법에 빠져드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아. 마법 경지가 수십 년 정체되면 마력으로 눈을 돌릴 만도 해.”
“자작님이 그렇게 된 것도 그럼?”
“어. 굉장하지? 눈곱만큼 받아들였는데 이 지경이라고. 내 영기에 불이 붙은 것 같아. 활활 타올라.”
“괜찮으십니까? 바디 체인지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풋! 바디 체인지? 사람을 뭐로 보고. 나는 다른 차원에서 바디 체인지를 두 번이나 한 사람이라고.”
그건 사실이었다.
첫 환골탈태는 창고에 갇혀 지낼 때, 두 번째는 ‘왕들의 하늘’에서 영기지체로 바뀔 때 했다.
흑마법사들의 바디 체인지만큼이나 극적인 변화가 환골탈태였다.
“다행이네요. 저는 자작님 증상이 점점 더 심해져서 큰일 난 줄 알았습니다.”
바디 체인지를 두 번이나 했다는 말에 파비안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 내가 진짜 마족인 줄 알았어?”
“거울 좀 보십쇼. 무서워 죽겠습니다. 그런데 바디 체인지를 두 번이나 했다면서 왜 점점 더 증상이 심해지는 겁니까?”
“샤모스 때문이야. 너는 샤모스의 마력을 밀어내지만, 나는 흡수하고 있거든. 그러니 증상이 심해질 수밖에.”
“왜요? 그러다가 마력이 폭주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자작님 얼굴과 눈빛 진짜 장난 아닙니다. 그러다 한순간 훅 가실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무서운 마족이라는 걸 코디악의 마족들에게 각인시키려고. 그래야 내가 떠나도 한동안 잠잠할 거 아냐.”
“아…….”
“마족 챔피언들 봤지? 우리가 떠나고 난 뒤에 분명히 모쿠바스에 챔피언들이 하나 둘 생겨날 거다. 그것들이 텅 빈 ‘몰록의 성’을 보고 군침 흘릴 걸 생각해 봐. 주인 없는 성을 먹고 나면? 이번에는 더 많은 군주를 끌어들여 히르헤라로 진출할걸? 어쩌면 마왕을 꼬드기는 놈이 나올지도 몰라.”
“그건 또 그렇네요. 그래도 저는 자작님을 볼 때마다 조마조마합니다. 어떨 때는 눈빛만 봐도 가슴이 철렁한다니까요.”
“걱정 마. 내 영기는 천하무적이라고. 아직은 필요해서 마력을 방치해 둔 거야. 내 영기로 흡수해 버리거나, 방출하면 돼. 샤모스의 마력이라고 해 봐야 바다에 한 바가지 물을 더하는 정도니까.”
마력의 본질에 대해 무지한 엘리오는 자기 편한 쪽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