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4
114회. 철회하라면 하리다
-함께 갈게.
남궁연의 그 한마디는 짧았지만 강력했다.
처음에 연적하는 뒤에서 다른 사람이 한 소리로 알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그것이 남궁연의 목소리였음을 알게 된 순간, 멍하니 눈만 끔뻑였다.
처음으로 듣는 고운 목소리.
그런데 그게 상상하지도 못한 ‘함께 갈게’라니!
오랜 시간 그 문제를 함께 의논하다가 마침내 결정한 것처럼 말이다.
순간 남궁천이 빽 하고 소리쳤다.
“아니? 연이 네가 왜에!”
그는 남궁연이 말을 하면 행동으로 옮긴다는 걸 알기에 더 놀란 상태였다.
구천노도 심통은 얄궂은 표정으로 예의 그 ‘흐흐’ 하는 웃음을 흘렸고, 남궁천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펄쩍 뛰었으며, 연적하는 무념무상으로 보였다.
남궁연은 오라비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컨대 그녀에게 유명교와 관계된 일에 뛰어드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니까 말이다.
가족이 살해당하고 세가가 풍비박산 났는데 그걸 그냥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칠파이문은 유명교가 저지른 일을 보고도 움직임이 없다. 지킬 게 많으니 큰 싸움에 섣불리 뛰어들지 못하고 있는 거다.
그러던 차에 생각지도 않은 녹림에서 먼저 칼을 뽑아 들었다. 그것도 가까운 사람인 연적하를 통해서. 그의 바짓단을 잡고라도 가야 하는 자리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연적하가 말했다.
“누님, 무르기 없어요.”
“응.”
남궁연은 입이 트인 아이처럼 또박또박 답해 주었다.
넋 나간 얼굴로 앉아 있던 남궁천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적하야. 나도 간다.”
“그러세요.”
무덤덤한 그의 말투에 남궁천은 은근 상처를 받았다.
남궁연에게는 거듭 확약까지 받고 자신은 왜 ‘그러세요’란 말인가?
“흐흐흐…….”
아까부터 옆에서 음침하게 웃는 노인도 그렇고, 어째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
결국 남궁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나 열 좀 식히고 올게.”
“공자님, 저도 나가서 술이나 한잔하고 오겠습니다.”
심통은 연적하를 기다리다 고생한 일이 떠올라 이번에는 주루로 갈 생각이었다.
두 사람이 차례로 객청에서 나갔다.
머리를 긁적이며 할 말을 찾던 연적하의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저기 누님.”
“응.”
“제가 개봉에 있을 때 꼬마 거지를 만났었는데요.”
연적하는 그날 얻어맞던 꼬마 거지와 있었던 일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제가 아니라 그 거지를 따라가겠다고 하더라고요. 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대체 왜 그런 걸까요? 제 인상이 좀 나쁜 편인가요? 하긴 뭐 도둑들하고 지내니까…….”
“훗!”
남궁연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녹림에 몸담고 있는 그가 어린 거지를 구해 주려 했다는 게 기특했다.
“개방은 거칠어 보이지만 규율이 엄해. 동료애도 강하고. 어린아이를 괴롭히려고 때리진 않았을 거야. 네가 싫은 게 아니라 따라갈 이유가 없던 거지.”
“아, 그런 거예요?”
“네가 잘랐다는 몽둥이, 혹시 검은색이었어?”
“네.”
“그럼 내 말이 맞을 거야. 소광개는 괴팍한 사람이지만, 아직 누굴 괴롭힌 적은 없어. 오히려 베풀어 주고 돌봐 주는 편이지.”
“그의 이름이 소광개예요?”
“응, 개봉에서 흑철목 몽둥이를 가진 거지는 소광개뿐이거든.”
“누님은 보지도 않고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아요?”
“기억력이 좋아.”
말과 함께 남궁연이 제 머리를 가볍게 톡톡 쳐 보였다.
“와! 책 같은 거도 한 번 보면 다 외워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두 번 봐야 할 때도 있어.”
남궁연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단지 외우기 위해 같은 걸 두 번이나 본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
일월 중순.
정주 동남쪽 궁장.
와룡장.
새 단장을 마친 장원에 드디어 와룡장의 현판이 걸렸다.
백미주와 와룡검객 연무백 내외, 연승백이 입주함으로 와룡장은 정주에 뿌리를 내렸다.
현판식 날에는 백가장, 양가장은 물론 중원상방의 사람들까지 참석해 신임 가주가 된 연무백을 축하했다.
연무백의 처 양주가인 양이화가 안채에 모인 손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백가장에서 너무 많이 온 것 같지 않아요?”
양가장 출신인 양이화는 은근 백가장을 경계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낙양에서야 아무것도 몰라서 구경만 했지만, 정주는 다르다. 그녀는 정주의 와룡장만큼은 연무백이 손에 쥐기를 바랐다.
양가장에서 돈을 대준 것도 그러기를 바라서였다.
“신경 쓰지 마시오. 백호대가 돌아와서 그렇게 보일 뿐이니까.”
말과 달리 연무백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백가장에서 다시 돌아온 백호대는 소속이 불분명했다.
그들은 이전부터 백미주의 명에만 따르는 사람들이라 더 그랬다.
“새 제자를 받으면 괜찮아질 거요.”
물론 모든 건 희망 사항일 뿐이다.
사실 그는 제자를 들이는 것마저도 혼자 결정할 수 없다.
와룡장의 재정을 백미주가 틀어쥐고 있어서다.
제자를 들이고 가르치는 데 돈이 들어가니 모든 건 백미주와 상의해야 한다.
양가장에서는 와룡장 재건에만 관여했을 뿐 그 이상의 도움은 주지 않았다. 그럴 만큼 양가장의 형편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와 달리 백가장은 전폭적으로 백미주를 지원했다.
그녀가 낙양에서처럼 와룡장을 손에 쥐기를 바라서다. 백호대를 돌려 보내고, 백미주에게 따로 후원금을 보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양이화가 남편을 힐끔 보았다.
“이번에는 가가께서 전면에 나서 주셔요. 이젠 그러실 때도 되었잖아요?”
“제자들을 받으면 힘써 보겠소.”
연무백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하지만 현실은 어머니의 편이었다.
당장 저 백호대 이십오 명에 버금가는 제자를 키워 내려면 최소 일이 년은 걸릴 터였다. 그것도 어머니가 허락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
와룡장의 현판식 다음 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삼장불립’이라는 네 글자가 정주 무림을 강타했다.
객점, 반점, 주루, 기루는 물론 다관까지, 사람들은 모이면 삼장불립에 대해 말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백가장, 양가장, 와룡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이었다.
녹림은 그 방법으로 두 가지 행동 지침을 지시했다.
-첫째, 모든 녹림은 삼장의 제자를 고용한 상방으로부터 재물을 탈취한다.
-둘째, 정주의 사파는 삼장이 가진 정주의 상권을 빼앗으라.
삼장불립은 녹림 총순찰 연적하의 명령으로 그 어떤 것보다 앞선다고 했다.
만약 그것으로 끝났다면 ‘무슨 짓이지?’ 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파천마군이 그걸 보증함으로, 삼장불립은 절대의 권위를 가지게 됐다.
정의맹 정주 지부.
이른 아침부터 몰려온 백가장, 양가장, 와룡장의 사람들로 안마당이 북적거렸다. 모두가 삼장불립에 대한 대처를 위해 달려온 것이다.
의사청에 네 사람이 마주 앉았는데 분위기가 험악했다.
그들은 정의맹 정주 지부 지부장 승운검객 마천덕, 백가장주 무천검 백승호, 양가장 이화신창 양주환 그리고 와룡장의 신임 가주 와룡검객 연무백이었다.
분노한 양주환이 탁자를 후려쳤다.
꽝!
“마 대협! 우리는 지금까지 정의맹의 일을 내 일처럼 여기고 도왔소! 그런데 어찌 녹림의 그 미친 짓을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이오!”
백승호도 한마디 던졌다.
“녹림이 저렇듯 불의한 일로 삼장을 핍박하고 있는데 정녕 구경만 할 참이오!”
마천덕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외다.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소림사의 장문인께 협조 요청을 드렸소. 현백 대사께서 파천마군을 만나시겠다고 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구려.”
그러나 양주환은 만족하지 않은 얼굴이다.
“보시오! 기다리라고 하는 지금도 양가장의 제자들이 상방에서 쫓겨나고 있소! 그들이 본가에 몰려와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데 뭘 알아야 답을 할 게 아니오! 심지어 양가장이 운영하던 객점까지 빼앗겼소. 그런데 뭘 더 기다리라는 거요! 우리가 다 망해 길바닥으로 나앉을 때까지?”
“백가장 역시 양가장과 똑같은 상황이외다. 기다리라는 말만 하지 말고, 행동을 보여 주시오! 우리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존재 자체를 부정당해야 하냐 이 말이오! 막말로 이게 대화로 풀 일이오? 정의맹에서 무림첩을 돌려서라도 막아야 할 게 아니오!”
사실 양주환과 백승호가 원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싸움이었다. 대화로는 이미 빼앗긴 것들을 되찾아 오기 어렵다고 느껴서다.
마천덕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양주환과 백승호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은 고작 정주 지부장에 불과하다. 무림첩은 자신의 소관 사항이 아니었다.
“소림사에서 서두르겠다고 했으니 오늘내일 중으로 결과가 나올 게요. 파천마군이 아직 정주에 있다는 첩보가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구려.”
연무백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마 대협, 삼장불립을 보증한 사람이 파천마군이라는데 대화가 되겠습니까?”
“현백 대사께서 항의하면 그도 고집을 부리지 않을 거라고 보오. 협상이 결렬되면 결국 전쟁뿐인데, 우리는 그가 전쟁을 원하는 게 아니라고 믿고 있소.”
“파천마군이 원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그걸 알아보기 위해 소림사 장문인께서 친히 움직이겠다고 하신 게 아니오.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다.”
대화는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왔다.
양주환과 백승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마천덕을 노려보았지만 그뿐이다. 그들도 마천덕에게 결정권이 없음을 아는지라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결국 삼장의 가주들은 정주 지부에 눌러앉아 새로운 소식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정주.
다관(茶館, 찻집) 소양(素養).
정오 무렵. 갑자기 십여 명의 무인들이 몰려오더니 앉아 있던 손님들을 다 밖으로 내보냈다.
무인들은 다관의 주위를 철통같이 에워싸고 사람이 지나다니지 못하게 막았다.
일각쯤 지났을까?
황색 가사를 걸친 노승이 다관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갑자기 일진광풍이 몰아쳐 오자 무사들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그들이 다시 손을 떼는 순간, 다관의 문이 ‘덜컹’ 소리와 함께 닫혔다.
파천마군 석무해가 유령처럼 나타나자 현백 대사가 먼저 알은체를 했다.
“아미타불, 석 거사(居士)님. 오랜만입니다. 못 보는 동안 신수가 훨씬 좋아지셨습니다.”
현백 대사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석무해를 보았다.
그가 한때 소림사의 사람이었던지라 친근하게 거사라 부른 것이다.
“하하! 대사의 얼굴빛을 보니 그새 화후가 깊어지셨소. 무법 선사께서는 강녕하시오?”
“거사님 덕분에 잘 지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대사께서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를 보자고 한 게요?”
“허허허. 여전히 급하시군요. 그럼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삼장불립을 철회하여 주십시오. 정의맹과 녹림이 다투면 유명교만 득을 보게 될 겁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구려. 내가 삼장불립을 보증한 것은 유명교와 싸우기 위해서요. 칠파이문도 하지 못한 일을 하려는데, 그만두라고 막으시는 거요?”
“저런, 무슨 오해가 있으신가 봅니다. 그 삼장은 틀림없는 정의맹의 사람들입니다.”
“나는 녹림에 숨어든 유명교를 제거하려고 총순찰을 보냈소. 그놈들은 최소 십두마병. 나의 열두 제자들도 감당하지 못하는 고수들이라오.”
석무해는 연적하에게 그들의 정체를 모르는 것처럼 말했지만 유명교라 추측하고 있었다.
“그것과 삼장이 무슨 관계가……. 설마?”
뭔가 생각하던 현백 대사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렇소. 삼장이 우리 총순찰에게 찍힌 거요. 총순찰을 그놈들과의 싸움에 앞세우는 조건으로 내세운 게 삼장불립이었소. 그래도 철회하라 한다면, 철회하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