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62
1162회. 응원하러 와 주실 거죠?
아라곤 왕국은 제도에서 멀리 떨어진 공국이라 그런지 아직 전쟁이 난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영지 접경지에서 이루어지는 검문만 빡빡했지 막상 영지 안으로 들어가면 어디서 왔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50년의 평화로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인심도 넉넉했다.
엘리오 일행이 막 진입한 아크레온 성은 특히나 분위기가 밝았다.
창밖으로 거리의 사람들을 구경하던 엘리오가 중얼거렸다.
“도시가 활기차네.”
“그러게요. 거의 페트로폴리스를 보는 것 같습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따라 파비안의 얼굴이 휙휙 돌아갔다.
보다 못한 엘리오가 한마디 했다.
“사람 구경 처음 하냐? 그러다가 목 삐겠다.”
“사람들 옷차림이 제도만큼이나 화려하네요. 눈이 부시다, 눈이 부셔.”
“그러게.”
창밖을 살피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대귀족답게 그는 단번에 화려함의 원인을 알아챈 것이다.
“보라색 망토(케이프)가 많군요. 영주가 자유분방한 사람 같습니다.”
그의 말에 엘리오와 파비안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화려함의 원인은 연한 보라색 망토였다.
엘리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라색 망토는 대귀족만 쓸 수 있지 않나요? 저 사람들이 다 대귀족 같지는 않은데?”
보라색은 염색 비용이 비싼 탓에 제국과 왕국의 대귀족들만 사용했다.
심지어 보라색과 유사한 색깔조차 사용하지 못하게 법으로 막은 대귀족들도 많았다.
그 탓에 거리에서 보라색 망토를 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파비안이 설명하듯 말했다.
“색깔이 다릅니다. 대귀족들이 쓰는 건 로열 퍼플이라고, 저것보다 훨씬 진한 보라색입니다. 이곳 영주가 그런 쪽으로 꽤나 관대하네요. 보통은 흉내도 못 내게 하거든요.”
엘리오가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백작님은 왜 보라색 망토 안 입어요?”
“수행기사가 없어서 처음부터 지참하지 않았습니다.”
정적이 많았던 그는 신분을 감출 목적으로 입지 않았다.
게다가 그걸 입으면 남들이 엘리오와 파비안을 그의 호위기사로 오해할 테니, 입지 않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셋이서 옷차림을 두고 설왕설래할 때 마차가 식당 앞에 멈춰 섰다.
점심 식사 시간이라 따로 말하지 않아도 통한 것이다.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엘리오 일행은 주변을 산책했다.
식사 후 바로 마차에 타면 자칫 멀미를 할 수도 있어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다.
거리 곳곳에 바르도스의 공연을 알리는 광고가 붙어 있었다.
도시 크기는 작았지만 광고 숫자는 제도 북구 못지않았다.
엄청난 숫자의 공연 안내문에 파비안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와아! 제도 빼고 이렇게 많은 공연 안내는 처음 봅니다. 바르도스가 기사보다 많은 거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여러 공국을 구경한 엘리오가 알은체를 했다.
“그러게. 아크레온 영주가 부자인가 봐. 그러니까 이렇게 공연이 많지.”
“골목도 깨끗하고. 진짜 영주를 잘 만났네요.”
파비안이 부러운 눈으로 구석구석을 살폈다.
공국은 공왕을, 영지민들은 영주를 잘 만나야 행복해진다.
그런 점에서 아크레온 영지의 사람들은 복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둘의 대화를 듣는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얼굴에 착잡한 미소가 떠올랐다.
영주로서 척박한 자신의 영지를 떠올리니 부끄러웠던 것이다.
천천히 걷던 엘리오가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열심히 공연 광고를 붙이는 소년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십 대 중반이나 됐을까?
저 나이 때 자신은 창고를 탈출해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그때 풍연초를 만나지 못했다면 늑대의 밥이 됐을 게다.
광고를 붙이고 돌아서던 소년이 구경꾼들을 보고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소년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흘 전부터 아다부 홀에서 인기 바르도스 인안나 에레크 님이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까지니까 꼭 한번 들러 보세요.”
얼떨결에 정면에서 인사를 받게 된 엘리오가 물었다.
“연주만 하냐? 노래도 하냐?”
“둘 다요. 바르도스 계의 마검사로 불리는 천재시거든요.”
이세계 문화에 적응이 된 엘리오는 진짜 마검사냐고 묻지 않았다.
검술과 마법을 쓰는 마검사처럼 연주와 노래를 한다는 뜻이리라.
“천재 많네. 내 옆에 있는 기사도 천재라던데.”
소년이 놀란 눈으로 청년 기사를 보았다.
“와아! 기사님도 연주나 노래를 하세요?”
기사들 중에 연주와 노래 실력을 뽐내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소년은 파비안을 그런 기사 중에 하나로 착각한 것 같았다.
당황한 파비안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 나는 검술의 천재일 뿐이다. 연주와 노래는 듣기만 한다.”
“아! 그러시면 인안나 에레크 님의 공연도 꼭 보세요. 내일 공연을 끝으로 당분간 일반 공연은 안 하신다고 들었거든요.”
“공연을 안 한다고?”
“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위문 공연만 하시겠다고 하시네요?”
“그래? 위문 공연이 돈이 되나?”
“아뇨. 인안나 에레크 님이 전쟁 명문가 출신이거든요.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는 대신 위문을 다니시겠다고.”
“그래?”
파비안이 의외의 눈으로 소년을 보았다.
아라곤 왕국에서 처음으로 전쟁 이야기를 들으니 색다른 기분이었다.
“인안나 에레크 님을 응원하러 와 주실 거죠?”
파비안은 자신이 결정권자가 아니므로 소년의 똘망똘망한 눈빛을 슬그머니 외면했다.
그러자 엘리오가 답했다.
“돈벌이도 팽개치고 위문 공연을 다니는 바르도스라면 가서 응원해 줘야지.”
엘리오는 북부 왕국의 영주지만 제국과 왕국 어느 편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라면 의리 있는 자들의 편이다.
그러니 지금은 인안나 에레크의 의리 있는 행동에 감동받아 즉흥적으로 한 약속이라고 봐야 한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놀란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보았다.
북부 왕국의 영주가 남부 왕국과 전쟁 중인 제국군을 위해 위문 공연하겠다는 바르도스를 응원하겠다니?
50년 전 제국전쟁 시 북부 왕국과 남부 왕국은 동맹을 맺었다.
평화 시기가 계속되면서 동맹이 잊혀졌지만, 그렇다고 폐기된 것은 아니다.
남부 왕국이 요청하면 북부 왕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였다.
소년은 젊은 기사들에게 아다부 홀의 위치를 가르쳐 주고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엘리오는 풀칠이 마르지도 않은 공연 벽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오늘 2시에 하는 걸 보면 되겠네.”
“진짜 가시게요?”
“나는 약속은 지킨다.”
혈기 왕성한 파비안은 응원의 의미는 잊고 싱글벙글했다.
하지만 라르바 오마르 백작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라고아 경. 이런 상황에서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지만……. 북부 왕국과 제국이 잠재적인 적대 국가인 것은 알고 계십니까?”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표정을 본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내심 안도했다.
북부 왕국과 제국의 관계를 모르고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다.
“50년 전 제국전쟁 시에 북부 왕국과 남부 왕국은 동맹을 맺었습니다. 동맹이 아니었다면 북부와 남부 왕국은 제국에 흡수가 됐을 겁니다. 그 정도로 제국은 막강했으니까요.”
“아하! 동맹 상태였어요?”
“50년의 평화 시기 덕분에 동맹이 흐지부지됐지만, 어느 쪽에서도 파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국군이 남부 전선에 군사력을 모두 투입하지 않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그랬구나.”
엘리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국전쟁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북부 왕국과 남부 왕국의 동맹은 몰랐다.
공국의 검문소들이 갈수록 깐깐하게 구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제국군을 위해 공연하겠다는 인안나 에레크를 응원하신다니 드린 말씀입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래도 가겠냐는 무언의 압박이다.
파비안은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만 볼 뿐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던 엘리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약속을 했으니까 갈 거고, 두 사람은 마음대로 해요.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 참고로 나는 2시 공연을 보러 갈게요.”
“저는 자작님의 수행기사이니 사심을 내려놓고 따라가겠습니다.”
유명 바르도스의 공연을 보고 싶은 파비안이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
엘리오가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백작님은요?”
“저도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니 동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누군가 알아보면 나중에 말이 나올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아라곤 공국에서 제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럼, 슬슬 가 볼까요?”
세 사람은 아다부 홀이 있다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았다.
***
아크레온 영지.
아다브 홀.
에우로스 아크레온 백작이 사비를 털어 지었다는 아다브 홀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엘리오 일행은 아다브 홀로 들어가기 위해 길게 늘어선 사람들 뒤에 섰다.
앞뒤에 늘어선 사람들을 보던 엘리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와아! 마나 프트라스의 날이라 그런가? 대낮인데도 사람들 많네.”
대륙법에 의하면 7일에 하루는 마나 프트라스의 날로 쉬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다브 홀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30분 동안 반걸음씩 전진한 엘리오 일행은 마침내 아다브 홀에 입장했다.
엘리오와 파비안은 북부의 촌구석에서 올라온 기사들답게 연신 좌우를 둘러보았다.
거대한 홀의 벽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기사의 얼굴이 빼곡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저게 다 뭐냐?”
엘리오가 조각들을 가리키며 묻자 파비안은 애매한 얼굴로 답했다.
“귀족들의 얼굴 같은데요?”
그러자 공연을 구경하러 온 누군가 말했다.
“제국전쟁에서 활약한 아라곤 공국의 기사들입니다. 영웅 칭호를 받은 세 분의 소드마스터와 열다섯 분의 소드 익스퍼트들을 조각한 겁니다.”
뒤이어 또 다른 사람이 설명을 보탰다.
“제국전쟁의 성패를 가른 아크레온 전투에서 승리하고 영웅 칭호를 받았지요. 아다부 홀은 그분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어진 겁니다.”
주민들의 친절한 설명에 엘리오 일행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공연 관계자들이 나와서 대형 비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두런두런 잡담하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비파 설치가 끝나자 금발의 미녀가 무대 앞으로 사뿐사뿐 걸어나왔다.
“부족한 공연을 찾아 주신 아크레온의 시민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국과 남부와의 전쟁이 벌어진 지금, 아크레온의 전승 기념관인 아다브 홀에서 공연을 하게 되어…….”
그녀의 유려한 인사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고가 터졌다.
앞줄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고함을 내지른 것이다.
“피로 세워진 제국은 피로 멸망할 것이다! 왕국이여! 영원하라! 보스타니아 왕국 만세!”
사내가 난동을 부리자 경비병들이 그를 제지하기 위해 우르르 몰려갔다.
그리고 전대미문의 폭발이 일어났다.
꽈광―!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아다브 홀 앞쪽이 연기로 뒤덮였다.
깜짝 놀란 시민들이 비명과 함께 일제히 출입구로 몰려갔다.
“꺄아악!”
“폭발이다!”
“나가! 나가라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오 일행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출입구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출입구로 사람이 몰리면서 연이어 사고가 터졌다.
비명과 함께 사람들이 쓰러지자, 그 위를 다른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것이다.
그 참혹한 광경 앞에서 엘리오는 문득 구천현녀의 말을 떠올렸다.
―혼돈 속에 그들이 있으니 혼돈을 따라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