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95
1195회. 황태자가 하사한 독이 든 성배
제국 중부 크나우프 공작령.
크나우프 성.
조사관 카티아 미켈 남작은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과 기사단장 데이먼 아이작 백작 앞에서 보고를 이어 갔다.
“……벤젤이 라고아 자작에게 ‘왜 대전사를 해 주시느냐?’ 물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 라고아 자작이 답하기를 ‘자신이 검술 수행자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만. 정황상 ‘기사도’를 의미하는 것 같았습니다.”
“기사도?”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이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크나우프 대공가를 상대로 칼을 뽑았다니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예, ‘불의에 맞서 약자를 돕는다’라는 것 외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으니까요.”
“요즘 같은 세상에 기사도라. 농담의 소재로도 쓰이지 않는 걸 가지고 대전사가 되다니. 크나우프 대공가가 얕보인 건가? 아니면 북부 기사의 자만심인가? 조사관의 생각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북부 귀족들이 크나우프 대공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했다면 대전사가 되지도 않았겠지. 고슬링의 거기를 잘라 내는 일도 없었을 테고. 수고했다. 그만 돌아가도 좋다.”
“예.”
카티아 미켈 남작은 허리를 숙여 보인 뒤 조용히 물러났다.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이 데이먼 아이작 백작을 보며 피식 웃었다.
“경은 어느 쪽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나. 스페라 오블리오(마나탄)와 저격 중에.”
“저격이라 믿고 싶습니다.”
“믿고 싶다? 스페라 오블리오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건가?”
“대공 전하의 스페라 오블리오를 가까이서 지켜본 저로서는, 송구하지만 그렇게밖에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쯧! 고슬링 후작에게도 경과 같은 사람이 곁에 있었어야 하는데. 스페라 오블리오를 주장한 사람이 케이사 콜드월 백작이라지?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살의가 치솟는군.”
“참으십시오.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황태자의 심복입니다.”
“그래, 그걸 믿고 크나우프 대공가의 결투에 똥물을 끼얹은 거지. 크나우프 대공가의 결투에 저격이라니……. 한 십 년 정도 대귀족들의 안줏감이 되어 주겠지?”
“십 년이 아니라 적어도 한 세대(30년)는 갈 겁니다.”
“그래, 크나우프 대공가를 한순간에 안줏감으로 만들어 버리다니 가공할 능력이야. 콜드월 백작가가 크나우프 대공가에 원한이 있었나?”
“케이사 백작의 선친이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과의 결투에서 오른팔을 잃었으니 그것도 원한이라면 원한이겠지요.”
“몰랐네. 아버지에게 패한 기사가 한둘이라야 말이지.”
“같은 이유로 제국 대귀족들의 절반이 크나우프 대공가라면 치를 떨지 않습니까.”
“여하튼 케이사 백작에게 한 방 제대로 맞았어. 왜 그런 짓을 했냐고 추궁하면, 크나우프 대공가의 체면과 제국의 안위를 위해서 그랬다고 할 테지?”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겁니다.”
“제대로 당했군. 이 치욕을 씻으려면 북부 귀족들을 내 손으로 처리해야 할 테고?”
“케이사 백작이 바라는 게 그걸 겁니다.”
“제국의 안위는 어쩌고? 나까지 패하면 북부 왕국들이 벌 떼처럼 들고일어날 텐데?”
“황태자가 원래 철이 없잖습니까. 최근 만나는 대귀족들에게 제국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고 떠벌린답니다.”
“제국의 영광? 왕국의 땅을 빼앗자는 건가?”
“황태자 말로는 전쟁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대륙은 통일되어야 한답니다.”
“돌았군. 어차피 자기는 그 전쟁의 선봉에 서지도 않을 거면서.”
“그 돈 사람이 황태잡니다.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시면 차기 황제 폐하가 되실 몸이니, 표현에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황태자가 진정으로 바라는 게 뭘까? 피에스트라에 있는 북부 귀족들의 죽음일까? 아니면 크나우프 대공가의 패배일까?”
“어느 쪽이라도 황태자가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대단한 사람이야. 황태자는.”
“천재로 불리는 분이잖습니까.”
“저격은 황태자가 벌인 난장판에 나를 던져 넣기 위한 것이겠지?
“아마도 그럴 겁니다.”
“경은 내가 ‘황태자가 하사한 독이 든 성배’를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나?”
“마시지 않을 거잖습니까.”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크나우프 대공가가 얻는 것에 비해 잃을 게 너무 많으니까요.”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뭡니까?”
“황태자가 벌인 체스판의 말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런 이유로 이번 일은 묻는다.”
“황태자 측에서 온갖 말을 지어내 압박할 수도 있습니다.”
“하라고 해. 수틀리면 결투를 걸어 조져 버릴 테니까.”
“그러다 황태자와 척을 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 봐야 아쉬운 건 황태자 쪽이지 내가 아니야. 왕국의 소드마스터들을 상대할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다고.”
그 말에는 데이먼 아이작 백작도 반박하지 않았다.
황태자가 전쟁을 원하는 만큼 크나우프 대공의 도움이 절실한 것도 사실인 까닭이다.
***
로렌 공국.
피에스트라.
마의 해역.
마력 범선이 마의 해역을 항해한 지도 어언 팔 일째.
하는 일 없이 잔잔한 바다를 오락가락하는 것도 고역이지만 선원들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들을 고용한 북부 귀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방향타를 잡고 있던 알트헬름 선장이 딜로스에게 물었다.
“항해를 한 지 며칠이나 됐지?”
“팔 일 됐습니다. 마의 해역에 들어온 지는 칠 일 됐고요.”
“시간이 빨리 가네. 벌써 내일이면 회항이라니.”
“선장님은 빠르십니까? 선원들은 지루해서 죽겠다고 난리입니다.”
“폭풍우를 겪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배가 어지간히 부른가 보군.”
“폭풍우 말이 나와서 말씀인데, 선장님?”
“왜?”
“계속 북부 귀족들과 마의 해역에 나오실 겁니까?”
“안 나오면?”
“돈도 좋지만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솔직히 지난번에도 운이 좋아서 배가 안 넘어갔지, 전복되고도 남을 상황이었잖습니까?”
“위험하기는 했지.”
“운 좋은 것도 한두 번이지, 다음에도 안 뒤집힐 거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없지.”
“그런데 계속 마의 해역을 다니시게요?”
“북부 귀족들 덕분에 꼬박꼬박 마누라에게 돈을 가져다주고 있잖나.”
“돈도 좋지만 그러다 배가 뒤집히면요?”
“죽기밖에 더해?”
“그래도 괜찮냐 이 말입니다.”
“딜로스.”
건들건들하던 알트헬름 선장의 음성이 갑자기 착 가라앉았다.
그 서슬에 딜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예?”
“돈을 벌어다 주지 않으면, 마누라가 집에 남아 있을 것 같나?”
“나가겠죠?”
“그래, 그런 거야. 이번에 돛을 수리하는 데 얼마나 많은 기술자들이 몰려왔는지 봤잖나. 다들 먹고사는 데 절박하다고. 북부 귀족이 아니면 우리도 그들처럼 일거리를 찾아다녀야 할 거야.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 마누라는 집을 나가겠지. 그렇게 되기를 바라나?”
“그건 아니지만 너무 위험해서…….”
“위험해서 뭐? 다른 손님을 찾자고? 있으면 나도 북부 귀족들과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았어. 마누라가 집을 나가는 것과 마의 해역 중에 어느 것이 더 무섭나?”
“마누라가 집 나가는 거요.”
“크크큿!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해?”
“그러게요. 내가 왜 그런 소리를 했을까요?”
딜로스가 뻘쭘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이자 선장이 한마디 했다.
“잡생각이 나면 뱃전에서 낚시라도 하게. 반찬거리도 떨어져 가는데 뭐라도 좀 낚아 보라고.”
“북부 귀족들 눈치가 보여서요.”
“저녁 반찬거리 잡아도 되겠냐고 슬쩍 물어보면 허락할 걸세. 그것도 못 하게 할 정도로 꽉 막힌 귀족들은 아닌 것 같으니까.”
“예, 밑져야 본전이니 물어나 보겠습니다.”
딜로스가 조타실을 빠져나가자 알트헬름 선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신도 지난번의 폭풍우로 마의 해역에 있는 게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알트헬름 선장의 말처럼 북부 귀족들은 낚시를 반대하지 않았다.
딜로스와 몇몇 선원이 낚싯대를 들고 뱃전으로 이동했다.
석양에 물든 바다를 보던 파비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번 항해도 허탕이네요. 사람들이 마의 해역을 미신이라고 생각할 만도 합니다.”
“맞아.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니까.”
엘리오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이전처럼 뜬구름 잡는 기분은 안 들어서 좋네요. 오마르 백작님, 어두워지기 전에 대련 한판 어떻습니까?”
파비안의 말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의 경우 몸을 쓰지 않으면 검술 실력이 퇴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갑판 중앙에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이 마주 섰다.
이윽고 파비안이 롱소드를 치켜들고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돌진했다.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차차차차차창―!
구경하는 사람의 손에 땀이 찰 정도로 둘의 검격은 날카로웠다.
한차례 화끈한 접전 이후 파비안이 후다닥 거리를 벌렸다.
마나를 끌어 올렸는지 그의 롱소드에서 빛이 났다.
뒤이어 허공에 반투명한 파란 드래곤의 형상이 어른거렸다.
드래곤 플라이[飛龍昇天]를 펼친 것이다.
흥미로운 눈으로 파란 드래곤을 보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롱소드를 휘둘렀다.
파츠츠츠―.
파란 드래곤이 롱소드를 휘감고 조금 버티는가 싶더니 이내 스르륵 사라졌다.
기력을 쥐어짠 듯 파비안이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더 이상은 못 하겠습니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파비안을 보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말했다.
“자네의 드래곤 플라이는……. 여느 소드 비기너와 다르네. 알고 있나?”
“다릅니까?”
파비안이 의아한 눈으로 되물었다.
소드 비기너가 된 이후 다른 기사들과 검을 섞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드래곤 플라이에 깃든 힘은 소드 비기너의 마나 포스를 뛰어넘네. 하지만 소드 익스퍼트들의 마나 오라에는 미치지 못하지. 단지 질적으로 마나 포스와 궤를 달리한다는 말이네. 마나 포스와 마나 오라의 중간쯤이라고 할까. 단언컨대 소드 비기너 중에 자네의 드래곤 플라이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걸세.”
“제가 소드 비기너 중에 최강자라는 말씀이십니까?”
파비안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런 뜻은 아니네. 검술로 자네보다 뛰어난 사람은 많이 있을 걸세. 하지만 그들이라도 자네의 드래곤 플라이를 깨뜨릴 수는 없을 게야. 자네의 드래곤 플라이에는, 뭐랄까. 초자연적인 의지가 담겨 있는 것 같았거든. 이해할 수 없지만, 진짜 드래곤의 의지라고나 할까.”
백작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파비안이 고개를 갸웃할 때, 엘리오가 말했다.
“백작님은 안목이 뛰어나시네요. 그것을 검술의 의지[劍意]라고 합니다. 창시자가 검술 속에 드래곤의 움직임을 담았는데, 파비안이 외형뿐 아니라 마음마저 체득한 모양입니다. 소 뒷걸음에 쥐를 잡은 격으로 보입니다만.”
순간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검술의 형식 그 너머에 있는 의지라니…….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겁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부러운 눈으로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을 보았다.
작은 하늘 회로(small heavenly circuit, 小周天)에 드래곤 플라이의 검술까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뒤를 이어 진정한 그랜드 마스터가 될 기사는, 어쩌면 저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인지도 몰랐다.
평생 검술을 수련하던 그였지만 ‘검술의 의지’는 미지의 세상이었다.
“라고아 경, 세상의 모든 검술에 검술의 의지가 있습니까?”
“글쎄요. 그건 검술 창시자의 경지에 달린 문제 같습니다. 누구나 쉽게 검술에 의지를 담을 수 있다면, 백작님이 놀랄 일도 없었을 겁니다.”
“제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군요.”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왕국의 검술에도 등급이 있다.
하지만 최상급이라고 알려진 검술도 드래곤 플라이와는 달랐다.
그런데 ‘모든 검술에 검술의 의지가 있냐?’고 묻다니.
‘검술의 의지’라는 말에 놀라서 바보 같은 질문을 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