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51
1251회. 치안대에 넘기는 게 가장 좋습니다
귀찮아진 엘리오가 말을 돌렸지만 파비안은 그걸 그냥 넘기지 않았다.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이가 운명 운운하니 가슴이 뜨끔해서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안 바꾸기를 잘한 것 같다니요?”
“용병들 말야. 오늘 일을 저지를 것 같아.”
“오늘요? 우리가 뭘 가졌다고요?”
파비안이 황당한 얼굴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무슨 대단한 보물을 가진 것도 아닌데 동행 중인 모험가를 노리다니?
“돈도 돈이지만, 크레아 씨가 목적인 것 같아.”
“아…….”
파비안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거라면 말이 된다.
확실히 크레아는 용병들이 욕심을 낼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독이나 수면제를 쓸 모양이니까 조심해.”
“독은 아닐 겁니다.”
“왜?”
그러자 파비안이 가드들을 힐끔 보며 말했다.
“가드들은 뭘 먹기 전에 항상 독성 검사를 하거든요. 심지어 운송 책임자는 따로 은제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고 다닙니다. 독을 썼다가는 바로 들통이 날 겁니다.”
“수면제는 안 걸려?”
“예, 수면제를 검출하는 장비는 아직 없습니다.”
“그거네. 막을 방법은 없는 거고?”
“철저하게 감시하다가 음식에 수작 부리는 순간 잡으면 됩니다. 번거롭지만 현장에서 붙잡아 치안대에 넘기는 게 가장 좋습니다.”
“사지를 자르거나 죽이지 않고, 치안대에 넘긴다고?”
“정당방위를 넘어선 사적 제재는 불법입니다. 귀족가에서 손을 쓸 때 은밀하게 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대귀족들은 매사에 제멋대로 하던데 범죄자 하나 마음대로 처리 못 해?”
“제멋대로 하던 대귀족도 권력을 잃으면 치안대로 불려 갑니다. 세상이 엉망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법망은 살아 있습니다. 어딘가에 라고아 경의 뒤를 캐는 자들도 있을 겁니다. 이만한 일로 그들에게 공격당할 빌미를 내주면 안 됩니다.”
“복잡하네.”
엘리오는 상계의 법체계에 혀를 내둘렀다.
물론 강호도 법은 있다.
하지만 ‘우물물은 강물을 침범하지 않는다’라는 불문율에 따라 능력껏 살아간다.
힘이 있으면 법 위에 서고, 힘이 없으면 법 아래 밟힌다.
그런데 이곳은 누구도 ―심지어 귀족들조차―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이다.
“물론 라고아 경은 고향으로 돌아가면 되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 채무를 라고아 경의 후계자인 제가 고스란히 떠안게 될 수도 있으니, 가급적 법을 준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네가 내 후계자라고?”
“아닙니까?”
파비안이 뻔뻔한 얼굴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이미 대영주라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영지에 신경 쓰지 않을 게다. 그렇다면 남은 건 자신밖에 없었다.
게다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은 자신에게 영지의 관리를 위임하기까지 했다.
물론 실효성 없는 말이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맡겼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참에 파비안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후계자로 자리를 굳힐 생각이었다.
그런데 녹림에서 잔뼈가 굵은 엘리오는 자기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도둑놈 심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데, 심지어 엘리오는 도둑들의 중심축이기도 했다.
“그건 아니지.”
“예? 아니라고요?”
“그래, 나처럼 창창한 나이에 무슨 후계자냐? 그건 선 넘은 거야.”
“하지만 라고아 경은 고향으로…….”
“가야 가는 거지.”
“조만간 가실 거잖습니까?”
“내일 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벌써부터 후계를 생각해. 그럼 안 돼.”
“아, 제가 좀 빨랐나요?”
파비안이 실망한 얼굴로 입을 삐죽였다.
어차피 자신 외에 달리 사람이 없는데 왜 저렇게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지 모르겠다.
감정에 휩싸이면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가 뒤죽박죽 되고 만다.
후계자 문제로 심력을 소모한 엘리오와 파비안은 용병들에 대한 대비를 잊었다.
엘리오가 수면제를 떠올린 것은 식사 후에 나온 술병을 보고서다.
“파비안, 용병들 잘 지켜봤냐?”
“아…….”
파비안은 답하지 못하고 슬며시 시선을 회피했다.
“깜빡했냐?”
“……예.”
“깜빡할 게 따로 있지 그런 걸 깜빡하냐?”
“죄송합니다.”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먹은 거에 수면제를 탔을 수도 있다는 거네?”
“그건 아닐 겁니다. 식사는 라고아 경이 말씀하실 때 이미 있었으니까요. 지금 나온 술과 안주만 조심하면 됩니다.”
“물은?”
엘리오가 물병을 가리켰다.
물을 식사 중에 두 번이나 새로 내왔기 때문이다.
“물도…… 조심해야 합니다.”
“야! 우리가 두 병이나 마셨다고. 오마르 경, 괜찮은 것 같아요?”
“조금 피곤한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은 괜찮습니다.”
수면제라는 말을 들어서인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단언하지 않았다.
피로를 느끼는 게 진짜 피곤해서인지 수면제의 효과 때문인지 알 수 없어서다.
“라고아 경은 어떻습니까?”
“하암! 피곤하지는 않은데 조금 졸리네요. 이건 약 기운일까요? 진짜 졸려서 그러는 걸까요?”
그러자 파비안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라고아 경은 이맘때면 늘 그런 소리를 했습니다.”
“아, 그래?”
잡담을 나누던 엘리오 일행은 술병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여행 중에 해가 지면 침상에서 뒹굴거리는 게 일이다.
엘리오 일행도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침상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던 엘리오는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에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와아! 진짜 시끄러워서 못 자겠네. 파비안, 너는 저 소리를 듣고도 잠이 오냐?”
“…….”
그러나 파비안은 잠이 들었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오는 파비안의 고른 숨소리를 확인하자 다시 길게 드러누웠다.
“비 우라지게 퍼붓네.”
강호에서도 폭우를 경험한 적이 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세상이 떠내려 갈 것 같았다.
빗소리가 어찌나 큰지 다른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까무룩 선잠이 들었던 엘리오는 천둥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파비안? 오마르 경?”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파비안이야 그렇다 쳐도 소드마스터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다니?
이건 정상이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한 엘리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하워드 솔론 남작 일행의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다.
잠시 생각하다 강제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간 엘리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역시나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몰래 떠나기라도 한 것처럼 개인 짐도 보이지 않았다.
“대단한 놈들이군.”
사전에 알고 주의를 기울였는데도 막지 못했다.
변명하자면 빗소리가 너무 컸다.
잠도 들었지만, 설사 깨어 있었다 해도 알아차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알고도 당할 정도의 노련함은 하루 이틀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동안 그들이 얼마나 많은 여행자들을 죽였을지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치안대는 무슨.”
엘리오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퍽 하고 사라졌다.
***
크룰리 외곽.
폭우 속을 내달리던 아홉 명의 사내들이 낡은 폐가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폐가로 들어간 직후 근처에 ‘꽝!’ 하고 번개가 떨어졌다.
이윽고 폐가 마당에 두 남자가 나란히 놓여졌다.
하워드 솔론 남작과 타인록이다.
루이 카스트가 어깨에 메고 있던 여자를 마루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크레아를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시는 그에게 앵거스 단장이 말했다.
“어이, 어이! 아무리 욕정에 눈이 멀었다 해도 내가 단장이라는 걸 잊으면 곤란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장님을 위해 벗겨 놓아야 하나 생각하던 참입니다.”
“그 좋은 재미를 너만 보겠다고? 그럼 안 되지.”
“단장님 뒤에 제가 있으니 너무 심하게만 다루지 말아 주십쇼.”
앵거스 단장은 변태 성욕자로 흥분할수록 폭력적으로 변했다.
색정광 루이는 그걸 지적한 것이었다.
“내가 팔아먹을 상품에 손대는 것 봤느냐? 쓸데없는 걱정 말고 모험가들이나 깊이 묻어라. 평생을 숨어 다니지 않으려면.”
“언제 실수한 적 있습니까. 맡겨만 주십쇼.”
시원하게 대답하고도 루이 카스트는 미련이 남는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보다 못한 앵거스 단장이 격하게 손짓하자 그는 어기적거리며 마당으로 내려갔다.
어찌나 약에 취했는지 빗방울이 얼굴을 때리는 데도 하워드 솔론 남작과 타인록은 깨어나지 않았다.
“새끼들, 잘도 처자네. 그래 깨어나지 마라.”
깨어나서 고통 속에 발버둥 치느니 잠든 채로 죽는 게 더 나을 터였다.
루이 카스트는 먼저 수하들에게 땅을 파라고 지시했다.
핏자국까지 싹 없애려면 구덩이 안에서 죽여야 했기 때문이다.
용병들이 마당 한쪽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구덩이 깊이를 확인하던 루이 카스트는 힐끔 마루 쪽을 쳐다보았다.
상품에 손 안 댄다던 말과 달리 흥분한 단장이 여자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씨벌, 저러다 또 죽이겠네.”
단장의 행동에 어깃장이 난 그는 돌 하나를 집어 마루로 던졌다.
딱―!
기둥에 맞은 돌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튕겨 났다.
크레아의 목을 조르던 앵거스 단장이 흠칫 놀라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루이 카스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앵거스 단장이 다시 크레아에게 집중하려 할 때, 새카만 하늘에서 마당으로 누군가 떨어져 내렸다.
꽈르르릉! 꽈광―!
뇌성 벽력과 함께 엘리오의 얼굴이 드러났다.
극도로 분노한 엘리오의 눈은 마치 마족처럼 붉었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루이 카스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이런,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사도가 오면 안 되는 곳에 왔네. 너를 떠받드는 사제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죽어 줘야겠다.”
루이 카스트가 모험가에게 다가가며 천천히 롱소드를 뽑아 들었다.
그의 롱소드가 검집에서 막 빠져나왔을 때, 한 줄기 섬광이 번득였다.
뒤이어 롱소드를 든 루이 카스트의 팔이 지면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으아아! 내 팔! 내 팔!”
루이 카스트의 비명에 앵거스 단장은 하던 짓을 멈추고 크레아의 몸에서 내려왔다.
엘리오의 롱소드가 다시 한차례 춤을 췄다.
투두둑―!
눈 깜짝할 사이에 루이 카스트의 몸통에서 사지가 잘려 나갔다.
“아악! 아악! 아아악―!”
루이 카스트는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빽빽 질러 댔다.
땅을 파던 용병들이 삽 대신 롱소드를 들고 모험가에게 달려들었다.
번쩍! 번쩍―!
용병들의 팔과 다리가 한꺼번에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떨어져 내렸다.
사지가 잘린 용병들의 입에서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용병의 사지가 잘리자 앵거스 단장이 덜덜 떨며 말했다.
“워, 원하는 것을 모두 주겠다. 이 여자도 네가 가져라.”
엘리오는 대답 대신 그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모험가가 다가오자 앵거스 단장은 단검을 뽑아 크레아의 목에 대고 소리쳤다.
“멈춰! 더 가까이 오면 여자를 죽이겠다! 여자를 살리고 싶으면 물러나!”
그의 외침에 엘리오가 멈춰 섰다.
자신의 협박이 통했다고 생각한 앵거스 단장은 한 가지를 더 요구했다.
“칼을 버려!”
엘리오는 일체의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롱소드를 마당에 던졌다.
‘철퍽!’ 하고 롱소드가 물웅덩이에 떨어진 순간, 앵거스 단장은 모험가를 잡아 두기 위해 여자의 목을 한차례 찌르고 달아났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그는 폐가의 담장을 넘어가지도 못했다.
물웅덩이에 있던 롱소드가 저 홀로 날아올라 앵거스 단장의 등을 꿰뚫은 것이다.
잠시 후 엘리오는 피투성이가 된 크레아를 안고 도시 중심부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