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03
1303회. 너는 정말 한결같은 놈이구나?
부탑주 카르앤 돌로레스는 우선 북부의 기사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소문보다 더 위험한 존재임을 탑주에게 알리기로 했다.
물론 찰스 맨슨에게 들었다는 말은 하지 않을 작정이다.
“탑주님. 엘리오 라고아 백작은 마족 군주들을 물리친 기사예요. 전투 경험이 많은 건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서 황태자의 제안을 거절해야 한다는 거냐?”
“아뇨. 그랬다가는 그렇지 않아도 좁은 황실 마법사들의 입지가 더 줄어들 거예요. 어쩌면 타불라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자리를 내어 줄지도 몰라요. 지금의 황태자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예요.”
전투 마법사들의 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파라바하드 마탑 탑주에게 ‘총사보다 공을 세우라’고 할 정도면 말 다했다.
누가 봐도 황태자의 마음은 타불라 마탑으로 기울어 있었다.
타불라 마탑이 최고급 마력총과 엑시티움의 개발자니 그럴 수밖에 없다.
탑주 레그 데이비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실 마법사보다 총사를 더 높이 사는 사람이니 놀랄 일도 아니지.”
“전투 마법사가 총사보다 더 뛰어나다는 걸 보여 줘야 해요.”
“허어! 어쩌다 마법사의 위치가 이 지경이 됐는지 원.”
레그 데이비스는 못마땅한 얼굴로 탄식했다.
오랜 세월 당연시되던 걸 새삼 증명하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황태자의 제안을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어요. 엘리오 라고아 백작은 보통 기사가 아니라 크나우프 대공급의 능력을 가진 기사니까요.”
“마력총과 엑시티움으로도 부족하다는 거냐?”
“크나우프 대공을 총병과 마법사 들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냥 총병이 아니라 엑시티움을 쓰는 총병이다만.”
“소드마스터의 상대는 소드마스터밖에 없다고 하죠? 그랜드 마스터는 그보다 더할 거예요. 탑주님은 과거 제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신 하네스 대공이 어땠는지 아시잖아요.”
“그때는 엑시티움이 없었잖느냐.”
“애초에 엑시티움은 소드마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개발된 물건이고요. 저는 엑시티움으로 그랜드 마스터를 일격에 죽일 수 없을 거라 생각해요. 그랜드 마스터가 반격하면 총병과 마법사 들은 순식간에 고깃덩어리가 되고 말 거예요.”
“후후. 너는 그랜드 마스터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구나. 하네스 대공의 업적이 대단하지만 그중에는 과장된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저도 역사의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아요. 다만 제 말은 그랜드 마스터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야 당연하지. 하지만 아무리 이쪽에서 기습적으로 공격한다 해도 그랜드 마스터의 반격 그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소드마스터는 소드마스터로 막는다고 하잖아요. 그건 그랜드 마스터에게도 통용되는 말일 거예요.”
카르앤 돌로레스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탑주를 보았다.
“이 일에 크나우프 대공을 끌어들이자는 말이냐?”
“크나우프 대공가도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받을 빚이 있잖아요. 총병과 마법사가 일격을 가한 후에 크나우프 대공이 마무리를 짓게 하는 거죠. 그랜드 마스터의 반격을 그랜드 마스터에게 맡긴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만 크나우프 대공이 우리 뜻대로 움직여 주겠느냐?”
“엑시티움 때문에 자리가 위태로워진 건 우리 전투 마법사들만이 아니에요. 오히려 기사들이 더 위기를 느낄걸요? 게다가 크나우프 대공가는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받아 내야 할 빚이 있잖아요. 어차피 북부로 전선이 확대되면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상대는 크나우프 대공이에요. 크나우프 대공이 바보가 아니라면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 안전하게 맞수를 처리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그랜드 마스터의 존재감을 드높이는 것은 덤이고요.”
부탑주의 말에 공감한 레그 데이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크나우프 대공에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뭐든 확실한 게 좋겠지. 내가 크나우프 대공과 의논해 보마.”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이 얻게 될 이익을 확실하게 부각시켜 주세요. ‘그랜드 마스터를 꺾은 그랜드 마스터’라는 명성과 동생의 복수.”
그건 그의 선친인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에게 붙은 ‘소드마스터를 꺾은 소드마스터’라는 별칭을 의식해서 한 말이었다.
레그 데이비스도 바로 알아듣고 한마디 했다.
“그랜드 마스터를 꺾은 그랜드 마스터라…….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은 건 모든 아들의 바람이지.”
탑주인 레그 데이비스와 부탑주 카르앤 돌로레스는 크나우프 대공가에서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믿었다.
아니 어쩌면 총사대까지 지원해 줄지도 모른다는 소박한 상상도 했다.
잠시 후 마법 통신구로 크나우프 대공가와 대화를 마친 탑주 레그 데이비스는 조금 전 돌려보낸 부탑주를 다시 불렀다.
탑주의 표정이 좋지 않자 카르앤 돌로레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크나우프 대공과 말씀을 나눠 보셨나요?”
“그는…… 거절했다.”
예상 밖의 대답에 카르앤 돌로레스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왜요? 대공으로서는 손해 볼 일이 전혀 없는데. 설마 기사도에 어긋나서 싫다고 하던가요?”
“전장에서 마주친다면 모를까? 그를 찾아가 싸움을 걸 마음은 없다고 하더구나.”
“대공의 체면 때문인가요?”
대공이 백작을 찾아간다는 게 체면 상할 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도 전략적으로 그게 옳다는 것쯤은 알 터였다.
“그보다는…… 최근 대공이 거둔 아이가 하나 있는데……. 그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제자라고 한다.”
“허! 두 사람이 같은 제자를 키운다고요?”
“그런 것 같다. 크나우프 대공은 협조할 수 없지만, 황태자가 기획한 일이니 비밀은 지켜 주겠다고 했다. 처음 황태자가 제안한 것으로 가야 할 것 같다.”
“크나우프 대공이 안 된다면……. 마력총과 엑시티움만으로는 안 돼요.”
“자꾸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될 만한 이야기를 해 봐라. 황태자의 제안을 거부하면 파라바하드 마탑은 내리막길로 치닫게 된다는 걸 너도 알잖느냐?”
“제 말은 총병으로 부족하다는 뜻이었어요.”
“그런데 크나우프 대공이 싫다고 하지 않느냐? 싫다는 사람을 무슨 수로 끌어들이라고?”
“오해하셨네요. 제 말은 단지 마력총이 아니라, 제대로 된 총사대를 지원받아야 한다는 뜻이었어요. 일반 총병들로는 그랜드 마스터에게 유의미한 부상을 입히기 어려우니까요. 그랜드 마스터가 반격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일격을 가하려면, 총병대보다는 총사대가 필요해요.”
총병이 일반 병사라면 총사는 마나의 축복을 받은 기사들이다.
당연히 그들이 쏜 마력총의 위력은 총병에 비해 뛰어나다.
마나의 중첩 효과로 생긴 파괴력은 물론, 명중률마저도 높았다.
“황태자에게 총사대를 지원해 달라는 말을 하라고? 총사보다 공을 세우라는 사람에게? 나는 못 한다. 아니, 안 한다.”
탑주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파라바하드 마탑 탑주의 체면은 둘째치고, 자칫 공을 총사에게 빼앗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밀리에 총사대를 지원해 줄 사람이 있어요.”
“총병이 아니라 총사대를?”
레그 데이비스가 놀란 눈으로 부탑주를 보았다.
총사란 마나의 축복을 받은 기사로 절대 흔한 사람들이 아닌 까닭이다.
총사 한둘이면 모를까?
아무리 제도에 인재가 널렸어도 비밀리에 총사대를 만들기는 어려웠다.
“꼭 제도에서 구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생각해 둔 곳이라도 있느냐?”
“포메른부르크 공국요. 그곳의 대영주인 에스쿠도 백작이 북부의 귀족들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잖아요. 그라면 비밀리에 총사대를 지원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에스쿠도 백작가의 장남이 아에토스 백작가 영애를 희롱했다가 영지전까지 벌인 일은 암암리에 제국에 알려져 있었다.
에스쿠도 백작은 엘리오 앞에서 한 마나의 맹세 때문에 입을 꾹 다물었지만, 목격자가 너무 많아 그렇게 된 것이다.
남부 왕국과 전쟁 발발 뒤 북부 기사인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그와 관계된 사건들은 제도의 사교계에서 끊임없이 회자됐다.
그중에서도 ‘크나우프 고슬링 후작의 결투’와 ‘에스쿠도 백작가의 영지전’은 별미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사교계와 거리가 먼 탑주에게 카르앤 돌로레스는 에스쿠도 백작과 북부 기사의 악연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사교계에서 오가는 이야기인지라 단맛과 짠맛이 어우러져, 이야기가 끝날 즈음 탑주는 에스쿠도 백작이 합류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어비스.
미개척 지대 용 머리 산.
정오 무렵, 선두에서 길을 개척하던 파비안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외쳤다.
“라고아 경! 드디어 용머리 산입니다! 기념으로 바위에 우리 이름이라도 새겨 놓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며칠 전 언법의 맹세와 함께 다시 입을 튼 엘리오가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두고두고 허튼짓했다고 욕먹을 일 있냐?”
“모험가로서 세운 기념할 만한 일을 누가 욕한다고요?”
“기념은 마음으로 해. 남한테 강요하지 말고.”
“이름 새기는 게 왜 강욥니까?”
“강요지. 보기 싫어도 봐야 하잖아. 너 가는 곳마다 바위에 이상한 이름이 적혀 있다고 생각해 봐. 기분 좋겠냐?”
“아, 그건 또 그렇네요. 처음 보는 바위에 누군지도 모를 이름이 있다 생각하니 왠지 기분 더러운데요? 마음으로만 하겠습니다.”
용 머리 산에 오른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거대한 암벽에 먼저 도착한 파비안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에이! 쌍놈의 새끼들!”
병풍처럼 멋들어진 암벽에 사람들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워드 솔론 남작과 크레아가 펄펄 뛰는 파비안을 보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뒤늦게 도착한 엘리오는 그 꼴을 보고 ‘쯧쯧!’ 혀를 찼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음각된 이름에 이끼가 가득했다.
용 머리 산까지 온 모험가가 한 손에 꼽는다고 했는데 이름은 열 개가 넘었다.
하기야 돌이켜 보면 케라톱스 외에 별다른 위험 요소가 없는데, 한 손에 꼽을 정도만 여기까지 왔다는 게 말이 되나.
바위에 이름을 새기려 했던 파비안은 좀처럼 분을 삭이지 못했다.
“하! 참! 이렇게 아름다운 바위를 이름으로 더럽히다니! 눈 뜨고 있으니 안 볼 수도 없고, 볼 때마다 역겹네요!”
“뭘 그렇게 화를 내? 다 너 같은 사람들인데.”
“저 같다뇨? 저는 바위에 이름을 새기지 않았습니다.”
“새기려고 했잖아. 저 사람들 옆에는 나 같은 현자가 없었던 거뿐야.”
“하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오늘은 인정하겠습니다. 아, 현자 부분은 제외하고요. 제가 그렇게까지 비겁한 사람은 아니라서요.”
“그러시든지.”
문득 엘리오가 손을 휘저었다.
순간 홀연히 일어난 돌풍이 암벽을 쓸고 지나갔다.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리며 암벽에 가득하던 이름이 지워졌다.
암벽이 깨끗해지자 파비안과 하워드 솔론 남작, 크레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 길을 떠나기 직전 파비안이 지나가듯 말했다.
“라고아 경, 암벽 중앙에 우리 이름을 새기는 건…… 별로겠죠?”
“너는 정말 한결같은 놈이구나?”
“헤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고 라고아 경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어? 주먹 내려놓으십쇼. 농담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파비안이 달아나듯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나 아직 마음을 다 추스르지 못했는지 엘리오는 이전처럼 그를 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