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04
1304회. 손이 저리십니까?
용 머리 산은 파르톤 산이나 페트라 산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그렇게 험준한 산임에도 약초와 비슷해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암석과 어비스 특유의 어딘가 음울한 느낌이 나는 나무뿐이었다.
오죽하면 잠시 쉬어 가는 틈에 하워드 솔론 남작이 ‘이런 곳에 살면 우울증 걸리기 딱 좋겠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석양이 질 무렵, 엘리오 일행은 산 정상에 이르렀다.
엘리오 일행 중 최하가 소드 비기너 상급임을 감안하면 더딘 진행이다.
그 정도로 용 머리 산은 높고 험했다.
정상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크레아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산 넘어 산이네요!”
하워드 솔론 남작이 말을 받았다.
“산 정도가 아니라 산 밭이다, 산 밭. 한번 들어가면 방향을 잃겠는데? 사람들이 용 머리 산까지만 거론한 이유를 알겠다. 저 산을 보고 무서워서 어디 내려가겠냐.”
“그러네.”
파비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산 정상에 오르는 동안 꽤 많은 마물을 만났다.
그런데 용 머리 산은 숱하게 많은 산의 초입에 불과했다.
아무리 방향감각이 좋은 사람이라도 들어가는 즉시 방향을 잃고 말 터였다.
젊은 모험가들이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 엘리오는 묵묵히 마하담에서 천막과 침구류를 꺼내 놓았다.
그제야 파비안, 하워드 솔론 남작, 크레아가 달라붙어 쉴 곳을 만들기 시작했다.
천막 설치가 끝나자 파비안은 한쪽 구석에 퍼질러 앉았다.
하워드 솔론 남작과 크레아가 약속이나 한 듯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파비안이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아! 왜 잡일은 이렇게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 칼을 천 번쯤 휘두른 것 같아.”
그냥 하는 말을 하워드 솔론 남작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안 쓰던 근육을 사용해서 그런 걸 겁니다.”
“너도 피곤하냐?”
“저는 별로요.”
“그럼 안 쓰던 근육 때문이 아니겠네. 너도 피곤해야 말이 되잖아.”
“그렇네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듣던 크레아가 웃으며 말했다.
“원래 잡일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어요. 보기에는 간단해도 총체적으로 신경 쓸 게 많잖아요.”
파비안과 하워드 솔론 남작이 새로운 걸 깨우쳤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들이 생각해도 그게 가장 그럴싸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잡일이라는 공통의 화제를 두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들이 잡담을 나눌 때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바위에 홀로 앉아 있는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다가갔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저 너머에 바다가 있는 걸까요?”
“예?”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반문하자 엘리오는 노을 진 하늘을 가리켰다.
백작의 시선이 그의 손끝을 따라갔다.
검게 타들어 가는 구름 사이로 하늘고래와 부유 해파리들이 보였다.
“그러게요. 이곳에서 하늘고래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설마 태풍에 여기까지 떠밀려 온 걸까요?”
“움직이는 방향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태풍에 떠밀려 온 것이면 평원 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저 하늘고래는 산들 위를 한가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건 또 그렇네요. 하기야 하늘고래가 꼭 바다 위에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겠죠? 어차피 다 같은 하늘인데.”
“맞는 말씀이십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비스에 처음 들어왔을 때야 경험자들이 그렇다니 그런가 보다 했지만, 어느덧 두 달째에 접어든 이제는 다르다.
용 머리 산 너머에서 하늘고래가 유영하는 걸 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이제부터는 전해 들은 게 아니라 본 것을 토대로 판단해야 한다.
바다로 황급히 돌아가지 않는 저 하늘고래부터 말이다.
그런 두 사람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고래가 갑자기 바쁘게 움직였다.
그걸 본 엘리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에? 급하게 가는데요? 우리가 잘못 봤던 걸까요?”
“험, 조금 더 지켜보시지요.”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말과 동시에 잿빛 구름 속에서 거대한 와이번들이 튀어나왔다.
지상의 와이번들보다 족히 두 배는 큰 몸집이었다.
숫자가 무려 다섯.
와이번들이 나타나자 하늘고래는 잿빛 구름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부유 해파리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와이번들은 부유 해파리에는 관심이 없는 듯 이내 잿빛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자이언트 와이번 때문에 그랬던 거군요.”
“그러게요. 뒤늦게 정신 차리고 바다를 찾아가는 줄 알았더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문득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말했다.
“며칠 전 본의 아니게 파비안 경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엘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드마스터의 뛰어난 오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는 라고아 경의 뜻을 지지합니다.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순간 엘리오가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유 기사인 파비안과 달리 오마르 백작은 대귀족이자 영주로 마탑과 척지는 순간 엄청난 불이익을 보게 된다.
마탑의 경우 연대 의식이 뛰어나 자칫 모든 마탑과 싸우게 될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한 엘리오가 백작을 만류했다.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오마르 경은 영지를 생각하셔야죠.”
“북부의 영지는 생각보다 마탑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마력총의 거래에서 순위가 뒤로 밀릴 뿐입니다.”
엘리오는 마력총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극구 그를 말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탑 정도는 한 입 거리도 안 된다니까요.”
“여하튼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것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사양하지 못하게 아예 뒷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다음 날.
엘리오 일행은 드디어 용 머리 산을 넘어갔다.
산 너머에 서식하는 마물은 훨씬 더 많았다.
마치 북부의 타메이온을 보는 것 같았다.
타메이온을 경험한 엘리오와 파비안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마물이 발끝에 치일 정도라 크레아의 경우 용병 출신임에도 치를 떨었다.
뒤에 물러나 있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소드마스터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하산길은 쉽지 않았다.
한바탕 마물들과 격돌한 엘리오 일행은 잠시 멈춰 숨을 돌렸다.
파비안이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와아! 산 하나를 넘는데 얼마나 싸운 거야? 산밑에 도달하면 소드 익스퍼트에 오르겠는데?”
“부럽습니다, 형님. 저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부러우면 앞장서 봐. 마물이 얼마나 많은지 한 걸음 내딛기가 무섭다.”
그러자 하워드 솔론 남작이 크레아를 힐끔 보았다.
크레아가 고개를 젓자, 하워드 솔론 남작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크레아가 안 된답니다.”
“그래? 크레아 님이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 남작 나부랭이가 무슨 힘이 있다고.”
파비안의 놀림에 크레아는 듣지 못한 척 딴청을 피웠다.
그때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끼어들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자네와 함께 가도록 하지.”
“오마르 경께서요?”
파비안이 움찔 놀란 얼굴을 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진지하고 근엄해서 살짝 부담이 갔던 것이다.
“왜? 싫은가?”
“싫다니요? 그럴 리가요? 영광이면 모를까, 싫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그렇게 하세. 하워드 경과 크레아 씨는 우리 뒤를 바싹 붙어 따라오고. 라고아 경은 후미를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아예 이참에 진형을 전술 대형으로 바꿔 버렸다. 대책 없이 움직이기에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엘리오 일행은 다시 산을 내려갔다.
백작이 전면에 나서면서부터 이동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어지간한 마물은 소드마스터가 내뿜는 날카로운 기운에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백작의 기운은 상급 마물까지 막아 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상급 마물이 더 미쳐 날뛰었다.
소드마스터가 작정하고 발산한 기운이 상급 마물의 공격 본능을 자극한 때문이다.
산을 내려갈수록 더 많은 상급 마물들이 선두를 덮쳤다.
깨끗하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갬비슨(누비 갑옷)이 마물의 피에 절었다.
그건 파비안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이 선에서 움직인다 해도 결국 싸움에 뛰어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엘리오의 갬비슨만 말끔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다.
엘리오의 갬비슨은 얼마 전 엑시티움에 맞아 그가 흘린 피로 얼룩져 있었으니까.
여하튼 그는 시시때때로 반토막 난 롱소드를 던져 위기에 빠진 일행을 구해 주었다.
하지만 주로 이기어검을 쓰니 마물들의 피가 그의 몸에 튀지 않았다.
잠시 쉬어 갈 때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부러운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자신도 그처럼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싶은데 그러려면 저 ‘플라잉 소드(이기어검)’부터 마스터해야 했다.
그는 중단한 플라잉 소드 연습을 다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편 무심한 눈으로 건너편 산을 응시하던 엘리오는 문득 반토막 난 롱소드를 뽑았다.
무기가 길수록 유리한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마물이 강해질수록 엑시티움에 맞아 반토막 난 검을 쓰는 게 불편했다.
‘어쩐다.’
이제 와 롱소드를 구하러 엑소도로 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공간 이동술인 구룡번신(九龍翻身)은 막혔고, 운종술은 길눈이 어두워 여러 시간 헤매게 될 것 같아서다.
이럴 때는 파괴된 천둔검이 아쉽기만 하다.
답답한 마음으로 반토막 난 롱소드를 보던 엘리오의 뇌리로 무엇인가 스치고 지나갔다.
‘가만 천둔검은 여동빈 선인이 만든 법기잖아.’
자신도 이미 오래전에 여동빈 선인과 같은 득물(得物)의 경지에 올랐다.
그건 천둔검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잠시 천둔검의 요결을 떠올렸다.
―마음을 비우고, 무엇을 어떻게 해 보려고 하지 말라, 순수한 생각[想]은 그 자체로서 위로 날아올라 간다. 무에서 유가 생겨나듯 허공에서 물건을 취할 것이다[置心一虛 無事不辨 純想卽飛 無中生有 虛空得物].
‘무중생유란 말이지.’
그것이야말로 ‘득물’의 시작이자 끝이라 할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무중생유’를 읊조리던 그가 허공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간절한 바람과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그 짓을 반복하자 멀찍이서 보던 파비안이 슬금슬금 다가갔다.
“라고아 경, 손이 저리십니까?”
“중요한 순간이니까 가라.”
“아, 예. 자꾸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시니 걱정이 돼서 그랬습니다.”
“좀 가라고!”
엘리오가 버럭 화를 내자 파비안은 뻘쭘한 얼굴로 물러났다.
엘리오는 다시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동빈의 천둔검은 저 하늘 어딘가에서 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부르면 언제라도 나타났는데, 자신의 ‘무중생유’는 왜 감감무소식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