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13
1313회. 주먹을 쓰면 되더라고
엘리오는 강호를 종횡할 때 입버릇처럼 자신을 ‘착한 사람’이라 말했지만, 실은 선과 악 어디쯤에 걸쳐 있다고 생각했다.
본래 부모를 닮아 착하고 여린 심성을 타고났지만, 어쩌다 녹림 생활을 하면서 그런 애매한 심상이 굳어진 것이다.
그래서일까?
헤카론 대족장이 ‘죄 많은 인간’이라고 할 때 인상을 찡그렸다.
기간타스 전사 쿰은 대족장의 음성에 놀라 미처 엘리오의 얼굴을 살피지 못했다.
“대족장님! 카락 님의 지시로 대족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는 행여나 대족장이 만나 주지 않을까 봐 서둘러 카락의 이름을 앞세웠다.
“올라와라.”
헤카론 대족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쿰은 서둘러 위로 올라갔다.
5분쯤 올라가자 깎은 듯한 암벽과 평지가 나타났다.
병풍처럼 암벽을 뒤에 두른 평지에는 신전이 하나 있는데, 신전 앞에 쿰과 비슷한 덩치의 기간타스 하나가 서 있었다.
기간타스를 본 엘리오의 눈은 이내 신전으로 향했다.
혹시나 저곳에 소문으로만 듣던 우샤스 운드라의 신상이 있나 싶어서다.
물론 이곳이 미개척지 깊은 곳이고, 산을 아스타로이드가 지키고 있는 것으로 봐서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말이다.
황송한 얼굴로 대족장 앞까지 달려간 쿰이 허리가 부러져라 조아렸다.
“대족장님! 저는 쿰이라 합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쿰은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이야기가 끝나자 헤카론의 시선이 젊은 인간 수컷을 향했다.
헤카론과 엘리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인간이 자신을 빤히 보자 헤카온은 조금 불쾌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힘이 마족 군주에 버금가는 인간과 싸워 봐야 자신만 손해인 까닭이다.
자신이 기간타스 종족을 초월했다고 하지만 마족 군주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쯧! 카락은 왜 이런 인간을 내게 보내서는.’
물론 카락도 감당할 수 없으니 보낸 것일 테지만, 지금은 그가 원망스러웠다.
“우샤스 운드라를 왜 찾나?”
“그건 알 거 없고. 우샤스 운드라가 어디 있는지나 알려 줘.”
“비록 그가 박쥐 같은 신이지만, 그래도 샤이틴님의 종복이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그에 대해 말해 줄 수는 없다.”
순간 엘리오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 당신은 우샤스 운드라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보네?”
뒤늦게 헤카론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쓴웃음을 짓던 헤카론이 말했다.
“거듭 말하지만 우샤스 운드라를 찾는 목적부터 밝혀라.”
“죽이려고.”
“…….”
순간 헤카론과 쿰이 황당한 눈으로 인간을 보았다.
샤이탄님의 종복이라고까지 말해 주었는데 죽이려고 찾는다니 그런 것이다.
헤카론이 보란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인간이라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나 보군. 다시 설명해 주지. 우샤스 운드라는…….”
“알아, 알아. 악신의 종복이라며?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그를 찾아 죽일 거야. 그러려고 어비스까지 왔다고.”
“아니, 그대는 샤이틴님의 종복을 죽인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지 못해. 그러니 태연하게 그런 소리를 하는 걸 테지.”
“그게 뭘 의미하는데?”
“샤이틴님의 적이 된다는 뜻이다. 샤이틴님이 그대를 그냥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하나?”
“괜찮아. 악신이 알 때쯤이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엘리오의 말을 헤카론은 ‘함께 죽겠다’는 것으로 잘못 알아들었다.
하기야 우샤스 운드라는 상위의 신.
마족 군주들도 어쩌지 못하는 존재니 함께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것이리라.
“우샤스 운드라를 향한 원한이 그 정도로 깊을 줄은 몰랐군. 그렇다 해도 나는 가르쳐 줄 수 없다. 그러니 돌아가라.”
단호한 헤카론의 말에 엘리오는 문득 질문을 돌렸다.
“당신 뒤에 있는 건 신전인가?”
“그렇다.”
“우샤스 운드라의 신전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아무리 우샤스 운드라가 샤이틴님의 종복이라 해도, 한때 마나 프트라스의 종복이었던 신을 누가 섬긴다고.”
“누구의 신전이야?”
“안타르님을 모신 신전이다.”
“그게 누군데?”
“나와 같이 종족을 초월한 자들에게 등대와도 같은 신이시다. 어쩌면 그대에게도 해당되는지 모르겠군.”
“나는 또 왜?”
“그대도 인간을 초월하지 않았나. 그대의 갈 길도 인도해 주실지 모른다.”
“나는 마족이 아닌데?”
“하지만 마나 프트라스의 추종자도 아니지. 내 말이 틀렸나?”
헤카론이 그윽한 눈으로 인간을 보았다.
마족들에게도 영기 수련자는 마나 프트라스에게서 버림받은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인간족을 초월한― 저 인간이 안타르 신을 섬기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뜻밖의 지적에 엘리오는 멈칫했다.
종족을 초월한 자들에게 등대와 같은 신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그에게 아주 달콤한 소리였다.
‘그런데 나는 카오스(어둠의 에테르)도 없잖아.’
없는 정도가 아니다.
생각 없이 마수의 심장을 먹고 겪은 걸 생각하면 끔찍했다.
‘대족장이라더니 다른 기간타스들과 달리 교활하구나.’
악신 샤이틴에 속한 신이 자신의 길을 인도해 줄 거라니?
그보다는 지금처럼 샤스트라 파라크티(구천현녀)나 마나 프트라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다.
‘우샤스 운드라만 죽이면 강호로 돌아갈 수 있는데 안타르를 따르라고?’
그랬다가 마나 프트라스와 척을 지면 약속도 없던 일이 될 수 있었다.
귀가 얇은 엘리오는 잠깐 흔들렸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 보면 자신은 마나의 축복만 못 받았지 이미 마나 프트라스와 밀접한 관계였다.
당장 이 세계와 강호를 오가는 것도 마나 프트라스가 힘을 써서 그렇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고마운 제안인데, 사양할게.”
“왜냐?”
‘그야 당연히 우샤스 운드라처럼 양쪽을 오락가락했다가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아서지.’
하지만 여기서 마나 프트라스와의 관계를 밝힐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다시 침략자 소리를 듣게 될 터였다.
“그건 알 것 없고. 내가 살면서 배운 게 하나 있거든? 그게 뭔지 알아?”
“…….”
갑자기 인간이 화제를 돌리자 헤카론은 눈만 끔뻑였다.
“말로 안 될 때는 주먹을 쓰면 되더라고.”
그러자 헤카론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설사 나를 죽인다 해도 원하는 답은 얻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야. 물론 마지막까지 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거쳐야 할 단계가 많아.”
헤카론은 거쳐야 할 단계가 궁금했지만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아― 묻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오가 계속해서 말했다.
“우선은 당신이 아끼는 그 신전을 때려 부술 거야. 그다음으로는 기간타스들을 찾아가서…….”
묵묵히 듣던 헤카론이 인간의 말을 끊었다.
“안타르님의 신전을 파괴하면 안타르님은 물론 샤이틴님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상관없어. 나는 오늘만 살아. 내일 일은 난 몰라. 관심도 없어. 어떻게? 박쥐를 지킬 거야? 안타르의 신전을 지킬 거야? 선택해.”
말을 마친 엘리오는 대뜸 마하담에서 ‘공허의 검’을 꺼냈다.
그가 검을 머리 위로 쳐들자, 하늘이 온통 검의 화신(化身)으로 가득 찼다.
헤카론 대족장은 황망한 얼굴로 인간을 보았다.
맑고 선명한 인간의 눈동자를 보니 명치에 뭐가 얹힌 듯 답답했다.
‘완전히 미친놈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죽여 버리고 싶은데, 하늘에 가득한 검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갈팡질팡하던 헤카론이 확인하듯 물었다.
“안타르님의 신전을 파괴하고, 그다음은 기간타스 부족을 죽일 작정이냐?”
엘리오는 가타부타 답하지 않았다.
본래는 기간타스 부족의 거대한 목조 건축물들을 장렬하게 때려 부술 계획이었다.
하지만 평정심 잃은 대족장을 보니 설명해 주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잔인하구나, 인간이여. 기간타스족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들을 죽인단 말이냐.”
“나보고 죄 많은 인간이라며?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한 말 아니었어?”
순간 헤카론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죄 많은 인간’이라는 건 마나 프트라스의 도구가 된 인간을 지칭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마치 자신이 미래를 예견한 것 같았다.
‘아아! 안타르님, 어찌해야 합니까? 저의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안타르에게 물었지만 답은 이미 나온 상태였다.
기간타스의 대족장이 부족을 멸망으로 인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자신이 샤이틴의 저주를 받아 죽더라도 기간타스족만큼은 지켜야 했다.
기다리던 엘리오가 검결지를 까딱이자, 검의 화신들이 떨어져 내렸다.
마지막까지 망설이던 헤카론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그만!”
엘리오가 검결지를 틀자 검의 화신들은 방향을 바꿔 산 너머로 사라졌다.
헤카론을 보던 엘리오가 짐짓 감동한 얼굴로 말했다.
“악신에게 찍힐 걸 각오하고 가르쳐 주겠다는 걸 보니 안타르님에 대한 믿음이 좋은가 봐. ”
“…….”
헤카론은 이를 악물고 인간의 비아냥을 견뎌 냈다.
기간타스족을 보호하기 위한 결단이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저 잔혹한 인간에게 종족이 자신의 약점이라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서다.
“그건 그렇다 치고, 우샤스 운드라는 어디 있는데?”
“켄티우스 분지에 자신의 신전을 짓고 있다. 그곳에 있을 것이다.”
“신전을 짓는다고? 우샤스 운드라가?”
“켄티우스 분지에는 아나킨들이 살고 있다. 그 일에 아나킨들을 동원했다고 들었다.”
아나킨은 기간타스와 서큐버스의 혼혈인지라 기간타스와 가끔 교류를 했다.
기간타스 대족장인 헤카론이 우샤스 운드라의 행보를 알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나킨? 기간타스보다 조금 작은 거인족?”
북부에서 아나킨들과 전쟁을 치렀던 엘리오가 알은체를 했다.
“체구는 기간타스보다 작지만 서큐버스의 능력을 받았다.”
“그래 봐야 하위 마족이잖아.”
“혼혈이 순혈보다 뛰어나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샤스 운드라 같은 박쥐의 명에 따르는 건가?”
“그건 아니다. 설사 상위 마족이라 해도 우샤스 운드라의 능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우샤스 운드라가 기간타스를 원했다면, 그 자리에 기간타스가 있었을 것이다.”
“박쥐지만 강하니까 따른다?”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니다. 샤이틴님이 원하시니 따르는 것이다.”
“거기까지. 나는 마족이 우샤스 운드라의 명에 따르든 말든 관심 없어. 켄티우스 분지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자 헤카론이 쿰을 보았다.
대족장과 눈이 마주치자 쿰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저 빌어먹을 인간과 이제 그만 작별하고 싶은데 켄티우스 분지까지 안내를 해야 하는 분위기인 까닭이다.
“쿰이 안내해 줄 것이다.”
“…….”
쿰은 대족장의 말을 거부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헤카론이 그런 쿰을 보며 당부하듯 말했다.
“가급적 다른 마족들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예.”
이윽고 헤카론은 인간에게 고개를 돌렸다.
“인간이여. 그대도 마찬가지다. 마족들과 시비를 일으키면 우샤스 운드라와 만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런 말은 쿰에게나 해. 나는 오늘만 산다고 했잖아.”
“하아! 쿰, 마족들이 다니지 않는 길로 인도해라. 알겠느냐?”
“……예.”
쿰은 속으로 ‘그런 길이 있습니까?’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자신만큼이나 대족장의 표정이 좋지 않아서다.
잠시 후 대화가 끝나자 쿰은 인간들과 함께 대족장의 면전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