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58
1358회. 다시 만나게 될 일 없을 겁니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정색을 하자 파비안은 쭈뼛쭈뼛 다가갔다.
“너 나가서 무슨 짓 하고 왔어?”
“화장실에 갔다니까요?”
순간 파비안을 보는 엘리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소드마스터만 돼도 개처럼 냄새를 잘 맡는다. 누굴 속이려고 들어?”
“정말 무슨 냄새가 납니까?”
“안 나는데 내가 이러겠냐?”
그제야 파비안이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소피아 남작이 잠깐 보자고 해서 따라 나갔었거든요?”
“그리고?”
“라고아 백작님에게 사귀는 여자가 있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부인이 있다고 했죠. 그랬더니 이번에는 클라우드 남작님도 결혼을 했냐고 묻더라고요?”
“결론만 얘기해.”
“안 했다고 하니까, 그럼 자기랑 사귀는 건 어떻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네가 세라 양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테고.”
“에이, 세라 양 이야기는 하지 마십쇼. 일 년도 넘게 연락이 안 되면, 끝났다고 보는 게 맞지 않습니까?”
“…….”
파비안의 말에도 나름 일리가 있는지라 엘리오는 반박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잠깐 사귀다가 일 년 넘게 떨어진 상태다.
마찬가지로 세라 양이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어도 따지기 어려웠다.
엘리오가 말이 없자 파비안은 그간 못 한 말을 쏟아 냈다.
“솔직히 라고아 경이야 부인이 있으니까 여자를 멀리해도 되지만, 저는 아니지 않습니까? 잠깐 사귀다가 일 년 넘도록 서로 연락이 없으면 끝났다고 봐야죠. 요즘 세상에 꼭 이별을 통보해야 헤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묵묵히 듣던 엘리오가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난 사람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건 괜찮고? 그것도 아침부터?”
“그럼, 미녀가 작정하고 덤벼드는데 어쩝니까? 거절해야 됩니까?”
“이 미친놈아. 그 여자가 누군지 정도는 알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 네가 발정 난 개냐? 처음 만난 여자가 덤빈다고 받아 주게?”
“누군지는 압니다.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입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예, 예. 어쩌다 보니 후다닥 관계를 갖게 됐지만 이야기도 좀 나눴습니다. 알고 보니 사정이 좀 딱하더라고요.”
“너만큼 딱하겠냐. 이 짐승아.”
“너무 뭐라고 하지 말고 제 이야기도 좀 들어 주십쇼.”
“그래, 씨불여 봐.”
엘리오가 질린 얼굴로 파비안을 보았다.
어떻게 방금 처음 만난 여자와 관계를 할 생각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니, 그 전에. 너 세라 양과도 관계를 가졌었냐? 그랬으면 넌 진짜 개놈이다.”
“에이, 저도 염치가 있는 놈입니다. 관계를 가졌으면 제가 연락이 끊겼다고 다른 맘 먹겠습니까? 세라 양과는 딱 입맞춤까지만 갔습니다. 너무 빠르다고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더라고요.”
“그게 정상이지.”
“다 큰 남녀 사이에 정상, 비정상이 어딨습니까? 막말로 관계를 가졌으면 제가 세라 양과 헤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된 건 세라 양의 잘못도 있습니다.”
“아유, 징그러운 새끼. 그래서 오를로바 남작의 뭐가 그렇게 딱한데? 얼마나 딱하길래 처음 만난 여자와 잠자리를 할 생각을 했어?”
“외동딸이라 작위를 승계받았는데 사촌들 욕심이 보통 아니랍니다. 이러다가 암살당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종군을 한 거라네요. ‘마나의 축복’만 받았지 아직 ‘소드 비기너’도 못 됐더라고요. 그래도 운 좋게 참모로 발탁됐다는데……. 여하튼 든든한 뒷배가 없어서 조만간 참모 자리에서도 밀려날 것 같대요. 고작 ‘마나의 축복’만 받은 여기사가 이 전쟁통에 살아남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처음 만난 여기사의 뒷배가 되어 주기로 했다고?”
“저로서는 손해 볼 일이 없잖습니까? 라고아 경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오랫동안 여자를 멀리하기도 했고요. 제가 사제도 아닌데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어젯밤에 티팝(남부의 숙박업소) 주인이 슬쩍 여자를 불러 주겠다는 거 거절하고, 얼마나 후회한 줄 아십니까? 밤새 쥐어뜯어서 허벅지에 멍이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아침에 느닷없이 미녀가 몸을 던져 오는데……. 이거 거절하면 평생 후회하겠다 싶더라고요.”
“너도 너지만, 오를로바 남작도 보통 여자는 아닌 것 같다.”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겁니다. 알고 보면 소피아 남작은 여리고 착한 여자예요.”
“지랄하고 자빠졌네. 여리고 착한 여자가 처음 만난 남자를 덮쳐?”
“덮치다니요? 그럼 제가 당한 것 같잖습니까?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 동의하고 큰일을 치른 겁니다.”
“30분 만에 잘도 그랬겠다. 대화를 한 10분 했냐?”
“…….”
파비안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대화 시간을 늘리면 정력이 약해 보이고, 줄이면 ‘당했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 같아서다.
이도 저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파비안에게 엘리오가 계속해서 말했다.
“네가 페로무로스에서 지내는 동안은 만날 수 있겠지. 그런데 스컬 군단이 이동하면 어쩔 거야? 선봉 부대라고 하던데, 당장 오늘이라도 계속 전진할걸?”
“못 만나면 그러려니 하는 거죠. 제가 사정해서 만난 것도 아닌데.”
“헤어질 생각을 하면서 관계를 가졌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가 원해서 한 것이 아니라, 소피아 남작이 저를 원했다고요.”
“네가 뭐라고? 너도 남작에 불과하잖아? 게다가 언제 다시 만난다는 기약도 없고. 그런 너를 왜 원해? 뭐가 이상하지 않아?”
“제가 그냥 남작이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아 경이 몰라서 그러시는데, ‘균열의 기사’라고 하면 다들 눈빛부터 달라집니다.”
“그래 봐야 북부의 남작에 불과하잖아. 그게 남부에서 통할 거라고 생각해?”
“통하니까 소피아 남작이 저를 원한 거죠. 라고아 경도 우리의 사회적인 위치에 대한 자각을 좀 하십쇼. 제국이나 남부 왕국의 대귀족들이 라고아 경에게 ‘백작 각하’라고 부르는 거 잊으셨습니까? 우린 그런 사람들이라고요.”
“인마. ‘백작 각하’는 나고. 어디서 은근슬쩍 묻어 가려고 그래?”
“에이, 라고아 경과 저는 한 몸 아닙니까? 바늘과 실, 두레박과 줄, 무덤과 비석처럼.”
“무덤과 비석은 뭐야? 비유를 해도 수준 낮게. 쯧쯧!”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뜻만 통하면 되지 뭘 꼬치꼬치 따지십니까? 그러니까 라고아 경의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랜드 마스터의 옆에 네 사람밖에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죠. 크나우프 대공을 보십쇼. 주변에 귀족들이 바글바글하지 않습니까!”
“고마운 줄 알아. 덕분에 네가 나를 따라다닐 수 있는 거야. 크나우프 대공이 남작과 어울리는 줄 알아?”
“험,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저도 충분히 소피아 남작의 뒷배가 될 수 있다 이겁니다. 인정하십시오.”
불리해진 파비안은 얼른 말을 돌렸다.
“뒷배가 되어 준다는 이유로 여자를 취하다니,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안 드냐?”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억울하죠. 제가 취한 게 아니라, 당한 거잖습니까?”
“이제야 본심이 나오네. 그래, 너 당한 거야, 인마. 그 여자 보통 아니다.”
“아니, 제 말은 꼭 그런 뜻이 아니라…….”
파비안은 그래도 관계를 가졌다고 소피아 남작을 변호하려 했지만, 엘리오는 가차 없이 그의 말을 끊었다.
“됐어. 너도 기사라면 그 여자와 거래를 했으니 뒤나 잘 봐줘.”
“제가 잘 봐줄 건 또 뭡니까? 그냥 제 이름을 팔아서 영지를 지키겠죠. 다시 만나게 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넌 나쁜 놈이야. 비록 여자가 그럴 마음을 먹는다 해도 너까지 그러면 안 되지.”
“라고아 경이 너무 완고한 겁니다. 저와 소피아 남작의 관계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녀에게는 저의 유명세가 필요할 뿐입니다. 우리 관계는 딱 거기까지예요. 제가 이런 경우를 한두 번 본 줄 아십니까?”
“여하튼 난 모르니까 네가 알아서 잘 처신해. 만약 네가 오를로바 남작의 일로 내 발목을 잡으려고 하면, 난 너 두고 간다. 추운 북부보다 따뜻한 남부가 살기에 더 좋을 수도 있지.”
엘리오의 말에 파비안이 펄쩍 뛰었다.
“어이쿠!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십쇼. 저는 북부의 기사입니다. 제가 왜 아무 연고지도 없는 남부에서 삽니까? 슬래시 랜드는 어쩌고요? 그럴 일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면 아랫도리 간수를 잘해야지. 여기저기 휘두르고 다니면서 무슨 북부로 간대?”
“여기저기까지는 아니었는데요? 라고아 경도 아시다시피 딱 한 번입니다, 한 번.”
“내기할래?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되는 거 금방이다.”
“에이, 진짜 아니라니까요. 저도 천재 기사 소리를 듣던 사람입니다. 처음 만난 여자에게 막 휘둘리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시겠지. 아무튼 미노스로 가는 역마차 표나 알아보고 와.”
“예! 맡겨만 주십쇼.”
일 년 만에 여자를, 그것도 미녀를 안았던 파비안이 씩씩하게 답했다.
***
소도시 세르보.
아드리아 왕국군 스컬 군단.
임시 군단장실.
군단장 디폰 코넬리아 백작이 참모장 이코프 사이하 자작에게 말했다.
“클라우드 남작을 확실하게 우리 손에 넣어야 한다. 소피아 참모에게만 맡겨 두지 말고 아낌없이 지원해라.”
“그렇지 않아도 소피아 남작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말하라 했습니다.”
“경비도 넉넉하게 챙겨 줘. 숲속에서 그 짓을 하게 할 수는 없잖나.”
“예.”
“라고아 백작은 인정에 취약한 인물이다. 클라우드 남작을 손에 넣으면, 그를 손에 넣은 것과도 같다. 우리 남부 왕국에도 제국의 그랜드 마스터에 대적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크나우프 대공을 막으려면, 이쪽에도 그에 버금가는 능력자가 있어야 해.”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애초에 이 작전을 계획한 사람이 소피아 남작입니다. 잘 해낼 겁니다.”
“소피아 남작의 영지 상황은 어떤가?”
“장성한 사촌들이 근처에 살고 있는데……. 소피아 남작을 두려워해 영주성에는 기웃거리지도 않습니다.”
“파리 떼가 꼬이지 못하도록 잘 지켜보라고 해. 소피아 남작의 신경이 분산되어 작전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내가 용서치 않아.”
“국왕 전하께서도 지켜보고 계시는데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파룸 자작은 잘 정리했나?”
“예, 전령을 보내 소피아 남작에게 욕심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리오 파룸 자작은 소피아 남작을 후처로 삼으려 했다.
그걸 알게 된 참모장이 빠르게 손을 쓴 것이었다.
“그래도 정신 못 차리고 소피아 남작에게 지분거리면 바로 징집해 버려.”
“알겠습니다.”
“소피아 남작은 지금 어딨나?”
“클라우드 남작을 만나러 갔습니다.”
“오늘 아침에 관계를 갖지 않았나? 너무 밀어붙이는 거 아냐?”
“가임기를 놓치고 싶지 않답니다.”
“허어! 애국심이 많은 건지, 욕심이 많은 건지 모르겠군.”
“반반일 겁니다. 남부 여자들이 굼뜬 남부 남자보다 빠릿빠릿한 북부 남자를 더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우리는 2시간 후 다시 전진한다. 소피아 남작은 병참 지원 부대로 보내라. 그렇게 노력하는데, 가임기 동안이라도 클라우드 남작과 지낼 수 있게 해 줘야지.”
“알겠습니다.”
참모장이 물러나자 군단장 디폰 코넬리아 백작은 탁자 위의 지도로 눈을 돌렸다.
페로무로스는 강철 도시답게 제국군의 총공세에서 지금까지 잘 버텨 주었다.
제국군이 페로무로스에 부여한 의미가 옳다.
그곳을 점령한 자가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페로무로스여, 너로 인해 세상은 제국의 몰락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