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59
1359회. 우리 사이가 그 정도밖에 안 됩니까?
세르보 역마차 사무소.
파비안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역마차 사무소를 찾아갔다.
역마차 사무소 건물도 다른 주변의 건물들처럼 반파되어 있었다.
그래도 일을 하는지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다.
파비안이 막 걸음 속도를 올리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불렀다.
“파비안 남작님?”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의 음성에 파비안은 히죽 웃으며 돌아섰다.
“소피아 남작?”
“역시 파비안 남작님이셨군요. 뒷모습이 비슷해서 혹시나 하고 불러 봤어요.”
“아, 네.”
파비안이 계면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얼떨결에 관계를 맺은 사람과 다시 만나니 기분이 묘했다.
“역마차 사무소에 가시나요?”
“예, 미노스로 돌아가려고요.”
“미노스는 페로무로스 동부에 있죠?”
“맞습니다. 여기 오기 전에 머무르던 샬레(남부의 산장)로 돌아가려고요.”
“지내기에는 샬레보다 티팝(남부의 숙박업소)이 낫지 않나요?”
샬레는 마을 변두리의 산장이고, 티팝은 도시의 숙박업소라 큰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는 하죠.”
파비안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그곳에 머무르게 됐지만 도시가 편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미노스에 봐 둔 귀족가의 아가씨가 있어서 돌아가는 걸까요?”
“그런 건 아닙니다.”
“후후! 그렇다고 해도 괜찮아요. 제가 파비안 남작님의 부인도 아니고.”
계속된 그녀의 오해에 파비안은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의 약속을 털어놓았다.
“……그분들이 돌아오면 미노스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꼭 미노스로 가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크라시온에 연락해서 ‘세르보로 오시라’고 전해 드릴 수도 있거든요. 크라시온에서 오시는 거면 거리도 비슷해요. 어차피 기다릴 거면 숲속 마을보다 도시가 낫지 않겠어요?”
“그렇기는 하죠.”
파비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 일행에게 알릴 수만 있다면 굳이 미노스에 갈 이유는 없었다.
“그럼 세르보에 계세요. 제가 크라시온에 계시는 오마르 백작님께 연락해 놓을게요.”
“정말요? 그래도 되긴 하는데……. 어? 그러고 보니 스컬 군단이 이동하던데……. 이렇게 혼자 돌아다녀도 돼요?”
“저는 지원 부대로 재배치 받았어요. 당분간 세르보에 머무르게 될 것 같아요. 소드 비기너가 아니라는 이유로 전투 부대에서 배제됐어요.”
“결국 그렇게 됐군요.”
파비안이 씁쓸한 얼굴로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을 보았다.
군단장의 참모진과 지원 부대는 하늘과 땅 차이다.
지원 부대가 몸은 편할지 몰라도 전후에 받게 될 보상을 생각하면 큰 손해였다.
“저는 더 잘됐다고 생각해요. 덕분에 파비안 남작님과 자주 볼 수 있게 됐잖아요. 물론 그것도 지원 부대가 이동하기 전까지만이지만.”
“그렇군요.”
자주 볼 수 있게 됐다는 말에 파비안은 괜히 설렜다.
아침에는 얼떨결에 관계를 가졌지만, 지금 다시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파비안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파비안을 보며 말했다.
“그럼 그 문제는 저에게 맡겨 주시겠어요? 부대가 이동하기 전에 제가 처리해 드릴게요. 저는 가급적 파비안 남작님이 세르보에 계시면 좋겠어요. 우리가 언제 또……. 어맛!”
파비안이 갑자기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의 손을 덥석 잡고는 주위를 맹렬하게 살폈다.
잠시 쉬어 갈 장소를 찾는 것이다.
때마침 티팝의 간판이 보이자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
점심 무렵.
한쪽 벽이 떨어져 나간 티팝.
엘리오가 삐딱한 얼굴로 파비안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미노스로 안 가도 된다고?”
“우리가 미노스에 무슨 연고지가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변두리 마을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도시가 낫죠. 샬레에서는 매일 이상한 스튜에 빵, 국수만 먹었잖습니까?”
“그래도 한적해서 수련하기에 좋다고 했잖아.”
“이곳에도 한적한 곳은 많습니다.”
“어디가 한적한데?”
“조금 나가면 찾을 수 있습니다.”
“말 바뀌는 거 봐. 너 역마차 사무소 간다더니 오를로바 남작 만나러 갔던 거냐?”
“만나러 갔던 건 아니고요, 역마차 사무소 앞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내가 말했지?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된다고.”
“그건 그냥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던 거고요. 여하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미노스보다 세르보가 낫다는 겁니다.”
“내가 볼 때 너 여우에게 홀린 거 같다.”
“제가요? 전혀요. 제가 누구에게 홀릴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닙니다. 홀리면 모를까.”
“정신 마법의 후유증인가?”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여자에게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네.”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 쉬운 남자 아닙니다.”
“쉬운 남자가 아닌데 왜 그렇게 허우적거려?”
“허우적거리다뇨?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서,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 겁니다. 샬레보다는 티팝이 백번 낫죠. 아닙니까?”
“티팝이 낫긴 하지.”
“그래서 이곳에 남기로 한 겁니다.”
“나중에 오를로바 남작 따라서 이동하자는 소리나 하지 마라.”
“저를 뭐로 보시고. 저 바보 아닙니다.”
“됐고. 여기서 지내는 동안 페로무로스의 상황이나 잘 알아 와. 신물질이 진짜라면…… 그걸 유통시킨 놈을 잡아 족쳐야 되니까.”
“제가 볼 때는 마탑이 더 수상쩍습니다.”
“마탑?”
“생각해 보십쇼. 엑시티움도, 아르테늄도 죄다 마탑에서 나온 것들 아닙니까? 더구나 마탑은 제국에 있는데, 왜 아르테늄은 남부 왕국에 내다 판답니까?”
“마탑은 제국에 소속된 게 아니잖아. 그러니 어디에 팔든 자기들 마음이지.”
“그러니 이상하다 이 말입니다. 양쪽에 무기를 공급해서 싸우게 한 꼴이잖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엘리오가 반응을 보이자 파비안은 신이 나서 더 떠들어 댔다.
“마탑입니다. 마탑에 ‘혼란의 선봉장’이 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어차피 마탑도 조사 대상이었으니까 흥분하지 마.”
“그런데 ‘혼란의 선봉장’을 처리하면……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그래야지. 내가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여기에 남아 있냐?”
“제가 자리 잡을 때까지 조금만 더 머물러 계시면 안 될까요?”
“넌 지금도 네 또래보다 한참 앞서 나가고 있잖아. 거기서 무슨 자리를 더 잡아? 슬래시 랜드도 네가 물려받게 될 텐데.”
“제국 황태자가 물고 늘어질까 봐 그럽니다.”
“이번 전쟁을 겪고 나면 황태자도 북부를 함부로 못 건드릴걸?”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걱정도 팔자다. 내가 죽기 전에는 황태자도 너를 못 건드린다. 내 죽음이 확인되기 전까지 안심하고 지내도 돼.”
파바안의 바람과 달리 엘리오는 한시도 남아 있을 마음이 없었다.
“제가 소드 익스퍼트에 오를 때까지만이라도 안 되겠습니까?”
“안 돼.”
“백작님! 우리 사이가 그 정도밖에 안 됩니까?”
“너와 내 가족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무조건 내 가족이다.”
“제가 언제 가족과 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습니까? 조금만 저를 위해 시간을 쓸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응, 안 돼. 나에게는 같은 소리야.”
“쳇! 알겠습니다. 저 나가서 새로운 소식이 있는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러자 엘리오가 파비안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또 오를로바 남작 만나러 간다는 소리지?”
“저더러 페로무로스의 상황을 알아 오라면서요? 조사하지 말까요?”
“사제가 고기 맛을 알면 신전에 빈대가 안 남는다더니……. 딱 그 꼴이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있어 그런 말. 가 봐. 허리 조심하고.”
“에이, 그런 거 아니라는 데 자꾸 그러시네.”
돌아서 몇 걸음 걷던 파비안이 허리를 주먹으로 툭툭 두드렸다.
***
아드리아 왕국.
페로무로스 북부.
이른 새벽.
강철 군단을 필두로 좌측에 31사단, 중앙에 33사단과 제1 집단군, 우측에 36사단, 후미에 포병 여단과 37사단이 도열했다.
페로무로스 동, 서, 남부에 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제국군 부대를 제외한 원정군 주력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다.
진형을 살피던 원정군 총사령관 루이스 프레이저 3세가 물었다.
“적의 예상 공격 시간은?”
“이미 20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거지? 적의 선봉이 승리 군단이라고 했지? 시건방진 놈들. 군단 깃발은 확인됐나?”
“예, 아! 관측병으로부터 연락입니다. 승리 군단이 평원으로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곧 깃발이 눈에 보일 겁니다.”
“마력포 사정권에 들어오면 무조건 쏘라고 해. 놈들이 페로무로스로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도시를 포위 압박한 노력이 허사가 되니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잠시 후 후미에서 마력포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남부 왕국군 진영에서도 대응하듯 마력포를 쏘아 댔다.
꽝! 꽝! 꽝! 꽝! 꽈앙―!
꽝! 꽝! 꽝! 꽈앙―!
남부 왕국군과 제국군 위로 마력포가 비 오듯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양측 지휘부가 바쁘게 움직였다.
마력포와 마력총이 나온 뒤로 전투는 일정한 규칙하에 진행됐다.
먼저 양측이 진영을 갖춘다.
그런 뒤 서서히 상대와 거리를 좁혀 나간다.
그러다 마력포 사정거리에 도달하면 일제히 마력포를 퍼붓는다.
하지만 마력포를 쏘는 건 오래가지 않았다.
마력포의 정확도가 떨어지기에 양측의 거리가 100미터 정도 되면 멈췄다.
그때부터는 기마대나 총병 부대가 전투에 투입된다.
기마대와 총병 부대 다음은 기사와 검방병들의 백병전 식이다.
“돌격!”
“뛰어!”
“살고 싶으면 달려!”
남부 왕국군 선봉 부대인 승리 군단 독전관들이 연신 소리를 질러 댔다.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제국군과 가까워져야 마력포가 멈추기 때문이다.
어쩌다 선두에 서게 된 기사와 병사 들은 미친 듯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러다 마침내 적과의 거리가 100미터 남짓 되자 돌격은 잠시 주춤했다.
숨이 찬 것도 있지만 마력포의 공포에서 벗어난 때문이다.
검방 부대가 잠깐 한숨을 돌릴 때, 좌측에서 기마대가 돌진했다.
기마대에 의해 전열이 흐트러지면 다시 검방 부대가 돌격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승리 군단의 검방 부대는 돌격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패로 몸을 가리고 연신 뒤를 힐끔거렸다.
한편 제국군 진영은 돌격해 오는 남부 왕국군에 비해 차분한 분위기였다.
남부 왕국군의 기마대를 향해 33사단 총병 부대가 사격을 개시했다.
퍼퍼퍼퍼펑―!
기마대가 맥없이 고꾸라졌다.
십여 기의 기마병이 총병 부대 앞까지 왔다가 석궁병의 지원 사격에 덧없이 쓰러졌다.
그걸 본 강철 군단의 신임 군단장 일마르 라그 백작이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마력총이 보급된 지 언젠데 아직까지 기마대의 돌격이라니…… 한심하군.”
그러자 참모장 커트 바르트너 자작이 설명하듯 말했다.
“남부 왕국에는 아직 마력총 보급이 충분치 않아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제국과의 전쟁에 자기들끼리 싸우던 방식을 들고 나오면 어쩌자는 거야? 아무튼 이제 곧 강철 골렘이 투입되겠군. 우리 바탈리온 부대는 준비됐겠지?”
“새벽에 무장을 점검했습니다. 이상 없습니다.”
“엑시티움에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우직한 건지, 무식한 건지…….”
때마침 거대한 괴물체를 본 일마르 라그 백작이 말끝을 흐렸다.
거대한 강철 골렘 앞에 그는 한순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를 맞춰 바탈리온 부대의 사격이 시작됐다.
퍼퍼퍼펑―!
선명한 붉은 빛줄기가 강철 골렘들을 향해 날아갔다.
터터텅―!
기묘한 울림과 함께 붉은빛이 꺾였다.
누가 봐도 강철 골렘의 몸에 맞고 엑시티움이 튕겨 난 모양새다.
아니나 다를까!
붉은 빛줄기를 뚫고 강철 골렘들이 강철 군단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윽고 강철 골렘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득였다.
지이잉―!
‘죽음의 빛’이라 불리는 빛이 바탈리온 부대를 휘저었다.
곧이어 제국군 최강이라는 강철 군단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