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63
1363회. 역사적인 순간일 수도 있다면서?
페트로폴리스 중구 외곽.
제국 수도인 페트로폴리스 외곽은 빈민들로 가득했다.
빈민 구성을 보면 절반은 중심부에서 살다 도태된 사람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외부에서 유입된 가난한 사람들이다.
제도의 중앙에 위치한 중구도 다를 바 없었다.
중구 외곽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빈민촌은 귀족들의 골칫거리였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싫든 좋든 추레한 빈민촌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빈민촌을 지나는 귀족가 마차의 창문은 늘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쯤 되면 강제로 ―중구의 빈민촌만이라도― 철거할 법도 한데 귀족들은 그러지 못했다.
빈민들의 권익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마나 프트라스와 샤스트라 파라크티 교단의 반대 때문이다.
그들은 빈민촌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마나 프트라스와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신자라는 이유로 빈민촌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사람이 하나 있으니, 그가 바로 팔라딘 메타트론이다.
그는 아예 자신의 수도처를 빈민촌에 만들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를 ‘빈민의 수호 성인’이라 부르며 추앙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잔혹한 신의 대리인’ 소리를 들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초저녁.
허름한 판잣집.
근육질 몸의 사내가 들고 있던 종이를 책상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에 촛불이 가볍게 흔들렸다.
몸에 걸친 회색 로브로 보아 사제로 보이지만, 사실 그는 신관급의 성기사였다.
성기사 중에서도 소드마스터급 경지에 오른 이에게 부여되는 명칭이 팔라딘이다.
팔라딘 메타트론은 묵묵히 골방으로 들어가 회색 로브를 벗었다.
이윽고 벽에 걸려 있던 철사가 촘촘히 박힌 짧은 채찍 하나를 집어 든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등짝을 쉬지 않고 후려쳤다.
철썩! 철썩! 철썩―!
물기 어린 채찍 소리가 어두운 골방을 가득 채웠다.
채찍질은 근 10분이나 계속됐다.
근육질의 넓은 등짝이 너덜너덜해지자 채찍질이 멎었다.
피 칠갑을 한 메타트론은 무릎 꿇고 앉아 묵상 기도에 들어갔다.
허리와 엉덩이골을 타고 내려간 핏물이 널빤지 바닥에 흥건히 고였다가, 이내 나무 사이의 틈으로 빠져 내려갔다.
찢어진 등에서 피가 멎을 즈음, 메타트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색 로브를 걸쳤다.
골방 문을 열고 나간 그는 롱소드를 허리 벨트에 천천히 꿰어 넣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제사를 지내듯 절도 있고 묵직했다.
곧이어 책상 앞으로 다가간 그는 지령서를 들어 촛불에 가져다 댔다.
불붙은 지령서는 이내 까맣게 재가 되어 떨어졌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
크나우프 대공과 쌍벽을 이루는 그랜드 마스터라고 하던가.
크나우프 대공은 대귀족의 수장답게 별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북부 출신의 라고아 백작은 달랐던 모양이다.
잠시 후 그가 판잣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어둠 속에서 열두 명의 성기사들이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
엘리오는 파비안만 데리고 크라시온을 떠났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하워드, 크레아를 크라시온에 남겨 둔 이유는 남부 왕국의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마젠타(블랙마켓 관리자)가 우샤스 운드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진 그는 운종술을 이용했다.
이미 중부와 남부를 역마차로 지났던 터라 길을 잃고 헤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없었다.
가끔씩 도시나 마을이 나타나면 방향을 확인해 가면서 두 사람은 제도, 페트로폴리스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한낮, 운종술의 구름 위에서 문득 파비안이 물었다.
“그런데 마젠타는 역마차를 이용했을 텐데요. 우리가 빨리 가도 소용없는 거 아닙니까?”
“칠팔 일 정도 그가 먼저 출발했을 테니 소용없는 건 아니지.”
“그래도 우리가 그놈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할 것 같은데요?”
도로는 강과 산 때문에 구불구불하지만, 구름은 일직선으로 날아가니 그 속도는 역마차에 비할 게 아니었다.
“괜찮아. 늦게 가서 놓치는 것보다 조금 일찍 가서 기다리는 게 나아.”
“이참에 마탑까지 다 털어 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오! 너 머리 좀 쓴다?”
“조금이 아니죠. 그래도 제가 천재 기사 소리를 듣던 사람인데.”
“아르테늄을 만든 게 어디라고 했지?”
“헤르메티카 마탑요.”
“그거 제국의 삼대마탑 중에 하나 아니야?”
“맞습니다.”
“마젠타는 삼대마탑을 제외한 마탑들과 만날 거라고 했지?”
“그렇죠. 삼대마탑의 엑시티움은 제국으로 흘러 들어가니까요.”
“그럼 마젠타가 도착하기 전에 헤르메티카를 조사해도 문제없잖아?”
“없죠.”
“운 좋으면 헤르메티카 마탑에 우샤스 운드라가 있을 수도 있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마젠타가 우샤스 운드라면 남부 왕국들이 라고아 경을 아주 싫어할 겁니다. 남부 왕국의 역사에 큰 죄인으로 기록될 수도 있습니다.”
“안 무섭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다시 남부 왕국 사람들 볼 일도 없다.”
“저와 오마르 백작님이 문제죠. 역사에 남을 죄인의 동료라…… 남부 왕국 어딜 가도 손가락질받을 겁니다.”
“모두 북부로 돌아갈 건데 뭐가 걱정이야? 하워드와 크레아는 제국에서 살 테고.”
“사람 일이라는 게 꼭 정해진 대로 되는 것만도 아니니 하는 말입니다.”
“왜? 남부 왕국에서 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제가요? 전혀요! 다만 어비스를 탐험하러 가게 될 수도 있어서 그럽니다. 그러려면 남부 왕국을 지나야 하는데……. 역사에 남을 죄인이라.”
“마젠타가 우샤스 운드라라는 증거도 없는데 왜 벌써부터 난리야?”
“그냥, 남부 왕국을 생각하면 답답해서 그럽니다.”
“역사에 죄인으로 기록될까 봐 걱정되면 가서 같이 싸워 주든지. 북부 왕국이랑 동맹이니까 명분은 확실하잖아.”
“제가 평화주의자라서 그건 좀…….”
“아주 지랄을 해요.”
엘리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때 파비안이 소리쳤다.
“저기요! 저기! 저거 마탑 아닙니까? 제도에 도착했나 봅니다!”
그 말에 엘리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도에 들어섰다면 이제 진짜 운명의 순간이 도래한 때문이다.
그는 황급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밋밋한 건축물들 위로 석주처럼 곧게 솟은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지상에서 보던 마탑이었다.
빠르게 날아가던 구름이 속도를 줄이더니 마탑 인근에 내려앉았다.
구름에서 내려선 엘리오가 파비안에게 물었다.
“나는 저 마탑에 들러 볼 생각인데, 너는 어떻게 할래?”
“당연히 같이 가야죠. 역사적인 순간일 수도 있는데 혼자 가려고 했습니까?”
“흥! 역사적이기는 개뿔. 갈 데가 없어서 그러는 걸 모를 줄 알고?”
“갈 데가 없다뇨? 아무 술집에나 가서 어비스 모험담을 늘어놓으면 너도 나도 술 사 주겠다고 덤벼들 겁니다. 북부와 중부에서 어비스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 모르십니까?”
“그래서? 너도 바르도스[吟遊詩人, 음유시인]들 흉내를 내겠다고?”
“흉내라뇨? 원래 바르도스의 시초는 이야기꾼이었습니다. 노래와 시를 곁들이다가 지금처럼 굳어졌지만요. 아직도 전통을 고수하는 바르도스들은 이야기만 합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앞에 마탑 입구가 나타났다.
마탑 입구를 지키던 경비병이 앞을 가로막고 정중하게 물었다.
“이곳은 아도브 마탑입니다.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아도브 마탑이라는 말에 엘리오와 파비안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헤르메티카 마탑이면 좋았을 텐데 들어 본 적도 없는 마탑이라니!
주군인 엘리오를 대신해 파비안이 나섰다.
“나는 클라우드 남작이다. 헤르메티카 마탑을 찾고 있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줄 수 있겠나?”
“남작님이셨군요. 헤르메티카 마탑이라면 한참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그곳은 제도 북구에 있습니다. 이곳은 반대편인 남구이고요.”
“아, 북구에 있었군. 이대로 쭈욱 올라가면 되나?”
“걸어서는 꼬박 하루가 걸릴 겁니다. 그보다는 역마차를 이용하시든가, 아니면 마차를 대여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역마차는 빙글빙글 돌아가지 않을까?”
“말씀하신 대로 조금 돌아갑니다. 그게 불편하시면 마구간에서 말이나 마차를 구입하거나 대여하셔야 합니다.”
“대여도 해 주나?”
“그러믄요. 지역마다 마구간이 있어서, 사용하시고 난 다음 가까운 곳에 가져다줘도 됩니다. 물론 대여한 마구간과 같은 마구간에 가져다줘야 합니다.”
“마구간이 여러 개 있나 보군?”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이곳 남구에는 다섯 곳이 있습니다.”
“알겠네. 친절하군. 아주 마음에 들어.”
파비안의 칭찬에 경비병은 멋쩍은 얼굴로 ‘헤헤’ 웃었다.
아도브 마탑을 떠난 두 사람은 가까운 마구간에서 마차를 대여했다.
말을 빌리면 두 사람이 직접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야 하지만, 마차는 마부가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기 때문이다.
마차는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거대한 마탑 앞에 멈춰 섰다.
파비안이 창문 밖으로 머리를 길게 빼자 마부가 소리쳤다.
“나으리! 헤르메티카 마탑에 도착했습니다!”
“수고했다. 잠시 기다려라.”
이윽고 머리를 다시 안으로 넣은 파비안이 엘리오에게 말했다.
“도착했답니다. 저는 어떻게 할까요?”
“왜? 언제는 역사적인 순간일 수도 있다면서? 같이 안 가?”
“생각해 보니 제가 자칫 라고아 경의 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슬슬 딴생각이 난 건 아니고?”
“딴생각요?”
“조금 전에 페르모사 에스텔라를 보고서 엄청 반가워했잖아.”
페르모사 에스텔라는 엘리오 일행이 처음 제도에 와서 장기간 숙박했던 고급 여관이다.
거길 지날 때 파비안이 엉덩이를 들썩거렸기에 하는 말이었다.
“오마르 백작님도 안 계신데 제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런 델 갑니까?”
“왜? 어비스 모험담이면 너한테 술 사 줄 사람들이 줄을 선다며?”
“에이. 그거야 그냥 해 본 소리고요. 진짜 라고아 경 발목 잡게 될까 봐 그러는 겁니다. 우샤스 운드라가 어디 보통 신입니까? 라고아 경의 신경이 분산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반쯤 진심이었다.
제국군에 체포돼 정신 마법을 경험한 뒤로 파비안은 이전보다 신중했다.
“일리는 있다만…… 평소 네가 하던 말과 조금 달라서 그러지.”
파비안은 자손들 앞에서 자신의 모험담을 떠벌리고 싶어 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뒤로 빠지겠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페르모사 에스텔라 외에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저도 끼어야 할 때와 빠져야 할 때를 아는 사람입니다. 저의 충심을 오해하지 말아 주십쇼.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함께 가고요.”
“야아. 요거 속이 훤히 보이는데 계속 아니라네. 아무튼 나는 네 의견에 동의해. 우샤스 운드라는 카마 데비아스와 완전히 다른 놈이거든.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나 혼자 만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제가 그래서 혼자 가시라는 겁니다. 제가 방해가 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저는 가까운 술집에서 시간 보내다가, 일을 마치실 때쯤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러든가.”
엘리오는 긴말 않고 마차에서 내려 마탑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마탑 안으로 사라지자, 가만히 서 있던 마차도 천천히 움직였다.
잠시 후 고급 여관 겸 술집 페르모사 에스텔라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곧이어 한 청년이 마차 문을 열고 나왔다.
파비안이었다.
오늘 밤에도 유명 바르도스의 공연이 있는지 입구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문밖으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와 각종 요리 냄새에 파비안은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아아! 이게 얼마 만에 맛보는 문화의 맛이란 말인가!
곧이어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지배인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클라우드 남작님. 남부에 계시다는 소문이 있던데……. 제도에는 언제 올라오셨습니까?”
“방금 왔네. 지나던 길에 이곳에서 마시던 술이 생각나서 들렀는데……. 응?”
무심코 무대를 향하던 파비안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바르도스의 목소리가 귀에 익다 싶었는데 아리에트 알바노였다.
파비안의 시선을 좇아가던 지배인이 빙그레 웃었다.
“아리에트 알바노 양을 기억하십니까? 오랜만의 공연인데 때마침 잘 오셨습니다. 아리에트 양도 남작님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공연 끝나면 두 분이 말씀 나누십시오.”
파비안은 주머니 사정은 생각지도 않고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