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71
1371회. 믿음과 자기 확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메타트론은 회색 로브를 걸치고 골방을 나섰다.
빈민가를 지나 번화가로 접어들자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갈등이 됐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은 아직 교단의 적인지 친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자신은 오늘 교단의 성기사들과 함께 그를 정죄하고 죽이려 했다.
성큼성큼 걷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그가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사도든 아니든, 자신은 그에게 조언을 청할 자격이 없었다.
멀리 페르모사 에스텔라의 간판이 보이자 메타트론은 멈춰 섰다.
‘마나 프트라스시여! 저는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러나 신은 언제나처럼 응답하지 않았다.
메타트론은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았다.
고아로 떠돌다 흑마법사에 납치당해 온갖 고초를 겪다 성기사에게 구함받았다.
교단에서는 흑마법사의 조수라며 죽이려 했지만, 성기사의 보증으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뒤 자신이 납치당한 피해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흑마법사의 조수였다는 이력은 신전 기사가 되어서도 따라다녔다.
‘흠결이 많다’던 스승의 말은 그것을 빗댄 것이었다.
그동안 어느 성직자보다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하루 종일 골방에서 참회를 해도 믿음은 자라지 않았다.
성기사의 최고봉인 팔라딘이 되어서도 그것만큼은 제자리였다.
이 정도면 마나 프트라스님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여겨도 되지 않을까?
메타트론이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왔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리던 메타트론은 급히 시선을 돌렸다.
다가온 사람이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가신인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인 까닭이다.
“복수라도 하려고 왔습니까?”
그의 말에 메타트론은 너무 어이가 없어 푸들푸들 웃었다.
“나도 주제를 아는 사람인데 그럴 리가 있나.”
“어쨌든 모시고 오랍니다.”
뜻밖의 말에 놀란 메타트론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라고아 백작이?”
“예.”
“왜지?”
그러자 파비안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도 모릅니다. 단지 성기사님을 모셔 오라는 말씀만 들었습니다.”
멍하니 클라우드 남작을 보던 메타트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기사의 거대한 체구에 압도당한 파비안은 자연스럽게 돌아섰다.
메타트론이 모든 걸 내려놓은 얼굴로 클라우드 남작의 뒤를 따랐다.
페르모사 에스텔라.
파비안은 메타트론을 엘리오의 앞까지 안내한 뒤 다른 자리로 옮겨 갔다.
복잡한 얼굴로 서 있는 메타트론에게 엘리오가 말했다.
“앉으시죠.”
메타트론은 라고아 백작의 맞은편 자리에 조용히 걸터앉았다.
“암살을 하려고 온 것 같지는 않고, 무슨 용무라도 있습니까?”
한참 동안 뭔가를 생각하던 메타트론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대는 정말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의 사도요?”
“제가 허튼소리는 곧잘 합니다만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허튼소리와 거짓말의 차이를 알 수 없던 메타트론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대는 스스로를 가리켜 ‘어느 신도 믿지 않는 불신자’라 했소. 그런 사람이 어떻게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의 사도가 될 수 있단 말이오?”
“아하,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나는 샤스트라 파라크티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심지어 아주 아주 긴밀한 관계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을 섬기거나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라고 한 겁니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샤스트라 파라크티님과 나의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라서요. 샤스트라 파라크티 교단에서도 틀림없이 저를 사도라 인정할 겁니다.”
“샤스트라 파라크티님과 긴밀한 관계지만, 섬기거나 숭배하지는 않는다?”
“정확합니다.”
메타트론은 더욱 모르겠다는 얼굴로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불경스럽게 여신과 긴밀한 관계라니?
그건 자신의 머리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그가 사도인지 아닌지는 샤스트라 파라크티 교단이 규명해 줄 터였다.
“그대가 사도라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묻겠소. 천벌은 마나 프트라스께서 나에게만 내려 주신, 고유의 은총이오. 그런데 그대는 내가 사용한 천벌을 도리어 나에게 되돌려 주었소. 그 일로 나는 마나 프트라스님에게 버림받은 느낌을 받았고, 급기야 신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리고 있소.”
“저어, 말씀 중에 죄송한데……. 그런 건 저 같은 불신자보다 사제나 신관에게 털어놓는 게 낫지 않나요?”
“물론 만나 보았소. 내 믿음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 하더이다.”
“아…….”
“불신자인 그대의 능력이 나의 믿음보다 강해서 천벌을 빼앗긴 거라고.”
“…….”
“나는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그대가 사도라니 가르쳐 주시오. 정녕 내 믿음이 약해서 천벌을 강탈당한 것이오?”
메타트론이 절망 어린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응시했다.
뜻밖의 말에 엘리오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럴 리가요. 누가 그런 무식한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그거야말로 근거 없는 미신입니다.”
스승인 알마티오 신관을 사정없이 깎아내리는 말에 메타트론은 멈칫했지만, 묵묵히 라고아 백작의 설명을 기다렸다.
“제가 천벌을 되받아친 것은 검술의 응용일 뿐, 성기사님의 믿음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검술의 응용?”
“누군가와 싸우다 보면 종종 영감을 얻게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성기사님의 천벌이 떨어질 때 왠지 그렇게 하면 되받아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제 고향에서는 그걸 ‘꽃을 나무에 옮겨 붙인다[移花接木, 이화접목]’라고 합니다.”
“아아!”
성기사인 메타트론은 단번에 라고아 백작의 말을 알아들었다.
불신자인 그는 천벌을 검술로 되받아 친 것에 불과했다.
그런 사람 앞에서 믿음 운운했으니 얼마나 이상해 보였을까.
“그리고 제가 알기로 믿음은…… 크다 작다가 아니라, 있다 없다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믿음을 어떻게 크다 작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제 고향의 수도자들은 분명히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제가 경험하기로도 그랬고요. 애초에 신만 알 법한 믿음의 크기를 인간이 크다 작다 논하는 것도 우습고요.”
“…….”
‘믿음이 작아서 그렇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살아온 메타트론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 엉뚱하기는 하지만 라고아 백작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스승인 알마티오 신관이 마나 프트라스가 아닌 이상, 믿음의 크기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스승님이 하신 말씀들은 다 뭐지?’
스승은 모든 것을 ‘믿음이 작다거나, 부족해서 그렇다’고 했다.
“제가 성기사님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성기사님의 문제는 믿음 때문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자기 확신이 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렇소?”
“성기사님이 만난 사람은 검술과 거리가 멀었을 겁니다. 그러니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했을 테지요. 하지만 성기사님은 검술의 높은 경지에 이른 분입니다.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휘둘리지 않았을 겁니다.”
라고아 백작의 말에 메타트론은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성기사로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을 아는 성기사들은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못할 터였다.
빈민의 수호성인, 잔혹한 신의 대리인에게 자기 확신이 부족하다니!
하지만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자신은 스승의 말 한마디에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살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한 것도 확신이 없어서였다.
한참 만에 메타트론의 입이 열렸다.
“그것은 사도로서 하는 말이오?”
신의 대리인이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일 생각이다.
스승인 알마티오 신관보다 사도의 권위가 더 높으니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엘리오는 쉬운 사람이 아니다.
그가 빤히 메타트론을 보며 말했다.
“자기 확신이 부족한 사람들은 늘 권위에 의존하려고 하죠. 성기사님이 내린 판단을 믿으세요. 그 정도 분별력은 있잖아요? 그것조차 없다면 성기사 그만두고 용병으로 사는 게 더 좋을 겁니다.”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메타트론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을 믿으라니.
도리어 그에게 인정을 받은 기분이다.
라고아 백작은 권위에 의존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것조차 신의 전언처럼 들렸다.
순간 머릿속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정수리가 활짝 열리고 우주의 비밀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벅차오르는 감동에 메타트론은 튕겨 오르듯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대가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의 진실한 사도임을 믿소. 좋은 가르침에 감사드리오. 마나 프트라스님의 은총이 그대의 여정에 깃드시기를 기원하겠소.”
그리고 갑작스러운 인사에 엘리오가 미처 답하기도 전에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자리를 피했던 파비안이 맥주잔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무슨 말을 했기에 아까는 죽상이더니 저렇게 좋아합니까?”
“몰라. 지적질을 좀 했는데 저러네. 욕을 먹어야 기운이 나는 사람인가?”
“뭐라고 하셨는데요?”
“성기사쯤 됐으면 자기 판단을 믿으라고 했다. 그 정도도 못 할 거 같으면 성기사 그만두고 용병이나 하라 했더니 저런다. 이게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잖아?”
“아직 정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광포화 단계까지 갔었잖습니까.”
“그런가?”
엘리오가 고개를 갸웃하자 파비안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틀림없습니다. 광포화가 뭡니까? 정신이 회까닥하는 거잖습니까?”
“맞네! 광포화 후유증도 장난 아니구나.”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메타트론의 이상 행동을 두고 떠들어 댔다.
***
제도 동구.
샤스트라 파라크티 대신전.
정오 무렵, 샤스트라 파라크티 교단의 영빈관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샤스트라 파라크티 교단 바누아트 대신관과 마나 프트라스 교단의 할 에리언 대신관이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한동안 일상적인 담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던가.
결국 마나 프트라스 교단의 할 에리언 대신관이 먼저 운을 뗐다.
“어제 북구의 대광장에서 가벼운 소란이 있었다고 하던데, 혹시 들으셨습니까?”
샤스트라 파라크티 교단의 바누아트 대신관이 문득 고개를 들어 할 에리언 대신관을 보았다.
“북구의 대광장이라면, 혹시 우리 교단의 사도와 마나 프트라스 교단의 팔라딘이 싸운 일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할 에리언 대신관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라고아 백작이 정말 샤스트라 파라크티 교단의 사도가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상식적으로 라고아 백작처럼 유명한 대귀족이 본 교단의 사도를 사칭하고 다니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허어! 전혀 몰랐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사도의 출현을 경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저 역시도 궁금하던 참입니다. 귀 교단의 팔라딘은 왜 우리 교단의 사도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까?”
마나 프트라스가 창조신이라면 샤스트라 파라크티는 우주의 수호신.
두 주신은 상호 보완적이지 주종 관계가 아니다.
마나 프트라스 교단의 팔라딘에게 샤스트라 파라크티 교단의 사도를 정죄할 권한은 처음부터 없었다.
바누아트 대신관의 역습에 할 에리언 대신관이 순발력을 발휘했다.
“무슨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메타트론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할 에리언 대신관은 라고아 백작의 이단 궤설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사도는 신의 대리인.
그의 주장을 부정해 봐야 교단이 안고 있는 문제만 부각될 뿐인 까닭이다.
바누아트 대신관은 할 에리언 대신관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로디나 대륙에서 가장 큰 두 교단의 우발적인 충돌은 일단 봉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