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16
1416회. 지금이라도 달아나는 게 어떨까요?
연적하는 ‘날 풀리기 전’이라고 했지만 진우생은 다음 날 아침에 석방됐다.
사례병필태감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던 남진 무사도 저녁에 풀려났다.
진우생과 남진무사가 사례병필태감을 만났는데, 남진무사만 걸고 넘어가려니 영 이상했던 모양이다.
사흘 후, 진우생과 그의 상관인 남진무사가 석경장을 방문해 구명지은에 대한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뒤늦게 어린 황제는 사례태감 왕연을 석경장에 보내 남천 연적하를 황궁으로 초대했으나, 연적하는 황제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한편 남옥 대장군 양재승은 수하들의 입단속에 들어갔다.
남옥 대장군부가 파괴된 것은 ‘새해 벽두부터 화포를 개량하려다 사고가 난 것’으로 소문을 냈다.
그날 ‘남옥 대장군부의 하늘에 거대한 검이 나타났었다’는 이야기가 잠깐 떠돌았지만, 흐지부지 사라졌다.
사실 누가 들어도 ‘거대한 검’보다 ‘화포의 폭발’이 더 설득력 있었다.
물론 남옥 대장군부의 땅이 일직선으로 갈라졌다는 걸 알았다면 달랐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포 폭발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조정 실세인 남옥 대장군부에 들어갈 정도로 간 큰 사람은 없었다.
양재승의 필사적인 수습과 별개로 그의 위세는 추락했다.
무엇보다 다 잡은 남진무사와 진우생을 풀어 준 게 화근이었다.
그 바람에 진위 대장군 풍승이 기사회생을 한 때문이다.
계획한 일이 어그러지자 황숙(皇叔) 진영의 고관들은 양재승을 물어뜯었다.
“다 잡은 물고기를 놓아주는 법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남옥 대장군이 일 처리를 흐릿하게 해서 진위 대장군만 좋게 됐다!”
“이래서야 누가 우리 말을 믿겠는가! 남옥 대장군은 우리를 바보로 만들었다!”
“남옥 대장군이 변절한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처음부터 남옥 대장군은 이 일을 감당할 깜냥이 못 되었다.”
고관들이 쏟아 내는 모든 비난을 양재승은 묵묵히 감내했다.
더 나아가 기가 꺾인 양재승은 이전과 같이 전횡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러다 실패의 책임을 지고 일선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연스럽게 양재승의 시대가 가고, 황숙의 진영에 광효라는 인물이 부상했다.
광효는 과거 양재승처럼 거침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의위에 숙청의 바람이 불어왔다.
남진 북진 할 것 없이 온갖 핑계로 ―황숙의 편에 서지 않은― 금의위가 갈려 나갔다.
하지만 묘하게 진우생만은 자리를 보존했다.
그렇다고 품계가 올라간 것도 아니다.
남진에 속한 금의위가 수없이 삭탈관직당하는 와중에도 진우생 만큼은 천호(千戶)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
진우생을 끝으로 연적하의 주변에서는 더 이상 사건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무림에 이어 관부도 석경장과 관계된 곳에서만큼은 순한 양이 되었다.
석경장은 격랑에 떠밀려 가는 세상에서 홀로 잠잠했다.
막 여름에 접어들 즈음 연지안이 딸을 낳았다.
연적하는 남궁연과 함께 운종술을 이용해 남경으로 날아갔다.
남경.
건원표국 분점.
하나뿐인 딸과 손녀를 보는 연적하의 표정이 묘했다.
과부가 될 팔자였던 딸의 운명을 자신이 바꾸는 바람에, 본래대로라면 없었을 손녀까지 태어났다!
득물(得物)로 뭔가를 창조한 것과는 또 다른 감동이 밀려왔다.
눈도 뜨지 못한 생명체를 보니 가슴이 짠하다.
사위는 여전히 정이 가지 않았지만 손녀만큼은 남 같지 않았다.
딸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남 같지 않은 게 어딘가.
“이름이 뭐라고?”
연적하의 물음에 눈치를 보던 사위 이만양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조부께서 이설아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연적하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행여나 이만양같이 이상한 이름이면 엎어 버리려 했는데 다행이었다.
석경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연적하는 ―금방 사라져 버릴 것을 알면서도― 딸에게 자신의 영기를 슬쩍 흘려 보냈다.
아기를 낳느라 쇠약해진 딸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다.
이 세상에서 혼자만 영기를 허락받았다는 게 이럴 땐 조금 답답했다.
손녀가 태어난 뒤로 연적하와 남궁연은 손녀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그런 부모를 위해 연지안은 딸과 함께 자주 석경장을 찾았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고요하던 석경장도 그때만큼은 활기가 돌았다.
네발로 기던 이설아가 열 살이 되었을 때, 나라에서는 정변이 일어났다.
남경이 전란에 휘말렸지만 여강현만큼은 평화로웠다.
황제의 군대도, 정난군도 여강현으로는 진입하지 않았다.
수년에 걸친 전쟁은 결국 정난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오랜 세월 바라던 황제의 자리에 오른 황숙은 무슨 이유에선지 남경을 버리고 북직례성으로 황도를 옮겼다.
황도의 지위를 잃어버린 남경은 ―여느 고대의 황도들처럼―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걸어갔다.
남직례성 자체가 대륙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났다.
그래도 보통 사람들의 생은 멈춤 없이 계속됐다.
남진 천호 진우생은 북직례성으로 불려가지 못하고 남경 지부에서 한가하게 세월을 보냈다.
역모의 누명으로 고초를 겪었던 진우생은 오히려 그런 생활에 만족해 했다.
쇠락의 길을 걷는다 해도 남경의 풍요로움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건원표국 남경 분점도 서풍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독립했다.
그즈음 오봉산채에는 더 이상 연적하의 의형제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녹림에서 은퇴하거나, 노환으로 사망한 까닭이다.
자연스럽게 오봉산채와 연적하의 왕래도 끊겼다.
녹림에서조차 이제는 오봉십걸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연적하가 강호에 발을 끊은 지도 어언 삼십 년.
이제는 석경장도 조금씩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십 년쯤 전 외숙 내외가 노환으로 사망한 뒤로 사촌들과의 연락도 뜸했다.
다만 남경에 사는 진우생 부부만 명절이면 찾아와 인사를 하고 갔다.
***
합비.
여강현 석경장.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저녁.
이 남 일 녀가 석경장의 굳게 닫힌 문 앞에 나타났다.
아니 정확히는 대문이 있는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다.
세 사람 모두 이십 대 초반의 나이로 보였다.
비에 젖었지만 남자들은 용처럼 헌앙했고, 여자는 봉처럼 수려했다.
성별은 달랐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들 모두 허리춤에 멋들어진 도검을 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려한 비단옷의 청년이 일행들에게 말했다.
“이런 산 밑에서 객점을 찾는 건 무리인 것 같습니다. 이 장원에서 하루 묵어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백의의 미녀의 눈이 청포(靑袍)를 입은 청년에게로 향했다.
청포의 청년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빗속에 계속 돌아다니는 것은 아무리 그들이 무림인이라 해도 무리인 까닭이다.
우르르릉― 콰쾅―!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치자 ‘석경장’이라 쓰인 현판이 잠깐 보였다.
백의 미녀, 옥녀검 여혜진이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석경장?’
그것은 그녀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무림을 종횡했던 고수가 세운 장원의 이름과도 같았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여혜진은 한때 고금제일인이라 불리던 ‘남천 연적하’라는 이름을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비단옷의 청년, 뇌운신도 공천백이 막 대문을 두드리려 할 때다.
“잠깐만요!”
여혜진이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
다급한 여혜진의 말에 공천백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때마침 다시 한번 번개가 밤하늘을 갈랐다.
낡은 현판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내 어둠에 묻혔다.
여혜진이 현판을 가리키며 물었다.
“장원 이름을 보셨나요?”
공천백은 머리를 들어 올렸지만 문틀에 시야가 차단돼 보이지 않았다.
대문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던 청포의 청년, 신검서생 주무생이 답했다.
“보았소. 석경장이라고……. 아! 혹시 이곳이 합비에 있다는 그 석경장이라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어제 여강현에 들어섰으니 그 석경장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녀의 말에 공천백과 주무생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경장.
물론 기억을 더듬어야 떠오르는 이름이지만, 무림에 발 담근 사람치고 석경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삼십 년 전에 고금제일인으로 불리던 남천 연적하가 은거한 장원.
진위 여부를 두고 후대에 말이 많지만, 어쨌든 그는 홀로 다섯 명의 천하십대고수들과 싸워 이겼다고 했다.
거품이 낀 것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한 고수였던 것은 분명하다.
뒤늦게 공천백이 호기롭게 말했다.
“남천 대협은 정사지간으로 분류되지만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들었습니다. 날씨가 이러니 하루쯤 묵어 가게 해 줄 겁니다. 설마 우리를 잡아먹기야 하겠습니까? 정 위험하다 싶으면 그때 달아나도 늦지 않을 겁니다.”
여혜진이 슬쩍 주무생을 보았다.
겉으로 드러난 세 사람의 실력은 비슷했지만 그녀는 직감적으로 주무생이 뭔가를 감추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의 의견을 들어 보고 결정할 생각이었다.
주무생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공 형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제아무리 용담호혈이라도 우리가 작정하고 달아나면 막지 못할 겁니다.”
믿었던 주무생까지 그렇게 말하자 여혜진은 빙긋 웃었다.
“두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든든하네요. 저도 두 분의 의견에 따를게요.”
사실 옥녀검 여혜진, 뇌운신도 공천백, 신검서생 주무생은 무림의 신성으로 그 정도 자신감을 보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윽고 공천백이 말아 쥔 주먹으로 대문을 두드렸다.
쾅. 쾅. 쾅.
그러나 요란한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안쪽 동향에 귀 기울이던 공천백이 다시 대문을 두드리려 할 때다.
갑자기 ‘덜컹!’ 소리와 함께 육중한 대문이 열렸다.
공천백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방금까지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는데 언제 대문까지 왔다는 말인가!
이윽고 초로의 남자가 얼굴을 삐쭉이 내밀고 물었다.
“이 밤에 누구요?”
빠르게 문지기를 훑어보던 세 사람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방금 마당을 가로질러 왔을 게 분명한 남자의 옷에 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아서다.
공천백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저희는 강호행을 하던, 아니, 저는 뇌운신도 공천백이라 합니다. 이 두 사람은 강호행을 하던 중에 의기투합하여 함께…….”
풍운비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청년의 말을 끊고 물었다.
“비를 피하러 왔소?”
“그, 그렇습니다. 불편하시다면 그냥 돌아가겠…….”
“들어오시오.”
풍운비는 청년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이 남 일 녀가 주춤주춤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닫아건 풍운비가 청년들에게 말했다.
“나는 석경장의 총관이오. 장주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 객청에서 머물도록 하시오. 따라오시오.”
말을 마친 풍운비가 휘적휘적 앞장서 걸었다.
쏴아아아―!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빗방울은 풍운비의 몸 한 뼘 밖에서 튕겨 났다.
그 모습을 본 세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총관이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호신강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펼치다니!
이래서야 만일의 경우 석경장에서 달아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세 사람을 객청까지 안내한 풍운비가 문득 물었다.
“저녁 식사는 했소?”
주무생이 공손하게 답했다.
“산중을 헤매느라 아직 식사 전입니다.”
“흐음! 그렇구려. 마음 같아서는 저녁을 대접하고 싶지만, 보다시피 날씨가 이래서…… 쉬고 있는 찬모를 불러내기 어려울 것 같소. 강호행 중이라니 가지고 다니는 건량은 있소? 없다면 건량 정도는 내어 주리다.”
“마침 건량이 있으니 저희의 식사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소. 그럼, 오늘 저녁은 푹 쉬도록 하시오. 장주님께 인사는 내일 드리면 될 게요.”
말을 마친 풍운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폭우 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공천백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석경장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을 들은 것이 있습니까?”
여혜진이 흠칫 놀라 되물었다.
“좋지 못한 소문요?”
“한번 들어가면 나가지 못한다거나…… 불청객을 잡아 평생 종으로 부린다거나 하는 것 말입니다.”
무림의 금지들은 대체로 그런 행동으로 악명을 떨치곤 했다.
총관의 무위를 보고 놀란 공천백의 머리가 그런 쪽으로 돌아간 것이다.
여혜진의 눈이 습관적으로 주무생을 향했다.
그러자 주무생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순간 흠칫하던 절세미녀 여혜진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지금이라도 달아나는 게 어떨까요?”
쏴아아아―!
쏟아붓듯 퍼붓는 무지막지한 빗소리에 이 남 일 녀의 대화가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