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53
153회. 잘했어. 잘한 거야
대륙을 가로지르는 장강의 길이는 대략 일만 육천사십이 리(대략 6,300킬로미터).
저 머나먼 청해의 당고랍산맥(唐古拉山麻)에서 발원하여 무수히 많은 성과 대도시를 끼고 굽이굽이 흘러 동쪽 바다에 이른다.
그렇게 긴 강이다 보니 수적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그 수적들이 서로의 경계를 세우고 분쟁을 피하기 위해 만든 게 장강수로연맹이다.
말이 좋아 연맹이지 실은 강을 끼고 살아가는 온갖 수적들의 모임에 불과하다.
어떤 모임이든 가장 강한 자가 우두머리가 된다.
녹림에 들 정도로 세가 큰 장강수채가 맹주 역할을 맡게 된 건 필연이다.
장강의 수적들은 장강수로연맹의 일원으로 장강수채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사십여 년쯤 전에 심통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장강수채는 점차 장강에 발 담그고 살아가는 수적들의 총본산처럼 변해 갔다.
지금은 섬 하나가 장강수채와 관계된 자들로 채워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강수채에서는 무위가 별 볼 일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에게는 외항인 강주진까지만 허락했다. 당연히 그보다 뛰어난 고수들은 내항인 구가촌에 드나들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녹림 총순찰의 입도(入島)를 환영하기 위해 내항을 개방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외항인 강주진을 떠돌던 수적들이 내항이 있는 구가촌으로 몰려들었다.
이두 마차가 구가촌으로 들어갔다.
섬에서, 더구나 이두 마차는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장강수채의 수적들은 그것이 총순찰 일행의 마차라는 걸 바로 알아봤다.
부채주 흑보살 신이충이 수하들을 이끌고 연적하를 맞으러 달려갔다.
이윽고 마차는 구가촌 중앙의 공터에 멈춰 섰다.
그 생경한 모습에 구가촌의 수적들이 이두 마차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사는 겁에 질려 눈만 뒤룩뒤룩 굴릴 뿐 내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간의 경험상 이곳에서도 곧 혈전이 벌어질 것 같아서다.
‘마부에 앉아 있으면 건드리지 않겠지?’
무림인들의 싸움이니 멀찍이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심산이다.
마차에서 내린 연적하 일행은 누구도 이사를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를 보호하기가 쉽지 않으니 차라리 멀찍이 떼어 놓기로 한 것이다.
장강수채와 장강수로연맹의 수적들은 연적하와 장강일괴의 운명적인 싸움을 모른다.
당연히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연적하 일행을 기웃거렸다.
그들에게 녹림 총순찰은 구름 위의 존재나 다름없다.
이때가 아니라면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일이 없는 터라 계속 꾸역꾸역 몰려왔다.
신이충이 나타나자 모여 있던 수적들은 그가 지나갈 수 있게 좌우로 길을 텄다.
덕분에 신이충은 수월하게 연적하 일행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장강수채의 부채주 신이충입니다. 어느 분께서 총순찰님이신지요?”
연적하는 대답 대신 그에게 순찰령 패를 휙 집어 던졌다.
영패를 확인한 신이충이 마치 점소이처럼 굽실거렸다.
“어서 오십쇼! 총순찰님! 장강수채에 찾아 주신 것을 환영합니다.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금방이라도 수적들을 모아 치려고 하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신이충이 옆으로 와서 붙었다.
“제가 채주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공터를 가로지르자 거대한 전각이 나타났다.
전각 입구의 현판에 ‘창룡전’이라는 큼지막한 간판이 걸려 있었다.
신이충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이곳이 장강수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창룡전입니다. 장강수로연맹의 사람들과 회합을 할 때 사용하는 장소이기도 하지요.”
연적하가 뒤따르는 사람들을 힐끔 보며 물었다.
“장강수로연맹의 사람들도 모았어?”
“특별히 모은 건 아닙니다. 외항과 내항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총순찰님의 존안을 뵙고 싶다고 해서 허락했습니다. 장강수로연맹의 사람들을 물릴까요?”
“뭘 또 가라고 해? 냅 둬.”
“예, 그럼 그냥 두겠습니다.”
신이충은 꼬리라도 있으면 흔들 기세였다.
창룡전으로 들어가자 앉아 있던 백여 명의 수적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장강일괴 양대호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총순찰님. 장강수채의 채주 양대호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양대호가 상석을 가리켜 보였다.
연적하는 잠시 멈칫했다.
십두마병을 정리하러 왔는데 만찬 자리로 안내하니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백여 명의 수적들이 기대 어린 눈으로 빤히 보고 있었다.
싸우기 위함이 아니라 정말 누군가의 환영식을 열어 주는 분위기다.
결국 연적하는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뒤이어 양대호가 녹림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하자 수적들이 ‘와아!’ 하고 함성을 질렀다.
양대호가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총순찰님, 장강수로연맹의 수적들을 위해 한 말씀 해 주시지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연적하는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장통같이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한순간 조용히 가라앉았다.
장내를 천천히 둘러보던 연적하가 말했다.
“나는 여섯 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됐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어. 유랑걸식을 하다가 사 년 전에 녹림이 됐지. 오늘 강주진에 와서 보니까 아주 가관이더라.”
가관이라는 말에 수적들이 가볍게 술렁거렸다.
강추진에 있는 수적들을 비난하는 것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수적들의 얼굴이 펴졌다.
“아주 내 맘에 쏙 들어. 나도 머리 쓰는 거 싫어하거든. 여기서는 무조건 힘 센 놈이 왕이잖아. 안 그래?”
“맞습니다!”
“옳소!”
“내가 왜 갑자기 여기에 왔는지 궁금하지?”
“예!”
“말씀해 주십쇼!”
“총채주님이 나에게 부탁을 하더라고. 유명교가 녹림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데, 나보고 좀 막아 달래.”
“…….”
갑작스러운 말에 장강수로연맹의 수적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끔뻑거렸다.
“그놈들이 녹림의 채주를 은근슬쩍 십두마병으로 갈아 치우고 있나 봐. 그걸 총채주가 알고 눈이 뒤집힌 거지. 너희들 같으면 어때? 화가 나? 안 나?”
순간 장강수로연맹의 수적들이 소리 질렀다.
“화가 납니다!”
“그럼 안 되지요!”
“녹림이 어디라고 유명교가 감히!”
연적하가 손을 들어 올리자 소란이 가라앉았다.
“자자. 그래서 총순찰인 내가 강호를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지금쯤이면 유명교에서도 녹림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아차렸을 거야. 그래도 모르면 병신인 거지. 양 채주, 어떻게 생각해?”
연적하의 물음에 양대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교활한 놈이로군.’
머리 쓰는 거 싫어한다는 놈이 말 한마디로 분위기를 바꿔 버렸다.
이래서는 장강수로연맹이 총순찰에게 칼을 들 리가 없다.
씁쓰름한 미소로 서 있는 장강일괴에게 연적하가 노골적으로 말했다.
“양 채주. 너도 십두마병이지?”
한순간 전각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장강수로연맹의 수적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장강일괴만 바라보았다.
“허허. 농담이 심하시군요. 내가 십두마병이라는 증거라도 있습니까?”
연적하가 가슴을 두드리며 답했다.
“어. 내 가슴이 그렇다고 하네. 양대호는 십두마병이라고. 여기서 내 손에 죽을래? 아니면 이제라도 그냥 유명교로 돌아갈래?”
“…….”
양대호는 말없이 연적하를 노려보았다.
이미 그가 자신을 십두마병이라고 선언했으니 아니라고 해 봐야 소용 없다. 장강수로연맹의 수적들은 이제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다고 봐야 한다.
‘어쩔까. 싸워 봐야 하나.’
문득 ‘와룡장의 젊은 연씨가 유명교 십두마병을 죽였다’는 말이 떠오른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나이만 생각하고 행동할 일이 아니었다.
‘아휴. 저걸 그냥. 잘하면 오 초식 안에 모가지를 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머릿속으로 몇 차례 결투를 그려 보았다.
기습하면 오 초식 안에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양대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손바닥이 땀으로 촉촉하게 젖었다.
한참 동안 연적하를 응시하던 양대호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그냥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보내 줄 거요?”
“당연하지. 나는 죽이러 온 게 아니라 정리하러 온 거니까.”
“허면 나는 장강수채에서 손을 떼겠소.”
“잘 생각했어.”
연적하는 진심으로 그의 선택을 축하했다.
총채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생각없이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양대호가 장강수로연맹의 수적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 형제들. 나는 총순찰께서 말한 대로 유명교의 사람이다. 형제들을 속일 생각은 없었다. 유명교와 녹림의 관계가 좋아지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다시 보도록 하자.”
“…….”
장강수로연맹의 수적들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누구도 장강일괴를 향해 배신자니 뭐니 날뛰지 않았다. 그들에게 장강수채의 채주가 유명교였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이들은 파천마군이 중과 도사를 싫어해서 생긴 일로 받아들였다.
분위기는 급전직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양대호가 채주 자리를 포기한 순간 그는 더 이상 연적하의 적이 아니었다. 총순찰 환영회는 어영부영 장강일괴의 환송회로 변했다.
연회는 신시 무렵(오후 3~5시)에 끝났다.
연적하 일행과 양대호는 구가의 항구로 이동했다.
배웅을 나온 장강수로연맹의 수적들이 가까운 항구까지 가는 배를 양대호와 연적하 일행에게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양대호가 배에 오르는 것을 본 뒤, 연적하 일행도 준비된 배를 탔다.
마차와 연적하 일행이 승선을 마치자 배는 천천히 강 중심으로 나아갔다.
뱃전에 선 연적하는 반대편으로 멀어져 가는 장강일괴의 배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십두마병을 죽이지 않고 끝냈다고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뿌듯했다.
설차수 일행은 뭔가 아쉬운 얼굴이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저러는 건 십두마병의 무위에 대한 정보를 모을 수 없어서다.
하지만 정의맹에 정보를 주기 위해 살인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잘됐어. 잘한 거야.’
연적하는 일 처리가 깔끔하게 잘됐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오늘은 모처럼 개운하게 하루를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이켜 보니 그동안 너무 많은 피를 보았다.
지금까지 인간으로 해야 할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배운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죽이면 마음이 불편했다.
서서히 석양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처럼 풍광을 즐기고 있는 그의 곁으로 화용독심 남궁연이 다가갔다.
“무슨 생각해?”
“내가 잘한 건지를 생각해 보고 있었어요. 누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늘의 일?”
“네. 이전과 달리 말로 설득해서 피를 흘리지 않고 끝냈잖아요.”
“후훗. 말 잘하더라. 갑자기 왜 그렇게 할 생각을 한 거야?”
“사람을 죽이면 꿈자리가 뒤숭숭한 것도 있고요.”
“그리고?”
“파천마군이 나를 이용한다고 생각하니까 좀 얄미워서요. 내가 그를 위해서 원한도 없는 사람들과 악착같이 싸워야 하나 싶더라고요.”
“아! 그래서 말로 풀어 보려고 한 거구나?”
남궁연은 연적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원해서 하는 일도 아닌데 이왕이면 좋게 끝내고 싶은 건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남궁연이 복잡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정의맹과 유명교의 싸움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십두마병의 숫자를 줄여야 한다.
하지만 그걸 그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그건 파천마군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그에게 너무 가혹한 요구였다.
그때 돌연 사공들이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뒤이어 요란한 굉음과 함께 이두 마차를 싣고 가던 배가 폭발했다.
꽈과광.
검붉은 화염이 노을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