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30
230회.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떻소?
연적하는 파천마군의 잔이 비자 느긋하게 소흥주를 다시 채워 주었다.
그러자 파천마군이 감동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
“이야! 내가 총순찰이 따라 주는 술을 다 마셔 보네.”
“갑자기 왜 보자고 하신 거예요?”
연적하는 괜히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술 마실 때 일 얘기하는 거 아니라고. 일단 다 내려놓고 편하게 마시자꾸나.”
“예, 전에도 그러다가 귀찮은 일을 떠넘기셨죠.”
“떠넘기다니. 그런 섭섭한 말을. 엄연히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은 거래였다. 너에게 죄를 지은 삼장을 내가 정리해 준 걸 잊었느냐?”
“총채주님은 앉은 자리에서 몇 마디 말로 끝냈잖아요. 나는 근 일 년이나 두 발로 강호를 돌아다녔다고요. 거래는 거랜데, 내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거래였죠.”
“대신 천하에 네 이름을 떨치지 않았느냐? 그 일로 녹림에서 네 위상이 달라졌느니라. 녹림칠십이채를 좌우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고마워할 일이지.”
“녹림을 좌우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그런지 고맙지가 않네요.”
“처음에는 다 그런 법이다. 나도 녹림에 익숙해지기까지 십 년이 넘게 걸렸다. 그건 그렇고 외숙이 정주에 살고 있다지? 준비한 일은 잘 끝났느냐?”
“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왔더라고요. 참, 축하금은 잘 받았어요. 사촌 동생이 아주 고마워하더라고요.”
“고맙긴, 그깟 돈 몇 푼이나 한다고.”
파천마군이 손사래를 쳤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 천 냥은 푼돈이나 다름없었다.
때마침 수중에 있는 돈이 천 냥뿐이라 그걸 음풍묘군에게 건넸을 뿐이다.
두 사람은 계례를 소재로 잠시 잡담을 나눴다.
술 한 병을 비우고 난 뒤에야 파천마군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 참. 칠리하촌이 초상집 분위기라지?”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연적하가 씁쓰름한 얼굴로 안주를 집어 먹었다.
외숙의 집에서 칠리하촌은 하루 하고도 반나절 정도 걸리는 거리니 가까운 건 아니다.
그래도 마음만 있다면 부담 없이 오갈 수 있었다.
손님이 필요한 와중에도 남궁세가를 빼놓은 건 정의맹의 상황을 고려해서다.
절반 이상이 죽고, 부상자도 백여 명에 달한다던가.
‘유명교와 싸우기도 전에 이미 끝장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런 때에 남궁세가를 초대할 수는 없었다.
“정의맹 총사라는 놈이 나를 만나고 싶어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모양이더라.”
“총채주님을요?”
“자기들을 도와 달라는 거겠지.”
“그래서 만나 주실 건가요?”
“내가 왜 그 모지리를 만나? 귀찮아서 피해 다니고 있는 중이다.”
“피해 다닌다면서 나랑 만나는 건 막 소문내도 돼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구더기 무섭다고 장을 못 담그더냐?”
“아닌 거 같은데.”
연적하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파천마군을 보았다.
귀찮아서 피해 다닌다는 사람이 자기 행보를 보란 듯 드러 낸다고?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혹시 이미 돕기로 한 건 아니죠?”
“내가? 내가 왜 그 병신 같은 놈들을 돕는단 말이냐? 이참에 일어나지 못하게 짓밟는다면 모를까.”
말하면서 파천마군은 슬쩍 연적하의 눈치를 살폈다.
“마음대로 하세요. 돕는 밟든 저는 신경 안 쓰니까.”
“그럼 안 되지. 녹림의 떠오르는 별이 그러면 안 되느니라.”
“웬 별요?”
“요즘 젊은 녹림도들 사이에서 너를 따라 하는 게 유행이라는 건 알고 있느냐?”
“따라 할 게 뭐가 있기나 해요?”
“너 때문에 박도에서 검으로 갈아 타는 놈들이 많다. 그뿐인 줄 아느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주루에 가면 꼭 소흥주만 찾는다더라.”
“아니, 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다닌다고요? 절대 아닌데?”
“허허. 자기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느냐? 난 내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모른다.”
“…….”
파천마군의 말에 연적하는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 자신도 창고에서 나온 뒤로는 단 한 번도 거울을 본 적이 없다.
어쩌다가 세안을 할 때 물에 어른거리는 형체를 본 게 전부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녹림에서 너의 위상은 나 다음이다. 다 늙은 내가 새파랗게 어린놈들과 어울려 싸움박질이나 하고 다닐 수는 없지 않느냐?”
연적하가 파천마군을 빤히 보았다.
무림인도 세월은 피해 갈 수 없는 법.
머리가 하얗게 센 파천마군을 보고 있으려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서 대신 밟아 달라고요? 도우라고요?”
“유명교에서 너의 목에 포상금을 걸었다. 그건 우리 녹림이 안중에 없다는 뜻이지. 유명교가 그렇게 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천하인들이 우리를 비웃을 게다.”
“그러니까 저를 위해서 유명교와 전쟁을 벌이시겠다? 에이,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 봐요 또 뭐가 있는지. 말해 주지 않으면 난 그냥 객점으로 갈 거예요.”
“험, 험. 물론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것도 있다. 이번에 녹림이 정의맹을 도와주면, 칠파의 뇌옥에 갇혀 있던 사파 고수들도 풀려나게 될 게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칠파 놈들은 무공이 뛰어난 사파 고수를 잡아 뇌옥에 가두곤 한다. 천하의 안녕 어쩌고 하지만 실상은 무공 비급을 빼앗기 위해서지. 이번에 그들을 풀어 주겠다고 하더구나.”
“와아! 그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본래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하는 법이니라.”
“에이, 듣고 보니 내 목에 걸린 포상금은 아무것도 아니네요. 사파 고수들을 풀어 준다니까 그러는 거죠? 맞죠?”
“다른 사람들은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너와 녹림의 체면이 전부다. 재주가 부족해서 잡혀간 놈들이야 죽건 말건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다.”
파천마군이 뜨거운 눈빛으로 열변을 토했다.
연적하는 그의 눈빛과 표정에 감동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천마군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생각해 주다니!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연적하가 넘어오자 파천마군이 푸근한 미소로 답했다.
“일단 녹림을 이끌고 칠리하촌으로 가거라. 그럼 칠파에서 사파 고수들을 방면할 게다.”
역시나 파천마군의 관심은 사파 고수들의 방면에 있었다.
“칠리하촌으로 가라고요? 녹림을 데리고 정의맹에 들어가라는 거네요?”
“그런 셈이지. 어차피 신기수사의 지휘 아래 싸워야 할 테니까. 열심히 싸우지 않아도 된다. 무리하지 말고 그냥 싸우는 척만 해라.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모르겠는데요? 도우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신기수사가 녹림이 흥하게 내버려 둘 것 같으냐? 분명히 자기들만큼이나 우리도 죽어 나가기를 바랄 게다. 그러니 지혜롭게 처신하라는 말이다.”
“아 복잡하네요.”
“그럼 사파와 정파가 한자리에 모이는데 간단할 줄 알았느냐?”
딱히 할 말이 없던 연적하는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쳇! 녹림도를 이끌고 ‘정의맹’으로 들어가라니. 생각만 해도 얼굴이 간지럽네요. 도둑들에게 ‘정의’가 어울리기나 하나.”
가만히 듣고 있던 파천마군의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흘러 나왔다.
“과연!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녹림이 정의맹으로 가면 안 되지. 암. 말 잘했다.”
정의맹과 녹림이 따로 움직이는 것이면 모를까?
녹림이 신기수사의 지휘를 받아야 하니 정의맹 조직에 속하는 셈이다.
녹림이 정의맹에 녹아 들어가는 모양새인 것이다.
녹림에게 정의라니?
개가 웃을 일이 아닌가 말이다.
파천마군은 십이마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귀영자군은 이리 오거라.”
“부르셨습니까?”
귀영자군이 바람처럼 달려와 탁자 끝에 섰다.
“너 신기수사에게 가서 녹림의 지원을 바란다면 이름부터 바꾸라 해라. 녹림은 정의맹이라는 이름 아래 들어갈 수가 없다고. 알겠느냐?”
“예.”
파천마군이 가 보라는 듯 손을 까닥이자 귀영자군은 유령처럼 사라졌다.
“네 덕분에 망신을 면하게 되었구나. 역시 총순찰답다. 내가 인복은 있다니까. 허허허.”
파천마군은 흡족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사파 고수들의 방면에 정신이 팔려 큰 망신을 자초할 뻔했다.
사파와 정파의 연합이니 그에 걸맞은 명칭이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녹림이 정의맹에 굴복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
칠리하촌.
정의맹 정주 지부.
유시 말(오후 7시).
칠파이문과 오대세가 대표들은 총사 신기수사 제갈승운의 소집 요청에 회의실로 모였다.
신임 맹주 무극상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처음에는 정주의 방파들이 자파로 돌아가더니, 요즘은 하남성의 방파들까지 빠져나가고 있다.
처음 칠리하촌에 왔을 때와 달리 지금 남아 있는 인원은 삼백팔십 명에 불과했다.
이런 식이라면 정의맹의 몰락은 시간문제다.
남경을 떠날 때만 해도 승리의 꿈에 부풀었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맹주가 된 뒤로 하루하루 더 나빠지니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지경이다.
무극상인은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제갈승운이 군웅들의 앞으로 나섰다.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모처럼 좋은 소식이라는 말에 다 죽어가던 군웅들의 눈이 반짝였다.
“녹림에서 고수들을 보내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정사파 연합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군웅들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오오! 드디어!”
“총사! 수고하셨소.”
“파천마군이 큰 결단을 내렸구먼.”
제갈승운은 군웅들의 환호가 가라앉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한차례 소란이 지나간 뒤에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정의맹이라는 명칭을 다른 것으로 바꾸라고 합니다. 녹림이 정의맹 아래로 들어간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답니다.”
“정사파 연합이니 무리한 요구는 아니구려.”
“그까짓 이름이 뭐라고 바꿔 줍시다.”
“흥! 도적들이 쥐꼬리만 한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 하는 모양인데 들어 줍시다.”
“오히려 우리가 바꾸자고 했어야 하는 거 아니오? 도적들에게 정의맹이라니 가당치도 않소.”
칠파이문과 오대세가 가주들은 정의맹이라는 명칭에 고집하지 않았다.
공멸하느냐 마느냐 하는 마당이니 당연하다.
뜻밖에도 군웅들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자 제갈승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체면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라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게 웬일인지 모르겠다.
“해서 정사파의 연합에 어울릴 만한 명칭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차피 유명교를 섬멸하면 사라질 연합이니 큰 의미는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천지맹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늘과 땅처럼 모든 것을 다 포용하자’는 뜻에서 지어 봤습니다만.”
맹주인 무극상인이 마음에 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과 땅이라. 정사파를 지칭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듭니다.”
맹주의 의미심장한 말에 군웅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천(天)이 정파를 뜻하는 거라면 지(地)는 사파임에 틀림없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하늘과 땅처럼 모든 걸 포용한다’지만, 속으로는 전혀 다른 뜻이 담겨 있다.
하늘과 땅처럼 둘의 간극(間隙)이 크다.
어디 그뿐이랴.
정파가 하늘이면 사파는 땅인 것이다.
“실로 정사파 연합에 어울리는 이름이구려.”
“적당한 것 같소.”
“어차피 오래가지도 않을 이름 대충 그렇게 하십시다.”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떻소? 어떤 이름이라도 좋으니 불러들이기나 합시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군웅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가만히 군웅들의 반응을 지켜보던 제갈승운이 마무리를 했다.
“다른 의견이 없으시면 정사파 연합의 이름은 천지맹으로 결정하겠습니다.”
뒤늦게 소림사 장문인 무법선사가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름을 정해도 되는 거요? 그래도 정사파 연합인데 녹림의 의견을 들어 봐야 하는 건 아니오?”
“그들이 다른 이름으로 바꿔 달라고 요청한 것이니 따를 것입니다. 혹시라도 불만이 있다면 그때 다시 조율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법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름으로 바꿔 달라고 했다면 이쪽에서 정하는 게 이치에 맞기도 했다.
수백 년 전통의 ‘정의맹’이 사라진다니 안타깝지만, 그 이름을 끌어안고 죽는 것보다는 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