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57
257회.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칠리하촌.
동편 산기슭의 작은 집.
마당에 모여 웃고 떠들던 녹림의 채주와 부채주 들이 하나둘씩 떠났다.
흡사 장터를 방불케 했던 마당이 텅 비자 구천노도 심통은 방으로 들어갔다.
탁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연적하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얘기가 그렇게 길어?”
“채주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도 오랜만이니까요. 그런데 공자님.”
“왜?”
“아까는 왜 그렇게 총사를 몰아세우셨습니까?”
“그렇게 느껴졌어?”
“예. 채주들도 총사에게 무슨 원한이 있으시냐고 궁금해하는 눈치였습니다.”
“원한은 무슨. 하여튼 도둑놈들 과장하는 거 보면. 아휴!”
연적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총사가 그렇게 부탁하는데도 굳이 채주와 부채주 들까지 불러 모아 망신을 주셨잖습니까. 솔직히 말씀해 보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뭐, 개인적으로 그가 싫어.”
“왜요? 지금까지 공자님과 총사가 따로 만난 적이 없지 않습니까?”
“꼭 그래야 감정이 쌓이나? 하는 짓만 봐도 기분 나쁠 수 있지.”
“그자가 무슨 짓을 했는데요?”
“소문도 못 들었어? 질투심 때문에 연 누님이 하는 말마다 물고 늘어진다잖아. 남궁세가에 하는 짓을 봐도 밉상이고. 무림 세가 자리를 뺏기 위해 작정하고 남궁세가만 괴롭힌다고들 하던데.”
“흐흐흐. 역시 뭔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
“그러니까 남궁세가의 적은 공자님의 적이라 이 말씀 아니십니까?”
“백부님인데 당연한 거 아냐?”
“아, 예. 그래도 오늘 총사를 그렇게 물 먹였으니 앞으로 좀 조심해야 할 겁니다.”
“왜? 총사가 등에 칼이라도 꽂을까 봐?”
“정의맹 시절에 주작대를 재구성해 주지 않은 것을 두고 말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전시에 총사에게 찍히면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불이익? 웃기고 있어. 누가 그런 거에 당한대? 난 공평하지 않으면 꼼짝도 하지 않을 거야.”
“공자님이야 그렇겠지만 주작대를 사지로 밀어 넣으면요? 남궁세가는 무림 세가라서 총사의 명을 대놓고 거부하지 못할 겁니다.”
“연 누님이 있으니까 쉽게 끌려다니지는 않을 거야.”
“쩝, 그렇기도 하네요. 그나저나 어젯밤 연씨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심통은 연씨 직계들이 구백 자 법문 중에 몇 자나 외웠는지 궁금했다.
“백 자.”
“백 자요? 흐흐. 직계라고 해도 오봉십걸들과 별 차이가 없네요?”
심통의 얼굴에 자부심이 깃들었다.
연씨 직계들도 백 자밖에 외우지 못했는데 자신은 삼백 자나 외워서다.
“그러게. 나도 조금 놀랐어. 편법을 동원할 것 같아서 구전이니까 적어 두지 말라고까지 했는데.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아.”
누군가 이백 자, 삼백 자를 외워서 돌려 볼까 봐 적지도 못하게 했다.
하지만 셋 모두 백 자밖에 외우지 못했으니 괜한 짓을 한 셈이다.
“그런데 공자님은 정말 구천여일진경의 구결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실 겁니까?”
“응. 내 생각에는 이게 소실된 것도 구전이라 그랬던 것 같아. 후손들이 외우는 글자가 조금씩 줄어들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만 거지.”
“그럴수록 더 글로 남겨야 하지 않습니까?”
“난 이 구천여일진경이 거울 안에 있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건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되는 심법인지도 몰라. 마물이나 심법이나 오십보백보라고나 할까?”
“심법이 사악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세상 밖의 것이라는 뜻이야. 내 후손 중에 정신 나간 놈이 도를 깨우쳐 구백 자 연공에 성공했다고 생각해 봐. 재앙이 될 거라고. 그놈은 마물이 되는 거야. 흉측하게 생겨야 마물은 아니잖아.”
“정신 나간 사람이 도를 깨우칠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모르지. 사람이 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잖아. 구천현녀는 책으로 전해 줄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어. 굳이 거울 속 세상에서만 읽을 수 있게 만들었지. 내 짐작이 맞을 거야.”
“정말 거울 속에서, 험, 험, 아닙니다.”
심통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거울 속에서 살았느니, 구천현녀에게 배웠느니 하는 소리가 영 미덥지 않아서다.
연적하가 의아한 눈으로 보자 심통은 얼른 말을 돌렸다.
“공자님이 그렇게 결정하셨다니 그래야겠지요. 그런데 책으로 만들었다가 분실한다 생각하면 공자님 말씀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칠파이문이나 오대세가처럼 제자가 많아서 지킬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그렇다니까. 내가 늙어 죽으면 천고에 다시없는 비급을 누가 지킬 거냐 이거야. 그날로 내 집안은 싹 털리거나 멸문당하고 말 거야.”
“거기까지 생각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말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든 거야. 역시 구전이 최선인 것 같아. 딱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감당하게 하는 거지. 하늘이 연씨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공자님 말씀을 들으니 왠지 마음이 짠합니다.”
“그런 걸 감동이라고 하는 거야. 내가 머리가 좋아서 구백 자를 외운 줄 알아? 다 그걸 감당할 능력이 되니까 하늘이 허락한 거라고.”
“예, 공자님 머리가 뛰어나지 않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어?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내가 겸손해서 그렇게 말한 건데, 뭐? 머리가 나빠?”
“어이쿠! 무슨 그런 말씀을. 머리가 나쁘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뛰어나지 않다고 했지요. 제갈승운이나 남궁소저 정도는 돼야 뛰어나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은근슬쩍 말 바꾸는 거 봐. 하여간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간다니까.”
“미, 미꾸라지라니요. 그나저나 연 씨들이 백 자나 외웠으니 이제 앞가림들은 좀 하겠습니다?”
“그러기를 바라야지. 그래도 연씨인데 맥이 끊어지면 안 되잖아.”
연적하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씨 형제들과 큰 어머니를 떠올리면 애증이라는 감정이 차오른다.
그건 구천기를 채워 주는 공허함과 달리, 심장을 갉아먹는 느낌이다.
***
산서성.
교구현.
풍지산 계곡.
신모의 기대와 달리 청류신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어쩌면 세상 이치를 알아 버린 그녀의 나이가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청류신은 자신이 염매(透魅)의 재료가 된다는 것을 알고 일찍 체념해 버렸다.
계곡물에 잠긴 지 사흘 만의 일이었다.
짤랑. 짤랑. 짤랑.
……툭.툭.툭.
어느 순간부터 가느다란 대롱 위의 방울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쇠로 만든 방울이 부대끼는데도 마치 돌맹이가 부닥치는 것 같다.
신모가 가볍게 얼굴을 찡그렸다.
무려 이십 년이나 공들여 키운 제물인데 고작 사흘 만에 끝나다니?
그래도 실패는 아니다.
실패했다면 방울 소리가 계속해서 났을 것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금황자(金晃子, 방울)에 영기가 들어찼음을 의미한다.
이 금황자가 다시 소리를 내려면 금황자 속에 갇힌 영기와 자신이 소통해야 한다.
신모는 방울을 눈앞에서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툭.툭.툭.
역시나 영기로 가득한 둔탁한 소리다.
“청류신아 내가 곧 불러 주마.”
예상보다 빨리 죽어 버린 탓에 어떤 염매가 만들어졌을지 궁금했다.
잠시 후 신모가 물에서 걸어 나왔다.
물 밖으로 나오자 신모의 옷과 몸은 금세 말랐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것을 보면 그녀의 공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신모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 미명이다.
칠흑처럼 어두웠지만 도리어 대법을 행하기에는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풍지산 위로 날듯이 달려 올라갔다.
정상에 조금 못 미쳐 거대한 바위 투성이의 협곡이 나타났다.
미리 보아 둔 장소인지 그녀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거침없이 걷던 신모는 깎은 듯한 바위 벽 앞에 도착해서야 멈춰 섰다.
주변에 숲이 없어서 그런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한순간 바람 소리마저 잠잠해졌다.
하늘이 가르쳐 준 ‘고요한 곳’으로 이보다 더 좋은 곳도 없으리라.
신모는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 큰 소리로 ‘육명진언’을 외쳤다.
“옴 나넨 카야 네바타 데 훔!”
그리고 잠시 후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옴 나넨 카야 네바타 데 훔.”
그러기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과거 하늘이 가르쳐 준 신의 방울을 만드는 방법은 여기까지였다.
마지막으로 속삭이듯 육명진언을 외운 신모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제는 방울이 화답할 차례다.
휘이잉-.
멈췄던 바람이 다시 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방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방울을 흔들어 보고 싶은 욕구를 꾹 눌러 참았다.
흔들어 소리를 확인하는 것은 나중이고, 그 음성을 듣는 것이 먼저였다.
근 한 식경(약 30분)이나 지났을까?
신모가 지쳐서 포기하려고 하는 순간 허공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니. 부르셨어요?
그것은 청류신의 음성이었다.
신모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혹시라도 잡귀가 붙었으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제대로 된 염매가 만들어진 모양이다.
그제야 신모는 눈앞으로 방울을 들어 올렸다.
딸랑 딸랑…….
조금만 움직여도 방울에서 맑은 소리가 울려 나왔다.
마치 풍지산 계곡을 날아다니는 산새의 지저귐처럼 선명하고 깨끗했다.
“그래, 류신아. 어미다. 너는 혹시 나를 원망하느냐?”
-아니요. 어머니 덕분에 내세의 비밀을 알았는데, 원망할 리가 있겠어요? 오호호홋!
어둠 속에서 청류신의 웃음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딸랑! 딸랑! 딸랑!
그녀의 웃음소리에 맞춰 방울 소리도 점점 커져 갔다.
날뛰는 방울을 힘주어 붙드느라 신모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천두마왕인 그녀도 집중해서 조절해야 할 정도로 강력한 염매였다.
힘든 것과는 별개로 신모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는 소천이 말한 더 큰 비밀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다.
***
천지맹.
등용각(登龍閣).
거대한 회의실 안에 당금 무림을 대표하는 정사파 고수들이 모였다.
칠파이문과 오대세가의 수장, 그리고 일곱 개 대의 대주들과 육마군들이다.
화산파 장문인이자 맹주인 무극상인이 군웅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 여러분들을 모신 것은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칠리하촌에는 유명교의 간자가 몇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백마사에 심어 둔 간자가 있지요. 그런데 그들의 보고에 따르면 최근 유명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군웅들은 계속 경청하겠다는 듯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전에 없이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면 아무래도 저들의 교주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군웅들이 술렁거렸다.
고작 십두마병만으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교주까지 나타나다니?
성질 급한 무극문 문주 풍뢰도 장강호가 큰 소리로 물었다.
“정말 천두마왕이 나타난 게 사실이오? 교주를 직접 본 사람이라도 있소?”
“직접 목격한 사람은 아직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백두마군들이 일사 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누군가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교주가 나타났다? 본래 저들도 집단 운영체제로 지금까지 오지 않았소? 그것의 연장이 아니라는 증거라도 있는거요?”
장강호의 예리한 질문에 무극상인은 총사인 신기수사 제갈승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그가 직접 설명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다.
결국 제갈승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 한 달간 어느 교당에도 속하지 않은 절정고수들이 백두마군들과 만났다고 합니다. 백두마군들은 그들을 정중하게 대했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들을 교주의 친위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장강호는 물론 어느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교주의 친위대일 가능성이 높아서다.
“그러나 다행히 아직 교주는 백마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이 유명교를 각개격파할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갈승운은 ‘각개격파’라는 말에 힘을 실었다.
다분히 ‘호두산 왕호산장’을 염두에 두고 한 소리다.
‘교주가 나타나기 전에 하나라도 세력을 줄이자’는 분위기로 몰아가기 위한 밑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