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56
256회. 안정과 복수
문득 구천노도 심통이 물었다.
“그런데 오늘 밤 연씨들이 안 올 모양입니다?”
“그러게. 꽤 늦었는데 연락이 없네? 함께 오라고 했더니 시간이 안 맞았나?”
“그래도 그렇지. 못 오면 못 온다고 기별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연 공자님이 큰맘 먹고 가르쳐 준다고 한 건데.”
“냅둬. 내일이라도 오겠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하더니 그때 마당에서 인기척이 났다.
“적하야.”
연설주의 음성이었다.
“공자님, 저는 술 한잔 걸치고 오겠습니다.”
심통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유등을 켜고는 밖으로 나갔다.
연씨들 만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자리를 비켜 준 것이다.
잠시 후 연무백과 연승백, 연설주가 방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은 연무백이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고맙다. 설주를 통해 이야기 듣고 많이 놀랐다. 내가 먼 곳에 다녀오느라 이제야 왔다.”
연설주가 한마디 보탰다.
“새언니가 정주까지 찾아와서 만나고 왔대. 그래도 늦게라도 왔으니 다행이지. 참, 적하 넌 새언니 한 번도 못 봤지? 오라버니, 나중에 새 언니도 좀 소개시켜 주고 그래.”
“어? 어…….”
연무백은 어색한 얼굴로 얼버무렸다.
연적하가 양가장의 원수인지라 처에게 소개하기 곤란해서다.
연무백과 연설주는 연적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썼다.
그와 달리 둘째인 연승백은 창백한 얼굴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연적하는 오히려 그런 연승백이 더 솔직해 보였다.
“다 떠들었어? 언제 시작할까?”
사적인 일에 관심 없다는 듯한 연적하의 태도에 연무백은 미미하게 한숨을 흘렸다.
연무백이 동생들과 눈을 맞춘 뒤에 대표로 답했다.
“지금 하자.”
“연씨 선조들이 잃어버린 것은 구천여일진경이라는 내공심법이야. 구백 자로 된 것인데 외울 수 있는 만큼만 외워 봐. 따로 적어 둘 생각은 하지도 말고.”
“알겠다.”
“응.”
“…….”
연씨들이 숨을 죽이고 집중했다.
칙칙하던 연승백의 눈빛도 이 순간만큼은 강렬하게 빛났다.
“참고로 이 법문은 욕심낸다고 외울 수 있는 게 아니야. 뭐, 금방 알게 되겠지만. 그리고 경고하는데 돌아가서 글로 옮기지 마. 만에 하나라도 글로 적은 게 드러나면 내공을 폐할 거야.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마. 나도 외우기만 했지 적어 두지는 않았으니까.”
연씨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구전(口傳)으로만 전하는 것도 있으니 하지 말라면 하지 않을 생각이다.
***
다음 날 아침.
대충 식사를 끝낸 연적하와 구천노도 심통이 마루에 걸터앉았다.
“공자님, 연씨들은 얼마나 외우던가요?”
“아, 그거?”
연적하가 답하려는 순간이다.
마당을 두른 낮은 울타리로 누군가 다가와 점잖게 말했다.
“계십니까?”
연적하와 심통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천지맹의 총사 신기수사 제갈승운이 머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심통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대단하신 천지맹의 총사가 아침부터 무슨 일이오?”
“선배님과 연 공자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든 말든 알아서 하시구려.”
“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제갈승운은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너스레를 떨었다.
“어이쿠! 녹림의 총순찰께서 이런 곳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왜 숙소 요청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맹에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입에 발린 소리다.
천지맹에 지금까지 빈자리가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연적하를 천지맹에 들이려면 칠파이문과 오대세가 중 일부를 내보내야 한다.
현재 약해진 제갈승운의 입지에서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더구나 천지맹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은 칠파이문과 오대세가다. 녹림인 연적하와 심통이 그 속에 있으면 인질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경험 많은 심통이 삐딱한 어조로 말했다.
“거 아침부터 객쩍은 소리 그만하고, 무슨 일로 왔는지나 말하시오.”
“어제 낮에 있었던 일로 찾아왔습니다. 기찰대의 조장들이 실수를 했더군요. 조장들에게는 제가 따끔하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연 공자께…….”
“잠깐.”
제갈승운의 말을 연적하가 끊었다.
“예?”
“그러니까 잘못했다고 사과하려고 온 거죠?”
“예, 그렇습니다. 조장들이 한 행동은…….”
“잠깐.”
연적하는 제갈승운이 본론으로 들어가려고만 하면 끊었다.
제갈승운은 의아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사과하러 오라고 해 놓고 왜 자꾸 사과를 못 하게 막는지 모르겠다.
“심 노인.”
“예?”
“지금 가서 채주와 부채주들 싹 불러 모아. 총사가 녹림에 잘못을 빌러 왔으니까 와서 구경하라고 해.”
“예.”
심통이 히죽히죽 웃으며 제갈승운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제갈승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조용히 덮고 넘어가려 했는데 이렇게 되면 자신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고 만다.
“연 공자, 잘못을 한 것은 조장들입니다. 나는 단지 책임자로서 연 공자를 위로하기 위해 온 것인데…….”
‘그런 나를 왜 구경거리로 만들려 하느냐?’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너무 수치스러워서다.
연적하가 제갈승운을 빤히 보며 말했다.
“그래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시겠다고요? 알았어요. 채주들 모이면 바로 짐 챙겨 뜨라고 할게요.”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연 공자와 심 선배에게 사과하러 왔으니 우리 선에서 잘 마무리 지었으면 해서 말입니다. 천지맹의 총사인 저의 입장도 헤아려 주십시오.”
“천지맹의 총사가 직접 녹림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고 시정하는 게 어때서요? 그 늙은이들이 한 짓은 나와 심 노인뿐 아니라, 녹림을 무시한 행동이잖아요. 그러니까 채주와 부채주 들도 잘못이 바로 잡히는 걸 봐야죠.”
청산유수 같은 연적하의 말에 제갈승운은 한순간 할 말을 잃었다.
고민하던 제갈승운은 노골적으로 부탁했다.
“연 공자, 총사인 저의 체면을 좀 세워 주십시오. 그렇게 해 주신다면 꼭 보답하겠습니다.”
“보답? 어떻게 보답한다는 거예요?”
제갈승운이 답답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지금과 같은 전시(戰時)에 총사가 보답할 만한 거라면 뻔하지 않은가?
‘이놈아! 뒤를 봐주겠다는 말이다!’
그런 건 눈치껏 알아야 하는데 저 애송이는 아직 짐작도 못한 얼굴이다.
속으로 끙끙 앓던 제갈승운은 최대한 에둘러 설명했다.
“여러 가지 편의를 봐 드리겠다는 말씀입니다.”
“됐어요. 총사가 객잔 주인도 아닌데 편의를 봐줄 게 뭐 있다고. 그냥 깔끔하게 채주와 부채주 들 앞에서 사과나 하고 돌아가요.”
“연 공자.”
“왜요?”
“제가 그렇게까지 부탁하는데, 끝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사과를 받으셔야겠습니까?”
“지금 따지는 거예요? 그렇게 하기 싫음 그냥 가요. 나도 구질구질한 생활에 지쳐서 얼른 떠나고 싶으니까. 그래도 내가 개봉에 객잔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여기서 무슨 개고생인지 모르겠네. 심 노인 오면 바로 짐 싸라 그래야겠다.”
말과 함께 연적하가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이를 악물고 서 있던 제갈승운이 짧게 말했다.
“하겠습니다.”
그제야 연적하는 돌아서 철푸덕 앉았다.
사람들을 부르러 간 심통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가부좌 자세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던 연적하가 조금씩 흐트러졌다.
반 각(15분)쯤 지났을까?
“아이고, 왜 이렇게 허리가 결리지?”
말과 함께 연적하가 옆으로 비스듬히 누웠다.
그의 풀어진 모습에 모멸감을 느낀 제갈승운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천지맹의 총사를 세워 두고 자빠져 있다니!
울화가 치밀어 올라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잔뜩 굳어 있는 그를 보며 연적하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총사님도 좀 앉지 그래요? 다리가 아플 텐데.”
“……괜찮습니다.”
제갈승운의 음성은 더러운 기분만큼이나 착 가라앉아 있었다.
문득 흐트러진 그의 자세나 권하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왠지 저놈이 주인이고 자신이 종 같은 느낌이다.
두 사람의 자세를 보면 딱 그랬다.
그렇다고 총사인 자신이 그를 따라 마루에 누울 수도 없는 노릇.
‘어떻게 해야 이런 개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가 방법을 찾아내기도 전에 심통과 도적들이 대문으로 들어왔다.
“역시 우리 총순찰님!”
“총사를 종으로 부리시다니. 존경합니다!”
“이게 녹림이다! 씨벌!”
“다 나오라 그래!”
녹림의 채주와 부채주 들은 괜히 흥분해서 한동안 소란을 떨었다.
제갈승운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양 침묵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 줄 사람이 없으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도적들이 모이자 연적하가 느릿하게 상체를 세웠다.
“조용!”
순간 야수처럼 날뛰던 도적들이 입을 다물고 꾸물꾸물 모여들었다.
“우리 천지맹의 총사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니 들어 보자고.”
제갈승운은 연적하의 장악력을 보고 속으로 혀를 휘둘렀다.
귀영자군이 한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연적하는 직책만 총순찰이 아니라, 녹림의 실질적인 이인자였다.
‘끙! 그동안 녹림의 정보를 수집한다고 했는데…….’
이런 중대한 변화를 놓쳤다니 전적으로 자신의 실수다.
자책하던 제갈승운은 모든 걸 내려놓기로 했다.
“어제 칠파이문의 기찰대 조장들이 총순찰님과 심 선배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사실 확인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처리하려 했지요. 천지맹의 총사로서 큰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용서해 주십시오. 관련자가 녹림이라 해서 편견을 가지고 판단하는 일이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도적들의 시선이 연적하에게로 향했다.
“다들 들었지? 기찰대는 누구든 녹림이라고 무시하면 들이박아. 우리가 유명교와 싸우려고 왔지 무시당하려고 왔냐? 안 그래?”
“옳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형제들! 정파 놈들에게 당하지 맙시다!”
왁자지껄 떠드는 도적들을 보고 있던 연적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총사님, 수고했어요. 다음에 또 봐요.”
그는 해맑은 얼굴로 인사를 한 뒤에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제갈승운은 시장터처럼 변한 마당에서 재빨리 빠져나갔다.
***
천지맹.
현천각.
집무실로 돌아온 제갈승운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조금 전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지만 지금은 연적하에 대한 복수보다 칠리하촌을 안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적과 싸우지 않으니 내부가 소란스러운 거다.’
칠리하촌에 정사파가 하는 일 없이 눌러앉아 있다 보니 충돌은 일상다반사였다.
제갈승운은 벽에 걸려 있는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천지맹이 낙양의 백마사로 진격하는 것은 자살과도 같다.
‘다른 곳이라도 쳐야 한다.’
때마침 한 지점이 눈에 들어왔다.
유명교는 정의맹처럼 마을을 거점지로 삼지 못했다.
백마사가 좁다 보니 다른 곳으로 옮긴 유명교도들도 적지 않았다.
호두산(虎头山).
백마사에서 한 시진(2시간) 정도 거리의 산이다.
최근 호두산 왕호산장에 백두마군 하나와 십두마병 십여 명이 이주했다.
뭔가를 생각하던 제갈승운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후후. 연적하. 호두산에 너의 뼈를 묻어야겠다.’
‘칠리하촌의 안정’과 ‘복수’를 한 번에 해결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뻥 뚫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