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59
259회. 최고의 복수
하남성.
정주.
칠리하촌.
천지맹 의천각.
오시 초(오전 11시).
전각 중앙의 대청에 두 남녀가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청운검 남궁천과 화용독심 남궁연이다.
의천각은 정의맹 시절부터 남궁세가가 사용하는 전각인지라 외인은 보이지 않았다.
출전을 사흘 앞두고 모두 연무장에서 살다시피 해 남궁세가 사람도 없었다.
“요즘 적하 옆에 여우 하나가 착 붙어 다니는 것 같더라. 흑수선이라고 하던가?”
“…….”
남궁연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흑수선 석려시는 칠리하촌에 들어온 뒤로 연적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요즘 칠파이문과 오대세가 후기지수들은 모이면 그 얘기만 한다. 흑수선이 적하를 노리고 있다나 뭐라나. 흑수선 때문에 적하가 싫다는 놈들도 많고.”
“오라버니도 흑수선이 마음에 들어요?”
“당연하지. 예쁜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도 있냐?”
“의외로 속물이셨네요.”
“속물이라니? 자연의 법칙이지. 여자도 잘생긴 남자 좋아하잖아.”
“모든 여자가 그런 건 아니에요.”
남궁연의 지적에 남궁천은 얼른 말을 돌렸다.
“연아 너처럼 머리 좋은 것만 재능인 줄 아냐? 예쁘고 잘생긴 것도 재능이거든? 재능 충만한 후배를 보고 흡족해하는 건 죄가 아니야.”
“누가 죄라고 했어요? 저는 단지 속물이라고 했을 뿐이에요.”
“허! 천지맹의 후기지수들이 죄다 속물이라 이거냐? 아름다운 꽃을 보고 기분이 좋으면 속물인 거야?”
“여자는 꽃이 아니니까요.”
“너 흑수선 싫어하지?”
남궁천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자 남궁연은 한순간 침묵했다.
석려시는 녹림에 속했지만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저 부친이 총채주라 녹림의 일원으로 여겨지고 있을 뿐이다.
마치 연적하가 풍연초에게 구함을 받고 녹림도가 된 것처럼.
‘사파의 꽃’ 또는 ‘강북제일미녀’라 불리며 세상 남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사내들과 염문을 일으킨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흑수선과 연적하는 닮은 점이 많았다.
그런 사람을 왜 싫어한단 말인가?
문득 남궁연은 ‘자신이 흑수선의 좋은 점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마치 싫어하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것처럼 말이다.
남궁천이 놀리듯 말했다.
“표정을 보니까 딱 싫어하는 거네. 내 말 맞지? 넌 흑수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분명해.”
“단정 짓지 마세요.”
“연아야, 그렇게 속 보이는 얼굴로 아니라고 말하지 마. 나는 네가 왜 흑수선을 싫어하는지 알거든?”
순간 남궁연은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오라비의 눈에 보일 정도로 사치스러운 감정을 드러냈다고?’
그럴 리가.
그녀는 사실이 아니기를 빌었다.
“내가 왜 그녀를 싫어하는데요?”
“여자들은 이상하게 예쁜 여자를 싫어하더라고. 그걸 모르는 남자는 없어. 그래서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하잖아. 연아 너도 여자인 이상 그 법칙을 벗어나지 못해.”
남궁천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남궁연을 보았다.
남궁연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
“왜? 설마 너는 아니라고 할 셈이야?”
“그래서 진 소저보다 흑수선이 좋아요?”
“…….”
갑자기 진설하가 튀어나오자 남궁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창인문의 진설하와는 연적하와 함께 녹림산채를 정리하러 다닐 때 알게 됐다.
일 년 정도 함께 유랑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음이 기울었던가 보다.
천지맹에서 다시 그녀를 만났을 때 어찌나 반갑던지.
요즘은 청룡대에 있는 그녀를 우연을 가장해 계속 만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뭘요?”
남궁연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짓궂게 오라비가 그의 입으로 실토하게 만들었다.
“내가, 험, 험, 진 소저를 좋아하는 거.”
“나비가 꽃 주위를 빙빙 맴도는데 그걸 어떻게 모를 수 있어요?”
“그렇게 눈에 띄었다고?”
“우연도 한두 번이죠. 그렇게 대놓고 청룡대 주위를 맴돌면서 모르기를 바라요? 오라버니처럼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사람이?”
“진 소저도 알까?”
“글쎄요. 둔한 여자가 아니라면 알고도 남을 텐데, 진 소저는 어떠려나?”
“…….”
남궁천이 심각한 얼굴로 남궁연의 입을 주목했다.
마치 그녀의 입에서 길흉화복이 쏟아져 나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에서 오라버니를 싫어할 여자는 없을 거예요.”
“다른 여자들은 관심 없어. 진 소저는?”
“진 소저가 남자였다면 오라버니를 싫어했을 거예요.”
“왜?”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도 오라버니를 좋아할 테니까. 자신감을 좀 가져 봐요, 오라버니.”
순간 남궁천의 입이 귀에 걸렸다.
“험, 험. 무슨 소리! 자신감 하면 또 난데. 내 별호가 청운검이라는 것을 잊었느냐?”
그래 놓고 민망한지 남궁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누가 잡을세라 바쁘게 신발을 꿰어 신고는 연무장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렇게 대여섯 걸음 갔을까?
문득 멈춰 선 남궁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문에 흉사가 있었다고 사랑을 포기하지는 마라. 남궁세가를 위해 네 인생을 바칠 생각도 하지 말고. 그건 나도, 아버지도, 원하지 않으니까. 연아야, 최고의 복수는 행복하게 사는 거다.”
말을 마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멀어져 갔다.
한동안 무덤덤한 얼굴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남궁연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
천지맹을 벗어난 남궁연은 백리향이라는 간판 앞에서 멈춰 섰다.
점심을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기에 반점은 한산했다.
연적하와 흑수선의 단골집이라고 하던가.
문짝과 창문이 새 것인 걸 보니 그간 말끔하게 수리를 끝낸 모양이다.
안쪽을 힐끔 보던 그녀는 동쪽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동쪽으로 들어갈수록 거리에 흉악한 인상의 사내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치 암사자가 초원을 거니는 것처럼 그녀는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다.
몇몇 마두들이 멀리서 그녀의 얼굴에 혹해 다가왔다가 급히 옆길로 샜다.
화용독심 남궁연은 무불통지로만 알려진 게 아니다.
유명교와의 전쟁을 통해 드러난 무위로 인해 일각에서는 십전무후(十全武后)라고까지 불렸다.
그러니 꽃을 보고 꼬였던 벌 떼들이 사방으로 흩어질 수밖에!
마을을 지나자 야산 아래에 허름한 집이 보였다.
거침없던 남궁연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는가 싶더니 한순간 멈췄다.
입술까지 깨물며 망설이던 남궁연은 결국 다시 걸음을 떼어 놓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깔깔거리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울타리 넘어까지 들려왔다.
보나 마나 흑수선이리라.
연적하 앞에서 저렇게 거리낌 없이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남궁연은 대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갔다.
순간 방 안의 웃음소리가 멎었다.
곧이어 구천노도 심통의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밖에 누구요?”
“심 선배. 나예요.”
남궁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콰당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연적하가 맨발로 마당까지 튀어나왔다.
“어이쿠! 누님?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형님은요?”
연적하가 집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늘 그녀와 함께 다니는 남궁천이 보이지 않아서다.
남궁연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꽃구경을 하러 갔어.”
“하하! 남자가 무슨 꽃구경을. 하여튼 재밌는 형님이시라니까.”
급하게 연적하를 뒤따라 나온 심통이 마루에서 공손히 읍을 했다.
“남궁 소저, 어서 오십쇼. 공자님,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맨발로 거기까지 나가십니까?”
연적하가 발을 툭툭 털며 마루로 올라섰다.
“나간 게 아니라 마루에서 떨어진 거야. 마루가 좀 작아야 말이지.”
남궁연은 웃으며 연적하를 따라 마루로 올라섰다.
방에 앉아 있던 흑수선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조심스레 나왔다.
한순간 흑수선과 남궁연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흑수선이 백치미가 느껴지는 미녀라면 남궁연은 정반대인, 극한의 이지적인 미녀다.
“어머, 화용독심 언니 아니세요? 반가워요. 흑수선이라고 해요.”
파천마군의 보호 아래 구김 없이 자란 흑수선은 대뜸 남궁연을 언니라고 불렀다.
“나도 반가워요. 석 소저.”
남궁연의 화답에 흑수선이 입술을 삐죽였다.
“언니, 그냥 흑수선이라고 불러 주세요. 저는 그 이름이 더 마음에 들거든요.”
“그래요.”
남궁연은 급속도로 피곤함을 느꼈다.
오대세가의 엄정한 규율 속에서 자란 그녀는 흑수선처럼 쉽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못한다.
더구나 남궁연은 오랫동안 외부와 담을 쌓고 지내던 사람.
연적하를 만난 뒤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천성은 어쩔 수 없다.
그녀의 안색을 살피던 연적하는 황급히 방으로 이끌었다.
“자자, 누님 안으로 들어가세요.”
인사하다 말고 뒷전으로 밀려난 흑수선이 울상을 지으며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좁은 방 안에 네 명이 마주 앉았다.
혼자서 괜히 실실 웃고 있던 심통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쿠! 내 정신 좀 봐라. 백 늙은이와 점심 약속을 한 걸 깜빡하고 있었네.”
“백 누구?”
연적하가 삐딱한 눈으로 심통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점심 운운하며 빠져나가려는 저의가 영 수상쩍어서다.
“무영신투 백교라고 오봉산채에 있다가 적풍채로 옮겨간 늙은이 있지 않습니까? 그 늙은이가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부득부득 우겨서 말입니다.”
“그 배신자를 아직도 만나?”
백교는 과거 오봉산채에 만수상방이 쳐들어왔을 때 달아난 도적이었다.
“적풍채 채주 성질이 더럽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빌어먹고 있나 보더라고요. 이번에 적풍채와 함께 왔다가 먼발치에서 저를 본 모양입니다. 꼭 한번 대접을 하게 해 달라고 어찌나 조르던지.”
“잔심부름하게 될까 봐 달아나는 건 아니고?”
“전혀 아닙니다. 공자님을 모시는 건 저의 큰 기쁨인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알았어. 그럼 차나 내놓고 가.”
“저어, 공자님. 제가 차를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조금 애매합니다.”
“배신자 만나러 가기 싫다는 소리로 들리네?”
“바로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연적하의 단호한 말에 심통은 버티지 못하고 이내 뜻을 꺾었다.
그가 차를 끓이러 밖으로 나가자 흑수선이 말했다.
“오라버니. 심 선배가 불쌍해요. 잘 대해 주세요.”
친화력 좋은 그녀는 며칠 사이에 연적하를 오라비라 부르고 있었다.
“아니야. 심 노인은 나에게 빚이 많아. 늙어 죽기 전에 받아 내려면 더 부려 먹어야 돼.”
단순한 흑수선은 심통의 빚을 돈으로 생각했다.
“얼마나 빌렸는데요?”
“죽을 때까지 나를 모셔도 갚지 못할 만큼.”
“어머. 노인이 돈 쓸 데가 어디 있다고 그렇게 많은 돈을 빌렸을까?”
남궁연은 웃으며 흑수선과 연적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어리고 예쁜 흑수선을 보고 있으려니 연적하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는 연적하처럼 엉뚱한 구석이 있었다.
심지어 말이 많은 것까지도 닮았다.
혼자 입을 다물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앉은 자리가 불편해졌다.
그렇게 일각(15분)쯤 지났을까?
심통이 차를 내왔을 때, 남궁연은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심통은 차를 내온 뒤에 달아나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져나갔다.
뜨거운 찻잔을 매만지며 일어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남궁연에게 흑수선이 말했다.
“언니, 그거 알아요? 연 오라버니가 글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네요.”
“…….”
“누구냐고 물어도 안 가르쳐 줘요. 흥! 누가 잡아먹나? 언니도 알고 있었어요?”
남궁연은 애써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지도 모르고 찾아왔다니…….
천지가 무너지는 느낌과 함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천고의 기재로 알려진 그녀도 남녀 간의 관계만큼은 어리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