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61
261회. 딱 한마디만 하십쇼
같은 시간.
칠리하촌.
천지맹.
현천각.
총사의 집무실에서 신기수사 제갈승운은 주의 깊게 문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모두 호두산과 교구현으로 가는 삼 대의 지원에 관한 보고서들이다.
삼 대를 보낸다고 결의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동원되는 인원만 현무대 오십이, 주작대와 인대가 이백이십팔로, 도합 이백팔십 명이나 된다.
그 이백팔십 명을 짧게는 칠 일(호두산), 길게는 한 달(교구현) 정도 먹이고 재워야 한다.
그 기간 중 쓰게 될 숙박비와 식품, 약품 등을 마련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출정을 사흘 뒤로 잡은 것도 그래서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번잡한 일 처리를 위해 제갈승운은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으으으!”
한동안 문서를 들여다보던 제갈승운은 뒷목이 뻣뻣해지자 잠시 기지 개를 켰다.
때마침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총사, 안에 계십니까?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목소리를 들으니 찾아온 이는 기찰대 총대주인 소림사의 공지 대사였다.
제갈승운은 읽고 있던 문서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예,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공지 대사는 사양하지 않고 서둘러 마루로 올라섰다.
잠시 후 공지 대사와 제갈승운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무슨 일이신지요?”
“어제 제마대 술사가 도둑맞은 여래신주의 건으로 찾아왔습니다.”
여래신주는 어린아이 손가락 한 마디만 한 크기의 아주 작은 법보였다.
그것에는 항마의 효과가 있어 술사나 무인들 모두가 가지고 싶어 했다.
마물의 외침을 들으면 사지에 힘이 빠지는데 여래신주가 그걸 막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젯밤 강남에서 이름난 술사인 무허산인이 여래신주를 도둑맞았다.
“아, 법보는 찾았습니까?”
“아직 못 찾았습니다. 대신에 범인으로 여겨지는 자를 잡았습니다만…….”
공지 대사가 곤란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범인이 아니라, 범인으로 여겨지는 자를 잡았다고요?”
제갈승운의 지적에 공지 대사가 서둘러 설명했다.
“그가 어제 무허산인의 주위를 배회하는 걸 본 목격자가 있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적풍채의 무영신투 백교입니다.”
적풍채라는 말에 제갈승운은 인상을 찌푸렸다.
연적하에게 당한 일이 떠올라서다.
“대사님, 아시겠지만 녹림과 관계된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로 찾아왔습니다.”
공지 대사가 민망한 얼굴로 수염을 매만졌다.
구천노도 심통과 기찰대 조장들의 충돌로 총사가 봉변을 당한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문제요?”
“백교가 자신이 심통과 막역한 사이라고 해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총사께서 알고 있어야겠다 싶어 찾아왔습니다.”
“…….”
제갈승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둑으로 여겨지는 자를 잡았는데 하필 심통과 관계된 자라니?
“그가 정말 심통과 알고 지내는 게 맞습니까?”
도적들은 워낙 허풍이 심하니 일단 사실 여부부터 가려야 했다.
“오늘 점심때 기루에서 심통과 함께 있었던 것은 확인되었습니다. 합석한 기녀들의 말에 의하면 꽤나 친밀한 사이로 보였다고…….”
“허.”
제갈승운의 입에서 허탈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현행범도 아니고, 의심이 되는 자를 잡아 왔는데 하필이면 심통과 막역한 사이라니.
이쯤 되면 그들과의 악연은 운명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사님, 심통과 연적하는 거의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백교의 일이 심통에게 알려지면 또다시 연적하가 나설 겁니다. 어쩌면 벌써 이리로 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그들이 오기 전에 백교에게 자백을 받으십시오. 자백이 힘들면 최소한 그가 범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라도 확보해 두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대사님과 저는 곤란한 일을 당하게 될 겁니다.”
“하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심란해진 공지 대사는 저도 모르게 염불을 읊조렸다.
무영신투처럼 경험 많은 도둑이 증거를 남겨 두었을지 의문이다.
공지 대사가 굳은 얼굴로 현천각을 떠났다.
제갈승운은 하던 일을 마저 하려고 문서를 들추었다가 신경질적으로 덮었다.
연적하와 심통을 생각하니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다.
“허! 단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구나.”
견원지간보다 더한 정사파가 한 울타리에 있으니 바람 잘 날이 없다.
***
칠리하촌.
동편 산기슭의 작은 집.
툇마루 끝에 아슬아슬하게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 있던 연적하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의 정수리를 뚫어져라 보던 심통과 염라도부 장한위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내가 백교를 먼저 만나 봐야겠어.”
“만나서 무얼 하시게요? 남궁 소저부터 찾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속전속결을 원하는 심통은 곧바로 남궁연에게 부탁했으면 했다.
무공이라면 모를까?
일상생활에서의 연적하는 지극히 평범했기 때문이다.
“심 노인. 사람이 항상 남에게 의존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야. 스스로 헤쳐 나갈 줄도 알아야지. 나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머리가 없지 않습니까.’
심통은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연신 헛기침만 해 댔다.
그런 심통과 달리 장한위는 싱글벙글했다.
연적하와 함께 기찰대를 뒤집어엎을 생각에 어깨까지 들썩거렸다.
“총순찰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래. 가 보자고.”
마침내 연적하가 툇마루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던 적풍채도 적들이 앞다퉈 그의 앞에 섰다.
척 봐도 호가호위(狐假虎威)의 결의가 느껴지는 얼굴들이다.
“훠이! 훠이!”
“물럿거라! 총순찰님 나가신다!”
동네 끝자락이라 거리에 오가는 사람도 없건만 적풍채 도적들은 소란을 떨었다.
***
천지맹.
객청.
천지맹의 내전 무사는 일단 연적하와 심통을 객청으로 안내했다.
곧이어 기찰대 총대주 공지 대사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연 공자,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빈승은 기찰대를 맡고 있는 공지라 합니다.”
“좋은 일로 온 것도 아닌데 소개는 됐고요. 오늘 백교를 잡아가셨다고요?”
“아, 예. 그 일로 찾아오셨군요. 어찌 된 일인지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지 대사는 숨 쉴 틈도 없이 빠르게 백교를 잡아 온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오늘 낮에 유력한 용의자인 그를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가 훔치는 것을 본 증인은 없습니다. 하지만 정황상 그가 범인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가 자주 갔던 장소나, 가깝게 지낸 자들을 조사하고 있으니, 곧 결과가 나올 겁니다.”
“그러니까 추측만으로 그를 잡아 왔다는 거네요?”
“끙!”
공지 대사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결정적인 증인이나 증거가 없어서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다.
“백교가 고약한 늙은이인 건 맞아요. 손버릇도 아주 더럽고. 어쩌면 정말 백교가 훔쳐 갔을지도 몰라요.”
예상과 달리 연적하가 백교를 욕하자 공지 대사의 안색이 밝아졌다.
“예, 그렇습니다. 저희도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게 문제라고요! 치사하고, 도둑질 잘하고, 배신을 밥 먹듯이 한다고 해서! 그를 범인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고요! 그는 그냥 비겁하고, 치사하고, 도둑질 잘하는 늙은이일 뿐이에요!”
“예?”
공지 대사가 멍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백교를 범인인 것처럼 말하면서 그러면 안 된다니?
당최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됐고요. 백교는 지금 어딨어요?”
“그는 기찰대의 뇌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천지맹에는 정의맹 시절부터 사용하던 뇌옥이 있다. 백교는 그곳에 갇혀 있었다.
“그를 만나려면 내가 가야 돼요? 데리고 올래요?”
“혹시나 해서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그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를 데리고 나가려면 총사나 맹주님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당장 그를 데리고 갈 생각은 없어요. 개인적으로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 온 거예요.”
“아, 예. 그러시다면 빈승이 뇌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공지 대사의 얼굴에 처음으로 화색이 돌았다.
연적하의 방문 목적이 그를 만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니 한시름 던 기분이다.
뇌옥은 객청에서 멀지 않았다.
연적하와 심통은 백교가 갇혀 있는 뇌옥 안으로 직접 들어갔다.
“총순찰님!”
초췌한 몰골로 서 있던 백교가 연적하 앞에 오체투지를 했다.
이윽고 그는 고개 들어 연적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전신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빛이 나는 듯했다.
사 년 만에 연적하는 자신이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백교는 연적하의 기세에 눌려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렸다.
심드렁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던 연적하가 물었다.
“훔쳤어? 안 훔쳤어?”
“절대로 제가 훔치지 않았습니다. 믿어 주십쇼! 몸도 이전 같지 않아 도둑질에서 손을 뗀 지 오래됐습니다. 제가 훔쳤으면 사람이 아니라 갭니다. 개.”
“흥! 개가 똥을 끊지. 무영신투가 도둑질에서 손을 뗐다고?”
“정말입니다. 제 부모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쯧! 한심한 늙은이. 그 나이 되도록 부모님 이름을 팔아먹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
연적하의 질타에 백교는 감히 얼굴을 들지 못했다.
“어제 기루에서 심노인에게 술을 사 줬다면서?”
“예.”
“적풍채의 채주는 재물을 잘 안 나눈다고 들었는데, 그 돈은 어디서 난 거야?”
“그게, 저…….”
“훔친 거 맞지?”
“적풍채에서의 수입만으로는 먹고 살기가 빠듯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술값이 부족해서 훔친 거겠지. 그래 놓고 뭐? 도둑질을 끊어?”
“그래도 정말 법보에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 줄줄 새어 나오는데 지금 그걸 믿으라는 거야?”
“…….”
백교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개처럼 바닥에 엎드려 있는 백교를 향해 심통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백교. 딱 한 번만 묻겠다. 잘 생각하고 대답해라. 네가 법보를 훔쳤느냐?”
점심때와 달라진 심통의 말투에 백교는 고개 들어 심통을 힐끔 보았다.
흉신악살처럼 소름 끼치는 얼굴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심통은 이번 일에 바짝 날을 세우고 있었다.
“후, 훔치지 않았습니다.”
“만약 후에라도 네가 연 공자님을 속인 게 드러나면, 내 손으로 찢어 죽이겠다.”
살기등등한 심통의 말에 백교는 흠칫 몸을 떨었다.
잠시 후 연적하와 심통이 뇌옥을 떠났다.
경비들까지 밖으로 나가자 백교는 느긋한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후후…….”
메마른 그의 웃음이 텅 빈 뇌옥에 울렸다.
주저앉은 콧잔등을 쓰다듬던 백교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심통이 물었다.
“공자님, 백교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몰라.”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데요?”
“그것도 몰라.”
“어이쿠! 모른다고 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적풍채 채주가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모른다고 해.”
무책임한 연적하의 말에 심통은 속이 타들어 갔다.
“정말 어쩌시려고요? 모른다고만 하지 말고 공자님의 계획을 말씀해 주십시오.”
“뭘 자꾸 물어봐! 이젠 연 누님에게 가는 수밖에 없잖아! 뻔히 알면서 약 올리는 거야?”
“남궁 소저를 찾아가는 게 부담스러우십니까?”
“당연하지. 흑수선이 그렇게 개판 쳤는데 누님 얼굴을 어떻게 봐.”
“남궁 소저는 공자님이 찾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장담할 수 있습니다.”
“심 노인이 뭘 안다고?”
“다른 건 몰라도 여심에 대해서는, 제가 공자님보다 더 잘 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기루나 다니는 주제에. 세상 여자가 다 기녀 같은 줄 알아?”
“공자님, 그러지 마시고 남궁 소저를 만나면 딱 한마디만 하십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님입니다’라고. 그럼 끝납니다.”
심통이 연적하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